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
“히타치, 오성 전자, LC 전자는 오히려 IPS 대응 기술에 집중해야 했지만, 상황이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다들 IPS 패널에 정신이 나가서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최민혁이 시작한 사태를 키운 것은 한국 언론이었다.
이 사태를 활용한 이는 다름 아닌 최문경 부회장이었다.
그러니 다들 신기술에 대한 탐욕 때문에 다음 단계를 간과했다.
이 사태는 최민혁이 만든 것이 아니지만 제삼자가 보기에 이 일의 모든 배후에 최민혁 실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최민혁은 뒤늦게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자칫하면 LCD 업계에 자신이 보스 몬스터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불편한 진실을 안 장승일 실장은 기가 막혀서 최민혁의 얼굴과 보고서를 번갈아 가면서 확인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에 경악하고 말았다.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의 태도에 피식 웃고 말았다.
“가능하면 액정 분야는 이해관계 당사자끼리 영역을 나누는 것이 좋겠죠. 안 그러면 물고 뜯고 싸울 텐데, 결국 저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판을 잘 짜면, 경쟁 관계 덕분에 오히려 시너지가 생길 겁니다. 그 사이에서 아마 우리 그룹도 재미를 꽤 볼 겁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이건 다시 검토를 해봐야 합니다.”
장승일 실장도 최민혁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아서 말을 머뭇거렸다.
VA 기술은 시간이 흘러도 나름의 주목을 받는 액정 기술이기 때문이다.
다만 최민혁은 X리포트에서 언급한 IMF와 관련된 사안을 말하지 않았다. IMF가 터지면 아무리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라도 박살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의 표정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너무 정석으로 나오는 것도 수상했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이 일에 최용욱 회장과 최문경 부회장이 엮여 있기 때문이다.
최민혁이 그걸 다 알면서 아무리 최용욱 회장에게 진 빚을 갚는다고 해도 최문경 부회장에게 좋을 일을 할 리가 없다.
최민혁도 장승일 실장을 압박할 생각은 없었다.
“정 기술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김호동 박사님에게 요청하세요. 김 박사님은 이쪽 바닥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전문가입니다.”
최민혁 실장의 지시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따르기만 했던 김호동 교수는 무안해서 슬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내막을 잘 모르는 장승일 실장은 그런가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어차피 특허 출원이 끝난 기술이다. 심지어 IPS에서 출발한 기술이다. 그걸로 새로운 특허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이 굳이 새로운 기술을 장승일 실장에게 소개해 준 이유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너무 쉽게 넘어가는 친절한 최민혁 실장 모습은 전혀 최민혁 실장답지 않았다.
최민혁은 의문이 가득 담긴 장승일 실장 시선을 느끼자 툴툴거렸다. 최소한의 변명 정도는 다시 한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할아버지에게 어느 정도 지시를 받았을 것 아닙니까. 제가 지금까지 할아버지에게 받은 것도 있는데, 제안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단 이번 일을 통해서 기존에 받은 혜택은 퉁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그렇게 전해주세요.”
“…네.”
결국 이번 딜을 계기로 최용욱 회장이 최민혁에게 준 KM 전자 지분에 관한 모든 계산을 정리하겠다는 의미였다.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했다. 이런저런 의문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심술 1,000단 같은 표정을 한 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단 하나의 대답을 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최문경 부회장을 노리는 것 같은데, 정말 모르겠어. 도대체 이 중요한 기술을 이용해서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다만 최민혁도 장승일 실장 얼굴에 떠오른 의혹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자 계약을 할 때 하려고 내걸 조건을 미리 말했다.
“단 차입금은 안 됩니다. 자기 돈으로 투자해야 이번 일을 허락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할아버지가 부탁해도 신사업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네.”
장승일 실장은 일방적인 최민혁 실장의 조건에도 오히려 의혹을 털어버린 채 ‘그러면 그렇지!’라는 얼굴을 한 채 보고서를 챙겨서 조용히 사무실을 나갔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기에 저런 표정 변화를 보이는 걸까?’
* * *
KM 그룹 전략 기획실 이수연 대리는 최근 와서 KM 그룹 계열사 분위기가 바뀐 것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부실했던 계열사의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히 KM 인스트루먼트 사장 김환진 사장의 항의 전화를 몇 번이나 받았다.
[전략 기획실은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우리 회사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섰으니, 다른 사업을 검토해도 되지 않습니까? 무조건 일방적으로 기다리라고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IPS LCD인가 뭔가 하는 사업에 집착하는 것 같은데, 과연 그 사업이 잘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제가 말씀드릴 사안이 아닙니다. 장 실장님이 회사에 복귀하면, 사장님께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 장 실장님에게도 불만이 많습니다. 도대체 이 중요한 시기에 왜 항상 자리를 비웁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계열사를 방문하러…….]
[하, 우리 회사는 KM 그룹 계열사 아닙니까? 도대체 우리만 왕따를 시키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지난달 실적을 제가 다시 말해야 합니까?!]
[죄송합니다. 그 일은 이미 결정이 난 것입니다. 만약 상황이 바뀌었다면, 다시 전략 기획실에서 검토할 예정입니다.]
이수연 대리는 김환진 사정을 설득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중에 따가운 전략 기획실 직원의 시선을 받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장승일 실장이 복귀하기가 무섭게 회의 준비를 끝냈고, 회의가 시작하기가 무섭게 이 안건을 먼저 보고했다.
[KM 인스트루먼트에서 자체 개발한 오토 자동 프레임 장비인 공정 자동화 장비 300대를 필리핀에 공급하면서 작년 대비 매출이 300% 이상 늘어났습니다.]
이 새로운 장비는 리드 프레임 불량률을 대폭 감소했다.
