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만약 맨땅에서 시작했다면, 이렇게 단기간에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장승일 실장도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최 실장님이 이번 제안을 받아준 것으로 기존에 받은 모든 혜택에 보상한 것으로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VA 패널 기술의 가치를 고려하면 무리한 것도 아닙니다.”
애매한 대답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억지는 아니었다.
최용욱 회장조차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룹 경영권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최문경 부회장은 달랐다.
“이 개같은 놈들!”
최문경 부회장은 평소의 가면을 벗어던진 채 한동안 난리를 쳤다.
“최민혁 이 새끼를 죽여 버리겠어!!!”
결국 장승일 실장은 흥분한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 부회장실을 나가고 말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장승일 실장과 헤어진 후에도 쉽게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의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리다가 슬그머니 한마디 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저 개소리를 듣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게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순순히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알았으니, 더 잘된 셈입니다.”
“그게 뭔 황당한 소리야?”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순순히 제안을 받았다면 전 의심했을 겁니다. 아무리 바보라도 자신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먼저…….”
권재홍 비서실장은 자신이 한 말이 뒤늦게 최문경 부회장을 비난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 말을 알아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남이 차린 밥상을 먹으려고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는 뒤늦게야 소파에 가서 풀썩 앉았다. 권재홍 비서실장 말이 맞았다. 의심이 그렇게 많은 조카 최민혁이 과연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가만 생각해 보면 VA 기술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뒤통수 칠 방법이 많아. 차라리 이렇게 끝난 것이 다행일 수도 있어.’
최민혁이 VA 기술을 이용해 진행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당장 그 자신도 4~5가지가 떠올랐다.
최악의 경우를 떠올린 최문경 부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보다 사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뭐가 좋다는 건가?”
“일단 VA 기술을 안 것이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회장님의 비자금 규모입니다. 혹시 부회장님은 회장님의 비자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아셨습니까?”
“…아니, 나도 몰랐어. 그 돈을 관리한 사람은 막내였으니까. 규모가 제법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확한 액수는 몰랐어.”
“최소가 3억 달러는 넘는다는 말이군요. 현실적으로 5~7억 달러는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비자금 규모를 어느 정도 산출할 수 있다는 점만 해도 성공적입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뒤늦게야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는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너무 흥분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막상 중요한 정보가 드러난 것을 뒤늦게 안 것이었다.
‘도대체 비자금 규모가 정확히 얼마일까?’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도 이번 일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최병문 상무님이 관리했던 비자금 규모는 정확하게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대략 어느 정도 된다는 것은 아실 것 아닙니까?”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는 목이 타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에 지난 일을 돌이켜 봤다. 막내가 죽은 이후에 그 일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일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제법 있었다.
지금도 자신과 손을 잡고 있는 샐로먼 브러더스의 행동은 뭔가 이상했다.
‘난 아버지가 손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쪽에서는 KM 그룹 자금 파악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말이다.
그 일이 그냥 흐지부지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SB 증권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SB 증권이 고작 자본금 500억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별 의미는 없었다.
“…다만 비자금을 여러 개로 나눠서 관리했는데, 그 일을 책임진 사람은 따로 있었어.”
“설마 알려진 비자금 외에 또 다른 비자금이 있다는 말입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눈빛을 반짝이는 권재홍 비서실장에 피식 웃고 말았다.
“자네라면 문제가 될 비자금을 하나의 지갑에 관리하겠어? 국세청 눈치를 봐야 하니, 여러 개로 나눌 수밖에 없어. 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최문경 부회장은 몇 년 전 기억을 하나둘씩 떠올리다가 곧 익숙한 한 이름을 기억했다.
“아, 맞아. 병문이가 친구라고 소개해 준 이가 있었는데. 벨린 투자의 이사 데니스 리란 친구야. 한국 이름은 이영민이라고 했을 거야.”
“…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비자금 규모를 다 아는 사람은 데니스 이사와 회장님뿐입니까?”
“그렇지. 그 노인장이 설마 다른 주머니를 꿍쳐뒀을지는 생각도 못 했어.”
이제까지 최문경 부회장은 그래도 최용욱 회장 말을 믿었다. 그런데 비자금 3억 달러만 해도 당장 사실과는 달랐다.
‘뭐, 지금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꺼내봐야 투자를 해서 수익을 더 벌었다고 하겠지. 젠장맞을. 설마 그렇게 많은 돈을 꿍쳐놓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는 경영권 승계 문제 때문이 아니라 비자금 때문에 아버지 눈치를 봐야 했다.
실로 짜증스러운 일이다.
“…우리 아버지 건강은 어떻대?”
“주치의 말로는 30대 젊은이 못지않다고 합니다.”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그렇게 건강이 좋아졌다고?”
“건강관리를 꾸준히 한 것으로 압니다. 식단과 운동을 같이 병행했습니다. 거기에 회사 일에서 손을 떼면서 스트레스가 줄어든 것이 큽니다.”
가장 큰 것은 역시 KM 전자의 독보적인 성장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KM 그룹은 재계 서열 20위 안에 올라갔다.
최용욱 회장이 그렇게 꿈꾸던 목표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러니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지금 돌아가는 모든 상황 때문에 숨이 막히자 꽉 조인 넥타이를 풀어서 책상 위에 집어 던졌다.
