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
최용욱 회장도 처음에는 70억을 길바닥 내 버린 최민혁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니, 70억도 부족했다.
다만 신기한 것은 최민혁이 어떻게 결론을 냈느냐 하는 문제다.
“민혁이가 차세대 LCD 쪽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김호동 교수를 찾아가서 대안을 찾았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김호동 교수는 과거 콜린스 개발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따라서 최민혁 실장님이 김호동 교수를 만나서 대안을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불과 한 달 만에 했다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막상 대답하면서도 최용욱 회장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IPS LCD에 관한 조사를 하다 보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나왔다.
그는 솔직히 히타치 공작소를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 주장도 일리가 있어. 히타치 공작소 기술을 빼돌리지 않고서야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수는 없으니까.’
최용욱 회장이 고심에 빠진 장승일 실장의 표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히타치 공작소의 IPS LCD 개발 진척도 막바지였나?”
“히타치 내부 사정을 몰라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빨랐다면 한 달, 적어도 두 달 안에는 IPS LCD 특허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혁이가 이보다 앞서서 먼저 그 기술을 내놓았다고?”
“네.”
“그게 가능해? 세상 일이 그렇게 극적으로 될 수 있어?!”
장승일 실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다. 실상 조사도 했다. 문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많습니다. 히타치 공작소 주장이 억지가 다분하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의견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잠깐 망설였다. 그는 최용욱 회장 눈치를 보다가 결국 솔직한 자기 심사를 털어놓았다.
“기조실 조사 결과로는 실장님의 행보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습니다. 단순히 천재라는 수준이 아닙니다.”
“근거는?”
“히타치의 액정 특성 관련 특허 때문입니다. 히타치는 이 부분에 관한 연구에만 무려 3년을 투자했습니다. 이걸 기반으로 50명에 가까운 연구진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액정 특허 중에 몇 가지는 논쟁의 소지가 다분했다.
액정에 관한 다양한 특성 연구는 단순히 자본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랜 기간 실험과 실험을 통해서만 답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히타치 공작소조차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면서 결정적인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님은 달랐습니다. 마치 모범 답안을 아는 것처럼 콕 찍어서 해결안을 내놓았습니다.”
장승일 실장의 말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기조실 인원을 총동원했다. 딱히 최민혁 실장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히타치 공작소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흠.”
최용욱 회장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가 상상한 것보다 더 놀라운 진실이 이번 일에 깔렸었다.
결국 당사자의 의견이 더 중요했다.
“…민혁이는 뭐래?”
“그게…….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 난리를 만들어놓고 잠수라도 탄 거야?”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무리 알아봐도 최 실장님을 국내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오영근 사장한테 확인해 봤어?”
“…오 사장님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린 채 오영근 사장에게 직접 전화했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황당한 사실은 문형섭 부사장 역시 똑같았다는 것이다.
사장과 부사장이 동시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최용욱 회장, 자신의 전화를 말이다.
이것은 두 사람도 그만큼 외부 압박에서 시달리고 있다는 신호다.
대기업과 대기업의 압박을 받은 모든 세력이 두 사람을 스토킹하는 것이다.
최민혁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허허.”
장승일 실장이 최용욱 회장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 실장님은 아무래도 국내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면 그놈이 어디로 갔다는 소리야? 설마 미국에라도 갔어?!”
“…….”
대답 없는 장승일 실장의 행동에 최용욱 회장이 소리쳤다.
“정말 민혁이 그놈이 미국으로 갔어?!”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배로 중국으로 간 후에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한국 공항을 이용하면 출입국 사무소에 알려진다. 따라서 이 정보는 어지간한 곳에서는 다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라면 상황이 좀 다르다.
“기가 막히는군. 일단 민혁이 놈에게 연락해 봐. 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민혁이 그놈이 있어야 해. 내가 나서서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내가 언제까지 민혁이 그놈의 얼굴마담 노릇을 해야 해!!”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내심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최민혁 실장과 연락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하지만 IPS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그냥 사라지다니. 설마 IPS LCD보다 큰일이 뭐가 있는 걸까? 아니 도대체 IPS LCD와 같은 일은 왜 만든 걸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최 실장님을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로서는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뭘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IPS LCD 특허 때문에 국내 LCD 업계가 발칵 뒤집혔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을 싫어하는 이들은 계속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는 이들은 히타치 공작소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 사태는 시간이 갈수록 가라앉기는커녕 더 커져만 갔다.
***
최민혁은 물론 굳이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 역시 지금부터는 이전과는 사정이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의 영향력과 실력이 이제 서서히 드러난 상황이다.
그 어떤 세력도 이젠 최민혁을 얕잡아 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물론 여전히 20살 나이를 기준으로 삼아서 얕잡아보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둥벌거숭이나 해당한다.
하우튼 일가라면 그렇게 가볍게 보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적당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의 막내 제프리 하우튼 이사다. 돈과 여자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미국 명문 상속인이었다.