심지어 반도체 후공정 장비인 자동 몰딩 시스템까지 개발했다.
국내에 들어간 50대 분량은 KM 산업에 들어가서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더불어 일본을 비롯한 미국 쪽과 100대 공급 계약을 마쳤습니다. 모두 500억이 채 안 되는 물량입니다.]
이 새로운 자동 몰딩 시스템은 부가 가치가 높아서 수익성이 무려 40%가 넘는다. 장비 개발에 들어가는 원재료 비용이 적기 때문이다.
KM 인스트루먼트의 반도체 장비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가져온 놀라운 성과인 셈이다.
[…….]
장승일 실장조차 깜짝 놀랐다. 그도 KM 인스트루먼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보고받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수연 대리는 이 결과가 나온 과정에서 들어간 게 단순한 KM 인스트루먼트 노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래도 IPS LCD 사태를 통해서 KM 전자의 브랜드 인지도가 점점 커지면서 계열사인 KM 인스트루먼트 역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매출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특히 KM 인스트루먼트는 의료 장비를 비롯한 불필요한 사업을 정리한 덕분에 반도체 장비에 대한 완성도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런 점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여기까지 나온 이야기에 회의실에 참석한 전략 기획실 직원은 다들 혀를 내둘렀다.
KM 인스트루먼트 성장이 생각보다는 더 빨랐기 때문이다.
장승일 실장은 관자놀이를 쿡쿡 눌렀다.
[그래서? KM 인스트루먼트의 김환진 사장이 계속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검토 중이라는 건가? 다시 신규 사업을 해보겠다는 거야?]
[네. 특히 최근 의료기기 사업 자체가 주목을 받는 분위기인데, 전략 기획실에서 무리하게 구조조정을 하면서 기회를 놓쳤다고 계속 항의하는 중입니다.]
[하.]
장승일 기획 전략실 실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니, 아주 조용히 있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놈의 탐욕은 정말 무섭구나.’
전략 기획실 직원 역시 다들 혀를 내둘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던 이가 바로 김환진 사장이었다.
전략 기획실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KM 인스트루먼트가 성장할 수 있게 해놓으니, 인제 와서 뒤통수를 친 셈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른 계열사 보고는 별반 다른 이야기가 아니었다.
구조조정을 마친 대부분의 KM 계열사는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사태는 전부 다 KM 전자의 성장 덕분이었다.
아시아 시장을 주도하는 전자 회사 중에 3위권에 우뚝 선 KM 전자의 영향력이 KM 그룹 계열사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장승일 실장은 구길모 차장이 조사해 온 KM 전자의 영향력 보고서를 읽으면서 새삼 최민혁 실장의 능력에 감탄했다.
‘지금은 최민혁 실장님을 의심할 시기가 아니야. 어떻게 해서라도 최민혁 실장님의 도움을 받아야 해!’
결국 그 역시 전략 기획실 임직원이 지금까지 올린 보고서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VA 기술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일단 지금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은 보류하고, VA 기술에 대한 검토부터 먼저 시작해. 다음 주에 회장님에게 보고해야 할 안건이니, 중요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VA 기술에 관한 이야기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 기술이 새로운 LCD 기술이라는 것을 알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기에 장승일 실장이 정리한 자료를 보자마자 다들 입을 딱 벌렸다.
장승일 실장은 설명을 두 번 하지 않았다.
[다들 이번 일을 통해서 KM 그룹 계열사 전체가 KM 전자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 정도는 알 거야. 그러니 이번 기술 검토는 특히 집중해서 해!]
전략 기획실 직원들의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오늘이 금요일인 탓이다. 결국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짜 이러다가 죽겠네.’
* * *
최근 미국의 일렉트로닉스가 밝힌 아시아 지역 전자업체를 대상으로 한 매출액 예상 순위 결과는 실로 흥미로웠다.
오리온 전기, 대운 통신, 삼보컴퓨터를 비롯한 국내 기업이 20위권 안을 기록했다.
여기에 KM산업이 10억 3천만 달러로 11위를 지켰고, 타퉁이 그다음 순위를 이어갔으며, 오성 전기가 12억 5천만 달러로 9위를 기록했다.
대운 그룹의 핵심 계열사 중의 하나인 대운 전자는 16억 2천만 달러로 8위를 기록했고, 오성 전관이 18억 6천만 달러로 7위, LH 반도체가 17억 8천만 달러로 6위에 랭크됐다.
HY 전자는 26억 4천만 달러로 5위를 기록했으며, 대만의 에이서가 32억 5천만 달러로 4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35억 7천만 달러로 3위를 차지한 것이 KM 전자였다는 것이다.
작년 매출이 고작 3억 2천만 달러라는 것을 고려하면 불과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매출액이 무려 10배나 껑충 뛰었다.
2위의 63억 8천만 달러 LC 전자를 넘어서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순이익 순위는 좀 달랐다.
선두를 기록한 LC 그룹이 3억 8천만 달러를 좀 넘었는데, KM 전자는 무려 10억 3천만 달러 이상의 이익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업부 매각에 따른 이익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콜린스, KMP-01을 시작으로 한 이익 증가율은 내년에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었다.
KM 그룹 계열사 하나가 대한민국 대기업 순이익 규모를 넘어선 것이다.
이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신문 1면에 큼직하게 장식한 ‘KM 그룹의 기적!’이란 제목을 보면서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TRS 사업 포기를 비롯한 구조조정 덕분에 KM 그룹 매출이 큰 폭으로 내려서 KM 전자를 뺀 재계 순위는 38위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KM 전자를 포함한 KM 그룹 재계 순위는 놀랍게도 19위를 기록했다.
32위에서 껑충 뛰어오른 셈이다.
이제는 KM 그룹이 대한민국 재벌이라고 당당히 말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축하할 일은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