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잘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IPS LCD가 정확히 어떤 기술인지 알리도록 하죠. 언론사에서 다시 전화를 돌리세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멍한 얼굴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아주 가볍게 소송 문제를 처리하는 최민혁 실장 행동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던 것이다.
‘정말 실장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 * *
히타치 공작소는 한국 법원에 소송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 법원, 그리고 미국 법원에 LCD 기술 소송을 걸었다.
LCD 관련 특허권 침해다.
실제로 액정과 관련된 수십 가지 특허가 있었는데, 이걸 기준으로 삼았다.
그들은 특히 미국 버지니아 연방 지방 법원에 KM 전자 미주 법인에 LC 패널 특허 침해, 손해배상, 및 침해 중지 소송을 제기했다.
히타치 공작소에서 특허 침해의 증거로 내세운 것은 그들이 기존에 연구 개발한 자료와 액정 관련 특허를 근거로 내세웠다.
멜코사 액정 특허와 관련이 있어서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KM 전자가 자사 기술을 훔쳤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
대신에 자사 기술을 훔치지 않고서야 지금 일어난 일은 말이 되지 않다고 주장했다.
실상 이 주장은 증거가 없었지만, 전혀 황당한 논리는 아니었다.
IPS LCD 특허는 정말 마른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히타치 공작소가 추가로 KM 전자가 기술을 훔쳤다는 증거나 증인을 확보한다면 충분히 승소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시작은 뜻밖에도 미국의 여러 가지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다.
미국 언론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국 언론사가 즉각 이 기사를 번역해서 기사화했다.
[KM 전자, 미국과 일본에서 IPS LCD 특허권 침해로 피소당하다!]
히타치 공작소와 관련된 이 특허 침해 사건은 한국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었다. 일단 소재 자체가 이슈를 불러일으키게 하기에 차고도 넘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IPS LCD에 대해서 미처 모르는 사람도 이 소송 때문에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저 불구경에 가까운 소재였다면 지금은 히타치 공작소가 소송을 걸 정도로 아주 중요한 미래 기술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와, IPS LCD가 그냥 기술이 아니었구나!]
[IPS LCD 기술은 일본에서도 이미 연구하고 있었구나!]
딱 두 가지 사실이면 충분했다.
KM 그룹 임직원 역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들은 뉴스를 통해서 KM 전자가 갑자기 만든 IPS 기술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K투스에 이어서 연타석 홈런이었다.
물론 KM 그룹 기획조정실의 천경구 과장 생각은 달랐다.
“허위 기사야.”
하지만 박재광 과장은 쓰게 웃었다.
“천 과장님, 이번 일은 그렇게 보기는 힘들 것 같네요. 다른 사람 생각은 다른 것 같으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해? 한국 언론 기사 중에 믿을 만한 것이 얼마나 있어.”
박재광 과장 입장에서 황당한 이야기다. 불과 얼마 전에 나온 한국 언론 기사를 주구장창 언급한 사람이 그이기 때문이다.
“지난 기사에 대한 평과는 다릅니다.”
“제대로 된 기사를 보는 눈이 더 중요해.”
어이가 없는 변명에 박재광 과장은 기가 찼다.
“너무 독단적으로 평가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내 말이 옳아.”
“다른 사람 이야기는 좀 다른 것 같은데요?”
KM 그룹 본사를 오가는 임직원 표정은 다들 흥분을 떨치지 못했다.
[이거 진짜 사실일까?]
[맞겠지. 그리고 최민혁 실장님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연구에 그렇게 무리할 이유가 없잖아. 지난 사건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아니, 그러면 비서실은 왜 그따위로 이상한 소리를 한 것일까?]
[비서실은 최문경 부회장님 측근이잖아. 그러니 최민혁 실장님을 공격한 거지.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내용도 잘 모르고, 최민혁 실장님을 막 씹었던 거야.]
[이거 괜히 내가 민망하네.]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좀 생각을 해보고 비판하라고, 그냥 생각 없이 남의 선동에 놀아났잖아.]
두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KM 그룹 임직원은 다들 민망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을 의심한 것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이 한다고 했을 때 뭔가 눈치를 채야 했다고 자책했다.
[하긴 최민혁 실장님이 아무런 생각이 없이 일을 벌일 리가 없지.]
덕분에 최민혁 실장에 대한 신뢰도는 그 어느 때보다 고공 행진을 했다. 이제는 최민혁 실장이 돈을 금이라고 해도 믿을 눈치였다.
천경구 과장은 다시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헛소리.”
“저 분위기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쟤들 다 생각이 없으니까.”
