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
“하지만 지금 실장님께서 하시는 것을 봐서는…….”
“밀당이죠. 연애의 정석이라고 해야 할까요. 애가 타는 놈이 지는 겁니다. 지금은 살살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면 지금 뉴욕에 온 것은 다른 문제란 말입니까?”
“빙고!”
“아니, 그러면 굳이 김호동 교수를 앞세워서 연구 성과를 다 폭로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조용히 할 수가 있지 않겠어요? 만약 기자들이 제 동선을 알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하는 일과는 상관없이 미국 특파원이 떼로 몰려올 겁니다.”
“흠.”
조성돈 팀장도 최민혁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 한국은 난리가 났다. K투스와 달리 IPS LCD는 상대가 히타치 공작소였다.
즉 이 IPS LCD 특허 분쟁은 국민적인 감정을 제대로 건드렸다.
언론은 이 장작불을 키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기름까지 퍼부으면서 이 사태를 키우고, 또 키웠다.
사건은 커지고 커져서 지금은 초창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 있었다.
김호동 교수는 이미 국민 영웅이 되어 있었고, 한국 첨단 기술의 선봉장이 되어 있었다.
최민혁은 이 모든 것을 주도한 한국 첨단 기술의 선지자가 되었다.
그나마 최민혁이 지금 한국에 있지 않아서 주목을 덜 받았다.
한국 언론사는 지금도 이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과장된 뉴스와 심지어 가짜 뉴스를 마구잡이로 계속 뿌리는 중이다.
이 사태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일본 언론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을 세기의 기술 강도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두 나라의 갈등이 이렇게 심해지자 미국 법원도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조성돈 팀장은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권태성 기획실장이었다.
[…커닝 실무진 쪽에서 조 팀장님에게 연락은 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커닝은 미국 유리 전문 회사로 세라믹, 광섬유 사업을 하는데, 이와 관련한 다양한 기술을 보유했다. 오성과 합작 회사도 설립했다. 오성 커닝이 그 경우다. 이 회사는 CRT TV용 유리를 전문으로 제작한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당연히 커닝 쪽과 소통 채널이 있었다.
[이런 말 해서 좀 그런데 KM 전자는 커닝과 겹치는 사업 분야가 있습니까? 굳이 왜 커닝 쪽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겁니까?]
[그건 우리 회사 내부 사정입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요즘 이런저런 일 때문에 예민해서 제가 실수했습니다.]
[천만에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우리 오성 전자는 KM 전자와의 협력에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권태성 실장의 노골적인 저자세에 조성돈 팀장은 새삼 혀를 내둘렀다. 그는 상상도 못 한 상대 반응에 그저 습관적인 멘트만 남겼다.
[우리 KM 전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성 전자와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권태성 실장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다른 질문인데, 혹시 최민혁 실장님을 볼 수 없을까요?]
[제가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는데, 전화기 옆에 귀를 기울이던 최민혁 실장의 손짓을 받자 단호하게 전화를 끊고 말았다.
“자자, 괜한 문제를 만들지 마시죠.”
다행히 커닝 쪽에서 곧 전화가 왔다.
최민혁은 약속 장소를 정한 후에 김명준 과장이 뒤늦게 가져온 커닝 경영진 리스트 관련 보고서를 하나씩 읽었다.
다만 그 역시 평소와는 달리 불안감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지금까지 순탄하게 흘러온 상황이 과연 이번에도 지속될까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직 커닝 쪽은 강화 유리에 대해서 모를 거야. 그러면 쉽게 갈 수는 있는 것 같은데…….’
* * *
커닝의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유럽 영업 분야를 거쳐서 올해 뉴욕 본사에 돌아왔다. 나름 초고속 승진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의 행동이 이전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은 자신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아들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글라스 사업부 책임자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특히 강화 유리 사업부는 딱히 경쟁사도 없는 사업이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이 사업부의 성과를 잘만 활용한다면 2~3년 안에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자신이 아시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를 돌면서 고생한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정신없이 일에 빠진 덕분에 지금 아내 제니와 별거 중이다. 딸 프리실라와는 전화 통화 한 번 하기 힘들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늘 일 중독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결과였다.
데니스 워드는 가족 위기를 직면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전 세계적인 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사업에 더 집중했다.
광케이블 수요가 급증하리라 봤다.
아시아, 유럽 경제가 활황세를 기록하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봤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그 이상 위로 올라가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 유럽에 있었다면 신경을 쓰지 않았을 한 가지 보고를 받았다. 정확히는 참조로 보고된 내용으로 원래는 사업부 내에서 해결할 문제였다.
‘KM 전자라…….’
데니스 부사장은 유럽을 거치기 전에 동아시아 쪽에도 경험이 많아서 이쪽을 제법 잘 알았다. 오성 코닝 쪽에서 2~3년 정도 일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더욱이 그는 최근 한국이 IPS LCD 때문에 온통 시끄럽다는 것도 기사를 통해서 알았다.
밑에 실무진 생각이야 어쨌든 그로서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가 뜻밖에도 KM 전자의 핵심 실세인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알자 이 미팅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고 기술 책임자 (Chief Technical Officer) 제이크 샌더슨을 호출했다.
