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
“…설마 켐코가 다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래 기술에 대한 안목이 혁신적인 최민혁 실장이 켐코 기술을 노렸습니다. 그건 뭔가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
* * *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면서도 딱히 최민혁의 제안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KMP-01을 제이크 샌더슨 박사에게 보여주었다.
“어떻습니까?”
“…이건 KMP-01이군요”
“역시 아시는군요.”
“부사장님에게 연락을 받고 나서 일부 조사를 해봤습니다. 설마 부사장님이 이걸 구입하고 계셨는지는 몰랐습니다.”
커닝은 유리 전문 회사다. 딱히 KMP-01과 겹치는 영역은 없다.
제이크 샌더슨 박사 처지에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CTO가 아니다. 그는 마케팅, 영업을 비롯한 다양한 경험을 한 바 있다. 따라서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접했던 사람처럼 최민혁 실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이건 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의외로 최민혁 행보를 주시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다.
그중에는 에플 CEO인 토비 스핀들러 역시 빼놓기 어렵다.
ARN 지분 인수 배후에 뒤늦게 최민혁 실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 정보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얻은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최민혁의 행보를 진지하게 지켜봤다.
최민혁 실장 관련 보고서는 KM 전자의 행보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MP3, K투스, IPS LCD에 이어지는 기술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었다.
심지어 IPS LCD가 가지는 가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았다.
“…이건 진짜 놀랍군요. 히나치 공작소에서 소송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런 내막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이크 샌더슨 역시 아직은 IPS LCD 가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KM 전자와 히타치 공작소 간의 갈등을 간과했다.
정확히는 유리 전문가인 그는 IPS LCD에 대해서 알지는 못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제이크 박사를 굳이 질책하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분야라서 그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본다면 켐코 사업에 뭔가 있을 겁니다.”
“설마 켐코 사업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죠. 하지만 다른 분야라면 다르지 않을까요?”
“정확히 어떤 분야를 말하는 겁니까?”
“모릅니다.”
“네?”
데니스 워드 부사장 역시 솔직하게 고백했다.
“최민혁 실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켐코 사업을 원했다면, 켐코 사업부 매각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IPS LCD와 같은 차세대 패널과 관련된 원천 기술을 고안한 사람이 최민혁 실장입니다. 그런 그가 노린다? 그렇다면 켐코 사업은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겁니다.”
제이크 샌더슨 박사는 창백한 데니스 워드 부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좀비 같은 얼굴이지만 그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야심은 덤이다.
최민혁 실장이 보고 있는 가치를 파악해서 이용한다면 위로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일단 켐코 사업부를 한번 살펴보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입니다. 가용 가능한 모든 인력을 다 동원해도 됩니다. 제가 각 연구소에는 따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이크 샌더슨은 부사장실을 나가면서도 혀를 찼다. 그는 켐코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켐코가 어떻게 돈이 된다는 것일까?’
* * *
켐코 가치에 관한 조사는 커닝 내부에서 조용히 진행되었다.
단순히 켐코 사업부만이 아니라 가용 가능한 인력이 총동원되었다.
내부에서는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이번 일에 참여한 이들은 KMP-01을 한 사람당 4~5대씩 공급받았다. 이 MP3와 켐코 사이의 관계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만에 하나라도 켐코 가치를 알아낼 일은 없었다.
최민혁이 그리는 사업은 지금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최민혁이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안으로 뒤늦게 데니스 워드 부사장과, 제이크 샌더슨 박사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다.
두 사람은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생각보다는 뛰어난 시야와 실무 능력을 갖췄다. 쉽게 말해서 기술에 대한 안목이 탁월했다.
“아, 골 아프네요.”
조성돈 팀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국내 기획 팀을 비롯한 자신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모든 채널을 다 동원했다.
심지어 권태성 실장의 도움도 얻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간단했다.
“두 사람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자신이 정한 결정을 쉽게 바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네요.”
사실 제이크 샌더슨 박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유리 전문가일 뿐이다. 새로운 시장에 대한 안목은 좋지가 않았다.
하지만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는 평직원으로 시작해서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거의 커닝이란 회사와 결혼까지 한 사람이다.
“지금 부인과는 별거라, 가족 문제가 많은 것 같네요. 그래서 더 안 좋아 보입니다.”
김명준 과장은 이번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을 준 덕분에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의견을 내밀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에 대한 설득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일에 미쳐 사는 사람으로 사내 평가도 좋은 편은 아닙니다.”
“그 정도로 심해요?”
“커닝 내에서도 다들 학을 뗀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능력만큼은 무시하기 힘듭니다. 동아시아, 유럽 시장에서 높은 성과를 낸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정한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데니스 워드는 단순히 능력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의 최측근이었다. 그만큼 커닝 내에서 신뢰를 받고 있었다.
최민혁은 조용히 김명준 과장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안이 없었다. 결국, 다른 편법이 필요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파고들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데 김명준 과장 이야기 속에는 꽤 재미있는 정보가 포함되었다.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이 다음 커닝 실소유주인 겁니까?”
