#406.
장승일 실장은 주춤했다. 그도 최용욱 회장의 심사가 복잡한 것을 눈치를 챘다. 지금도 손자 최민혁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아니, 장 실장 탓을 할 일은 아니지. 자네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최용욱 회장도 이제는 최훈열 전무가 KM 전자를 손아귀에 넣고 난 후에 시나리오를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KM 전자의 부실은 곧 다른 계열사로 확장될 것이 분명했다.
최훈열 전무가 단순히 KM 전자에만 손을 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최악의 상황은 어떻게 될까.
“…X 리포트 예언대로 흘러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어. 아니, 더한 상황에 놓였을지도 몰라. 그룹이 공중분해 되고도 남아.”
“그건 아닙니다.”
“글쎄, 지금 민혁이 그 녀석이 한 제안을 잘 보면 그런 염려를 하는 것이 분명해. 의심할 수밖에 없지. 은행 돈이면 얼마든 떼먹을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날 보고 돈을 내놓으란 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야. 틀림없어. 문제는 딱히 민혁이 그 녀석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거야. 차입금을 도입하면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자야. 패널 수익이 나올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는 거야. 아무리 VA 기술이 가치가 있다고 해도 말이야.”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이 작성한 VA 기술 관련 보고서를 읽으면서도 혀를 찼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VA 기술이 뭔지 알 수는 없었다.
보고서 결론만 참조했다.
[IPS 기술과 VA 기술은 비슷하지만, 성능 자체는 차별이 있습니다. 색 재현율 특성 때문에 고가 패널에는 오히려 VA 기술이 유리합니다.]
주로 아날로그 TV 사업을 해왔기에 기획 조정실은 VA 패널 기술을 차세대 TV 기술로 보았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최민혁 실장이 한 주장에 100% 아니, 200% 공감했다.
“좋아. 민혁이 그 녀석 주장도 일리가 있어.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장 실장 자네가 새로운 계열사 이야기를 내놓기가 무섭게 이런 기술을 내놓았으니, 민혁이 녀석은 이미 사전에 대비한 셈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이번 일도 영문을 잘 모르겠어.”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 제안이 석연치 않다는 점을 느꼈다. 굳이 손자 최민혁이 일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래. 돈을 내놓으라면 내놓아야지. 3억 달러 정도면 괜찮겠나?”
장승일 실장은 깜짝 놀랐다.
“네? 저, 정말입니까?”
“왜 난 돈이 없을 것 같나. 뭘 그렇게 놀라. 장 실장 자네도 내가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면서 그래?”
“아, 무, 물론입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이 진짜 놀란 것은 3억 달러 때문이 아니라 이 돈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최용욱 회장의 태도 때문이다.
‘설마 비자금이 더 있다는 말인가?’
장승일 실장도 벨린 투자가 비자금을 운영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규모도 어느 정도인지 안다. 다만 전체 금액 규모는 잘 몰랐다.
그는 최민혁의 선친 최병문 상무가 굴린 비자금 규모를 다 알지는 못했다.
최용욱 회장은 머리를 굴리는 장승일 실장 모습에 피식 웃었다.
“문경이 그 녀석이나 잘 설득해 봐. 아마 돈 내놓으라고 하면 펄쩍 뛸 테니까.”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의 서재를 나서면서 머리를 맹렬하게 굴렸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최용욱 회장의 3억 달러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설마 비자금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일까?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일까. 하긴 회장님이 비자금을 한 바구니에 다 담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니, 그러면 비자금 규모가 대체 얼마나 된다는 것일까?’
장승일 실장 머릿속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최병문 상무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덕분에 비자금을 정리하는 것이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 * *
KM 그룹 회의실은 오늘따라 유독 침묵이 크게 감돌았다.
장승일 실장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다들 탄식했다.
특히 VA 기술 관련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회의실이 시장 바닥처럼 어수선해졌다.
최문경 부회장조차 조카 최민혁 실장의 흉심에 입을 딱 벌렸다.
IPS LCD로 난리인 상황에서 또 뜬금없는 기술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패키지로 말이다.
[기, 기술적인 검토로 문제가 없는 건가?]
장승일 실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기획 조정실 인원을 총동원해서 기술 검토를 마쳤기 때문이다.
[이미 LCD 패널 전문가 몇 사람에게 자문한 결과는 보고서 제일 뒤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경악한 최문경 부회장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이성을 차렸다.
그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면 최민혁이 이걸 이용해서 또 무슨 짓을 벌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찔했다.
방법은 많았다.
KM LCD 설립 후에 경쟁 회사에 VA 기술을 던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마 오성 전자가 이 VA 기술을 확보했다면 KM LCD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만 설마 그런 방법을 이미 생각해 둔 것은 아닐까?’
[장 실장, 혹시 다른 대기업이 이 VA 기술을 확보할 수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부분에 대한 법적인 문제는 확실히 해둘 건가?]
[최 실장님 이야기로는 우리 계열사가 영원히 독점하게 둘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대략적인 기간은 7년 독점입니다.]
7년이면 나쁘지 않았다.
그 기간이면 KM LCD도 어느 정도 기술적인 경쟁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만 현금을 내놓으란 이야기는 좀 달랐다.
그것도 최문경 부회장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형차 충돌 사고 시에나 날 법한 큰 소리가 회의실을 울려 퍼졌다.