“괜찮네요.”
“말이 많은 친구이지만 데니스 워드 부사장과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사사건건 하는 일마다 태클을 걸고 있습니다.”
딱히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회사 미래 동력 엔진으로 유리가 아니라 IT 산업에 투자를 크게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주장은 IT 기업이 대박을 칠 때마다 주목을 받았다.
커닝 자체는 탄탄한 기업이라고 해도 실리콘 밸리에서 초대박을 터뜨리는 IT 산업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유리 하나에만 집중했고, 다른 산업은 다 정리해 버렸다. 심지어 있던 사업도 다 청산했다.
문제는 이런 행보가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이 원하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소외감을 느낀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발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이번 글라스 사업부를 맡은 것도 데니스 워드 부사장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기 아들인 만큼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최민혁은 고민에 빠졌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물론 신중하게 갈 필요가 있다. 자칫하면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눈치를 챌 수도 있었다.
“확실히 제프리 이사의 증오가 클 테니, 크게 무리하게 일을 벌일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적당한 선에서 한번 이야기만 해보는 것으로 합니다.”
“그 말씀은…….”
“괜히 너무 나대서 견제하는 것보다는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우리 제안을 거절했다는 점을 어필하는 것으로 합시다. 아마 제프리 이사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겁니다. 그렇게 일정을 잡아보세요.”
“…알겠습니다.”
***
“젠장맞을, 아니 내가 고작 레이싱용 글라스 사업부를 맡는다는 것이 말이 돼!”
유리 전문 기업인 커닝은 다양한 유리 사업을 하는데, 그중에 하나는 레이싱 유리다. 잦은 충격에 견딜 수 있는 특수 유리인 켐코 글라스가 이 분야에 사용된다. 따라서 일반 유리보다는 부가 가치가 높지만, 시장 자체는 크지 않았다.
사업적인 면에서 본다면 큰 실수만 없다면 탄탄한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강점이 있다.
하지만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야심이 많아서 이런 소극적인 사업이 싫었다.
그는 솔직히 IT 기업에 더 집중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압박에 일단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에 만나서 자신에게 직접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이게 모두 데니스 부사장 그 개새끼 때문이야!”
하우튼 가문 상속인 중의 한 명인 그로서는 사사건건 걸리는 데니스 부사장이 정말 싫었다. 오히려 다른 형제들은 조용히 있는데, 데니스 부사장이 더 날뛰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둘째 형 모리스가 배후에 있을 수도 있어.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이용해서 날 축출하려는 것이 분명해.’
특히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뉴욕 본사로 온 이후에 사태가 심각했다.
그런 그가 록몬드 오먼 부장에게서 특이한 보고를 받았다.
“KM 전자라…….”
“콜린스와 KMP-01을 출시한 회사입니다.”
“아, 몰라. 관심 없어.”
그는 KM 전자가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오만한 성정답게 미국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냥 또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만나서 사업 제의를 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KM 전자는 IT 기업에 관심이 많은 제프리 이사님이라면 좋은 대화 상대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매사에 순종적인 록몬드 오먼 부장은 제프리 이사의 개같은 성격을 잘 알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제프리 이사의 문제점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제법 통했다.
그는 KM 전자 이야기가 아니라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반대편에 섰다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단 말이지.”
“세계 최초로 MP3를 개발했고, K투스, 심지어 차세대 패널인 IPS LCD 기술까지 고안한 기업입니다. 만나서 손해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 히타치 소송으로 시끄럽다던 그 KM 전자를 말하는 건가?”
“네.”
“그 이상하네. 우리 쪽과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 기업이잖아.”
“콜린스에 들어가는 CRT가 있으니, 꼭 그렇게 보기 힘듭니다. 오성 커닝에서 제품을 공급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 뭐 만나보는 게 어렵겠어?”
“바로 약속을 잡겠습니다.”
***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최민혁과의 만남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CRT가 KM 전자와 무슨 연결 고리가 있는지도 관심은 없었다.
이보다는 오히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KM 전자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에 더 호기심을 가졌다.
그러니 다른 비즈니스 만남처럼 고압적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최민혁은 물론 굳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협상 제안보다는 오히려 데니스 워드 부사장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평소의 까칠한 성격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순종적인 동양인 연기를 멋지게 보여주었다. 마치 KM 전자가 커닝 하청기업인 것처럼 말이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 안목과 능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IT 관련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렇죠. 그 양반은 매사에 독선적이라서 남의 이야기를 안 들어요!”
“역시 제프리 하우튼 이사님은 답답한 데니스 워드 부사장과는 다릅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를 수밖에 없죠.”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인종차별적인 면이 있었지만 달달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최민혁 실장은 예외로 뒀다.
“최 실장, 당신도 능력이 제법 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차세대 CRT 때문에 고민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켐코 관련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이 기술만 이용하면 특수한 CRT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