둘은 실무진을 대신해서 미국 뉴욕주 코닝시 본사에 두 사람을 정식으로 호출했다.
최민혁은 전혀 상상도 못 한 만남이었다.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입니다.”
최민혁도 커닝 본사에 들어와서 안내를 받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설마 부사장과 바로 대면할지는 몰랐다.
“반갑습니다. 전 커닝 부사장 데니스 워드이고, 이쪽은 제이크 샌더슨 최고 기술 책임자입니다.”
“제이크 샌더슨입니다.”
데니스 워드는 피로에 절여 있는 좀비 같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차갑게 빛나는 눈을 보면 또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제이크 샌더슨은 CTO답게 차가운 이성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갑작스러운 최민혁 실장 방문에 고개를 갸웃한 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데니스는 얼음 같은 눈빛으로, 제이크 샌더슨은 강철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
최민혁은 간단한 인사를 하면서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경계하는군.’
처음 있는 일이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시선이기도 했다.
만나기 전부터 예상한 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었다.
IPS LCD 사태가 커지면서 자기 명성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 상황이 커닝 경영진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최민혁 실장의 나이가 두 사람에게 아들뻘임에도 두 사람은 최민혁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윤활유 역할을 하려고 해도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민혁은 시작부터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여기까지 온 이유를 밝혔다.
“커닝 쪽에 강화 유리와 관련된 기술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데니스 워드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제이크 샌더슨은 최민혁 말을 알아들었다.
“켐코 글라스를 말하는 겁니까?”
즉각적인 반응.
이것도 안 좋았다.
“…네.”
켐코 글라스는 알카리-알루미늄 규소 유리로 일반 유리보다는 높은 경도가 있다. 칼륨 이온을 이용한 방식이기 때문에 일반 유리보다는 월등한 강도를 가지고 있다.
주로 레이싱용 차량과 같은 높은 경도를 필요한 영역에서 사용한다.
따라서 그렇게 수요가 많지는 않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조차 최민혁 실장이 켐코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 정보를 알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독특한 강화 유리의 성질을 잘 아는 제이크 샌더슨 박사가 그것을 모를 수가 없다.
최민혁은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 때문에 선뜻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말했다.
“아마 우리 회사가 TV 사업을 한다는 것은 잘 모르실 겁니다. 지금…….”
하지만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민혁 실장님께서는 겸손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콜린스 인기는 우리도 잘 압니다. 거기에 더 나아가서 K투스, IPS LCD에 대한 소식도 듣고 있습니다.”
그는 최민혁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대한 감흥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비즈니스에만 집중했다. 최민혁 실장을 잘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숨기지 않았다.
“흠.”
최민혁은 말을 부드럽지만 차가운 데니스 워드 부사장의 분위기에 혀를 찼다. 그는 상대가 전혀 방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혀를 찼다. 지금쯤이면 자신을 아는 사람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기대한 것과는 너무 달랐다.
그는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켐코 글라스 사업부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오히려 다른 제안을 했다.
“매각 의사는 없습니다. KM 전자에서 원하시면 켐코 공급은 문제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인수 대금이라면 충분히…….”
“아뇨. 인수대금은 상관이 없습니다. 굳이 우리 회사 기술이나 사업부를 매각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회사는 지금까지 ‘파이렉스’, ‘콜렐’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을 계속 개발해 왔습니다. 켐코 역시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기술을 매각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성 커닝을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에 들어간 CRT 경우와는 이야기가 많이 다릅니다.”
“그래도 한번 이야기를…….”
“최 실장님은 원천 기술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그런 제안을 하시다니, 실망스럽습니다. 인수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귀사와 협력은 적극 추진할 생각입니다.”
최민혁은 몇 번이나 적극 나서보았지만, 효과는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마치 철의 장벽이라도 친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가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최민혁은 내심 툴툴거리면서도 두 사람의 대응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켐코 가치를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커닝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기업을 언젠가 만나리라고 생각해 왔었다.
다만 그 시기가 지금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다.
‘난감하네. 결국, 다른 대안을 찾아야겠어.’
물론 최민혁은 결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저렇게 나온다면 다른 대안을 찾으면 그뿐이다.
* * *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친절하게 최민혁 실장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본사 정문까지 내려가서 배웅해 주었다. 그는 KM 전자와 앞으로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데니스 부사장은 최민혁 실장 손을 잡은 채 진심 어린 태도를 보이기는 했다.
다만 사업부 매각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혔다.
겉으로 봐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행동이었다.
다만 제이크 샌더슨 박사는 최민혁 실장이 떠나고 난 후에 커닝 본사 안으로 들어가면서 의아한 눈으로 데니스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딱히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켐코 글라스 사업은 딱히 잘나가는 사업은 아니다. 부가 가치 자체는 높지만, 사업 규모 자체가 크지 않았다. 차라리 매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간혹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올 때 항상 언급되는 사업부 중의 하나가 켐코였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네?”
“제이크 박사 생각에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관심을 보였으니,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