“…미치겠네.”
권재홍 비서실장도 최용욱 회장의 건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이 안건을 고민했다. 그 역시 예상치 못한 사태에 크게 당황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장승일 실장이 기술 검토를 마친 상황이니, 기술 자체는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최대한 자금을 긁어서 자본금에 보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자기 돈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태도를 달리해서 보수적으로 나갔다.
“만약 KM LCD가 망하면?”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기술이고, 이미 수십 명의 전문가가 기술 검토를 거쳤습니다. LC 전자와 오성 전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IPS LCD와 비교해서 색 재현율은 한 수 위입니다. 그렇다면 해볼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이 굳이 회의 도중에 폭탄을 터뜨린 것은 투명성 때문일 겁니다. KM LCD에 대한 영향력을 키울 셈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안 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니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회장님이 KM LCD 지분을 다 장악할 겁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당치도 않는 상황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버럭 소리쳤다.
“하, 젠장맞을! 그렇지. 맞아. 돈이 되니, 장 실장이 그 지랄을 하는 거고, 아버지도 다르지 않아!”
“문제는 자본금인데, 지금 봐서는 그룹 자금을 가져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특히 KM 전자 횡령 사건 때문에 아직 검찰의 시선이 떠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부회장님이 직접 투자를 하셔야…….”
“그건 따로 확인을 해봐야 해.”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이 물러나자 혀를 차고 말았다. KM LCD란 매물은 먹음직했다. 막상 투자하려니,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조카 최민혁이 만든 실적이기 때문이다. 의도한 대로 잘 풀었는데, 이대로 남 좋은 일을 시킬 수가 없다.
다만 자기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자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전부 내 돈줄을 노리잖아!’
* * *
최문경 부회장도 물론 여러 가정을 거쳐서 비자금을 축적했다. 다만 그 역시 본인의 정확한 비자금 규모를 잘 몰랐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당장 가용 가능한 자금과 그렇지 않은 자금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즉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재산은 그렇게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다.
그는 뒤늦게야 자기 비자금 담당자인 양문경 변호사를 통해서 KM LCD에 투입할 자금 규모를 파악했다.
“…내가 지금 모을 수 있는 돈은 1억 달러를 조금 넘어.”
권재홍 비서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바로 최문경 부회장 자산은 꽤 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는 없습니까?”
“자네도 잘 알겠지만 대부분 부동산에 묶여 있어. 그나마 가능한 현금성 자금은 또 다른 곳에 묶여 있고.”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최문경 부회장도 착잡한 얼굴로 지난 일 한 가지를 언급했다.
“아, 차명으로 돈을 돌려놓았는데, 그 지분을 가진 이가 둘째야. 당시 횡령이다 뭐다 조사를 진행하면서 일절 손을 댈 수가 없었어. 물론 그 녀석도 내 허락 없이는 돈을 쓰지 못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하면 얼마 정도 가능합니까?”
“다 합치면 적어도 2억 달러는 넘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직접 최훈열 전무를 만나보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네. 제가 변호사 자격증이 있습니다. 접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참, 그랬지. 하지만 지금 훈열이 상태가 안 좋아. 쉽게 허락할지 모르겠어. 허락한다고 해도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낼 수도 있어. 그놈 지금 정신상태가 장난 아니거든.”
“다가 아니어도 일부면 됩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은 차명과 관련된 서류를 금고 안에서 꺼내서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넘겼다. 그는 몇 번이나 당부했다.
“민혁이 그놈을 조심해. 분명히 다른 꼼수를 쓸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최훈열 전무는 감옥에 들어간 이후에 한동안 분노로 이성을 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상태는 더 심해졌다.
결국 그는 감방에서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게 가짜 병이 아니라 진짜 정신질환이 생겨난 것이었다.
다행히 최근 와서 부쩍 경과가 좋아졌다.
하지만 최훈열 전무는 정신병 치료를 핑계로 정신 병원에서 계속 버텼다. 일반 재소자라면 꿈도 꾸지 못한 일이다. 다행히 정신병 의사에게 로비한 덕분에 어떻게 버틴 것이었다.
최훈열 전무가 자신을 찾아온 권재홍 비서실장을 보고 미친개처럼 설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정신질환에 차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권 실장이 웬일입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자주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주변 시선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정확히는 민혁이 시선이겠죠. 설마 아직도 그놈이 절 감시라도 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 관둡시다. 민혁이 그놈 이야기는 하기도 싫으니까.”
최훈열 전무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형량을 줄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 노력이 전혀 헛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 2심도 있고, 3심도 남았다. 심지어 정신병을 앓고 있기에 형량을 대폭 줄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능하면 지금 이 상황에서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최민혁’ 이야기가 또 나오자 흥분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가만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바쁜 권 실장이 이렇게 절 찾아온 겁니까? 설마 형이 이제 비자금을 정리하려고 하는 겁니까?”
“…네.”
“호오, 그래요.”
최훈열 전무 눈빛이 달라졌다. 물론 자기 명의로 빼돌린 비자금 일부는 최문경 부회장 것이 맞다. 정확히는 KM 전자에서 빼돌린 비자금 중에 일부다.
KM 전자 비자금은 하루 이틀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몇 년에 걸쳐서 진행된 일로 당시 거래를 했던 핵심 중소기업은 파산하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