“네. 하우튼 일가가 커닝 실소유주라고 보면 됩니다. 실상 하우튼 일가가 설립한 회사가 커닝이니까요.”
“그래요? 그렇다면 하우튼 일가 내에는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싫어하는 사람도 제법 있겠어요. 특히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 상속자와는 친하지 않겠어요.”
“네?”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은 이미 부회장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밑에는 이야기가 다를 것 아닙니까. 일테면 상속자 같은 경우죠. 아무래도 데니스 워드 부사장과 비교되지 않을까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거야…….”
조성돈 팀장과 김명준 과장은 심각한 번민에 빠졌다. 전혀 생각도 못 한 관점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둘째 큰아버지 최훈열 전무를 축출했고, 최문경 부회장과 심각한 갈등 관계가 있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김현우 상무를 비롯한 썩은 부위를 도려냈다.
커닝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고 확신했다.
“제 말은 데니스 워드 부사장 반대편에 선 이들은 그와 의견이 다를 겁니다. 따라서 우리 제안을 일방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죠. 어차피 그들이 켐코의 가치를 알 리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찍어 누를 명분으로 충분하죠.”
“켐코의 가치 말입니까?”
“네!”
물론 조성돈 팀장도 아직 켐코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때문에 최민혁이 지금 하는 일을 찬성해야 할지, 반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나름 켐코를 가지고 연구를 해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IPS LCD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그들 모두 터치가 의미하는 본질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굳이 켐코에 관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이번 미팅 같은 경우에 괜한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불필요한 정보에 대한 힌트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 때 지켜지는 법이니까.
“일단 데니스 워드 부사장 반대 파벌을 한번 파보세요.”
“…알겠습니다.”
* * *
커닝은 켐코 때문에 시끄러웠다.
다만 미국에 와 있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 역시 일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아닌 이들도 존재했다.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말이다.
권태성 비서실장은 KM 전자와 커닝 사이를 연결해 준 후에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기획 팀을 총동원해서 이들을 살폈다.
하지만 그가 마음 편하게 조성돈 팀장의 행보를 살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IPS LCD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보가 제한이 있어서 이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주에 이 가치가 조금씩 윤곽이 드러난 것이었다.
정확히는 LC 전자 내부 채널을 통해서 정보를 얻은 셈이었다.
“10㎳ 이하 응답 특성이 있는 LCD 패널 개발이 가능하다는 말이야?!”
LC 전자가 가능하면, 당연히 오성 전자도 어렵지가 않다.
권태성 실장이 경악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오성 전자의 행보가 느려진 것은 역시 PDP 패널로 오성 전자가 재미를 단단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LCD 패널이 상업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방심한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LC 전자를 늘 지켜보고 있기에 누락된 정보를 얻은 것이었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만약 LCD 패널이 정말 상업화에 성공한다면 오성 전자 PDP 사업 근간이 뒤흔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PDP 사업을 위해선 투자한 공장, 대리점, 연구소를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손실을 볼 수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오성 전자 기획실에서 분석하지 않았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될 수 있었다.
권태성 실장은 덕분에 조성돈 팀장이 미국에 가서 뭘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간과하고 말았다. 정확히는 한 가지 일 때문에 조성돈 팀장을 잊어버렸다.
오성 그룹 윗선에서 이번 일에 집중하라고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의 동선을 당장 파악해!”
단순히 최민혁 실장 행보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이 있는 모든 인물에 관한 조사였다. 거기에는 최용욱 회장 역시 포함된다.
* * *
최용욱 회장은 지긋지긋하게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잠시 휴가를 떠났다. 이 일은 생색내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IPS LCD 패널에 대한 정보는 히타치 공작소 덕분에 세세하게 그 정보가 드러났다. 황당한 것은 그 내용 자체가 쇼킹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LCD가 차세대 패널이 되는 것에 비관적이라는 것이 대다수 공감대였다. 그런데 IPS LCD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당장 PDP 패널에 목을 매고 있는 오성 전자가 난리였다.
심지어 차기 패널 시장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LC 전자 역시 행보가 공격적이었다.
HY 전자를 비롯한 다른 대기업의 행보 역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죄다 최용욱 회장을 스토커처럼 괴롭히기 시작했다.
특히 안건민 회장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행보를 보였다.
천문학적인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부담을 느낀 최용욱 회장은 결국 도피성 휴가를 떠나야 했다.
그는 차명으로 구입한 별장에서 장승일 실장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우리 KM 그룹 분위기가 난리라고?”
“네. 이전과는 사뭇 분위기 달라졌습니다. IPS LCD 가치가 드러나면서 KM 그룹 임직원이 죄다 최민혁 실장님을 옹호하는 중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굳이 장승일 실장에게 보고를 받지 않아도 피부로 느꼈다. 그는 IPS LCD 관련 보고서를 읽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