[야, 장 실장, 너 미쳤냐?!!]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 소리에는 다름 아닌 최문경 부회장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부회장실도 아닌 KM 그룹 회의실에 모인 실무자들은 다들 장승일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LCD 계열사 설립 때문에 모인 이들은 다들 혀를 찼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최문경 부회장을 상대로 ‘Show me the money!’라는 제안을 내놓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웃기는 것은 장승일 실장이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을 그대로 최문경 부회장에게 전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아직도 분노가 가신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 민혁 그놈이 그룹 경영에 내해서 일일이 다 간섭해? 장 실장 자네는 자존심도 없어. 어떻게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이 자리에서 말하는 거야?!!]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의 주장도 마냥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KM LCD 설립 전까지의 적자가 문제입니다.]
[그거야 은행에서 대출받으면 되잖아?]
[최 실장님은 불확실성을 원치 않은 것 같습니다. 당장 자본이 없다면 그 사업의 미래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한국 대기업 중에 어떤 기업이 자기 자본만으로 사업해?!]
[압니다. 하지만 최 실장님은 자금이 확실치 않다면 LCD 기술을 제공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최민혁이 딱 찍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이 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할 입장도 아니었다.
설사 틀린 이야기라고 해도 최민혁은 맞는다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장 실장, 정말 확실한 것 맞아?]
[네, 확실합니다.]
이미 최용욱 회장에게 허락을 얻은 장승일 실장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님의 태도는 완고했습니다. 차입금이 없다면, 본사 건물을 담보로 해서라도 확실한 보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물론 최민혁이 한 적이 없었다.
장승일 실장도 분노해서 그냥 말을 막 던졌다.
최문경 부회장을 어금니를 악물었다.
[장 실장,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자네도 그런 생각이 안 들어?]
[저도 압니다. 할 말이 많습니다만 최민혁 실장님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회장님도 3억 달러를 내놓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 아버지가 정말 3억 달러를 내놓겠다고 한 거야?]
[네. 직접 전화해서 확인하셔도 됩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3억 달러’라는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최용욱 회장과 독대할 때 가끔 들은 이야기였다.
최용욱 회장이 죽고 나면 그 비자금은 전부 자신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돈이 LCD 계열사 설립 자본금에 들어간다고 하자 뒤늦게야 당황했다.
비자금 3억 달러는 쌈짓돈으로, 드러난 있는 자본금 3억 달러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3억 달러라는 말에 다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정말 3억 달러 비자금을 가지고 있어?’
‘비자금 이야기는 말이 많이 나왔어.’
‘최병문 상무님이 이익을 자주 봤다는 소리는 계속 있었어.’
‘아무리 그래도 3억 달러라니. 아니, 그러면 과거에 나온 차입금 이야기는 또 뭐야?’
‘뭐 다 알면서 그래?’
3억 달러는 최용욱 회장이 KM 그룹 비상시기를 대비해서 꿍쳐놓은 돈 중 하나였다. 결국, KM 그룹 회의는 산으로 갔다.
최문경 부회장은 크게 당황해서 소리쳤다.
[일단 회의는 여기서 끝내. 그 안건은 다시 이야기 좀 하지. 장승일 실장은 잠깐 나 좀 봐.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최문경 부회장이 장승일 실장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가 버리자 회의실은 곧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 * *
3억 달러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당장 63억 8천만 달러 매출을 기록한 LC 그룹의 순이익 규모가 3억 달러가 채 안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무리 최용욱 회장이라고 해도 3억 달러는 쉽게 만질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조차 최용욱 회장에게 비자금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정확한 액수는 몰랐다. 그는 복잡한 눈으로 맡은 맞은편에 앉은 장승일 실장을 째려봤다.
“정말 아버지, 아니, 회장님이 그런 말을 한 건가?”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이미 의도한 바가 있었다. 그는 돈의 출처를 명확히 해서 최문경 부회장이 독단적으로 의사결정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회장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마 부회장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계열사 설립을 하더라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투자를 하셔야 할 겁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돈 내놓으라는 소리에 장승일 실장에게 버럭 소리쳤다.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나에게 돈이 어디 있어?!”
하지만 장승일 실장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도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몰랐지만, 지금은 감을 잡았다.
“정 안 되면 평창동 저택을 담보로 은행에 대출이라고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야, 장 실장, 지금 날 협박이라도 하자는 거야?!!”
자존심이 상한 최문경 부회장은 장승일 실장 멱살이라고 잡으려고 했다.
다행히 권재홍 비서실장이 중간에 최문경 부회장을 말렸다.
“장 실장님, 그건 정말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계속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자기주장이 무리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하지 않는 말을 적당히 각색해서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하지만 이번 일에 키를 쥔 것은 최민혁 실장님입니다. 계열사 설립 자본금에 대한 투명한 정보를 원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차라리 오성이나 LC 전자 측에 기술을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로 펄쩍펄쩍 뛰었다.
“미, 민혁이 그놈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아니, 민혁이 그놈이 무슨 권리로 그런 수작을 부려. KM 전자가 민혁이 그놈인 것인 줄 알아?!!”
사실 최용욱 회장이 거의 공짜로 넘긴 지분을 걸고 한 이야기다. 일리가 있었다. KM 전자의 성장에는 최용욱 회장의 배려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최민혁이라고 해도 KM 전자를 쉽게 먹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