“그렇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천경구 과장은 빈정거리는 박재광을 째려봤다. 이런 분위기는 기획조정실에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KM 그룹 본사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어수선해졌다.
천경구 과장과 박재광 과장, 두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상황이 곧 달라졌다.
기획조정실이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뒤늦게야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자 수첩을 챙겨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획조정실 회의실은 다른 마케팅, 영업 팀, 홍보 팀원까지 참석했다.
구길모 차장이 곧바로 오늘 회의 안건을 밝혔다. 바로 히타치 공작소가 KM 전자를 특허 침해로 고소한 안건이었다.
하지만 회의실 분위기는 곧 바뀌었다.
곧 이어서 나온 것은 최민혁 실장의 대응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기자 회견을 다시 열어서 지금까지 IPS LCD 개발과 관련된 정보를 공개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김호동 교수였다.
김호동 교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지금까지 진행한 연구 내역을 밝혔다. 그는 심지어 기술 개발 과정에서 날려 먹은 LCD 부산물을 보여주었다.
불타고, 찌그러지고, 심지어 반으로 쪼개진 부산물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들어간 비용마저 밝혔다.
[이 세트 하나에 들어간 비용은 인건비까지 합치면 1억이 넘습니다.]
1억이 넘는 폐기물이 수십 개가 늘려 있었는데, 단순 계산만으로 30억 이상을 그냥 땅바닥에 다 폐기한 것이었다.
“…….”
장승일 실장조차 뉴스 방송을 보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쉽게 개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 정도인지 몰랐다.
심지어 찌그러진 폐기물은 쓰레기 중에서도 거만스러웠다.
[이건 최민혁 실장님이 망치로 박살을 낸 겁니다. 돈 따위는 신경을 쓰지 말라고, 그나마 돌아가는 녀석을 망치로 찍어버린 겁니다.]
기자 회견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파트 한 채 가격의 샘플을 박살을 내다니.
최민혁 실장이 어떤 행동을 한 것인지 보지 않아도 추론이 가능했다.
김호동 교수 연구 팀이 실패한 폐기물에 집착하지 말라고 최민혁 실장이 망치 들고 끼어든 것이다.
그는 마치 토르의 망치처럼 망치를 무지막지하게 휘두른 것이었다.
박재광 과장은 팔꿈치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천경구 과장을 쿡쿡 찔렀다.
‘제 말이 맞지 말입니다.’
‘무슨 소리야!’
‘이번 연구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들 짐작하지 않습니까. 저게 그 증거죠.’
김호동 교수가 마지막으로 기자 회견을 마무리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히타치 공작소가 황당한 이유로 우리를 고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연구소는 그 어떤 이유로든 히타치 공작소 기술을 도둑질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설마 이걸 보고도 우리가 히타치 공작소 LCD 특허 기술을 베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지막으로 나선 문형섭 부사장(?)은 힐끗 전시된 폐기물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이 자리에 오고서야 IPS LCD가 어떻게 개발되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넋을 잃고 있는 기자들에게 슬쩍 한마디만 남겼다.
[황당한 이유로 우리를 고소한 히타치 공작소에 대해서는 그만한 책임을 묻겠습니다!]
법적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장승일 실장은 힐끗 기획조정실 회의실에 모인 이들을 쳐다보았다. 그가 굳이 이들을 불러 모은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다들 잘 알겠지만, IPS LCD는 그저 차세대 패널이 아니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차세대 패널입니다. 최민혁 실장님은 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분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제대로 알지도 못한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좋네요. 시작하죠.”
곧 이어진 미팅은 IPS LCD가 가지는 기술 가치와 이를 KM 그룹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쟁이었다.
박재광 과장은 천경구 과장을 계속 놀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우리 최 실장님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 난리를 피워놓고도 보이지 않다니…….”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 역시 그제야 눈을 끔뻑거렸다. 기자 회견장에도 최민혁 실장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승일 실장 역시 지방 방송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공감했다.
‘가만 실장님은 어디로 간 거지?’
* * *
국제 특허 소송에 관한 이야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특허 소송에서 진 기업은 막대한 로열티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기업은 특허 획득을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거듭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일반인과는 먼 이야기였다.
대다수 핵심 특허는 외국 기업이 다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IPS LCD 특허 분쟁이 나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뒤늦게야 IPS LCD 특허를 개발하는 곳이 히타치 공작소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왜 KM 전자가 무리수를 둬가면서 70억이라는 막대한 돈을 퍼붓는지도 알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승자는 히타치 공작소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민혁의 무모한 행보는 오히려 다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언론과 뉴스가 온통 최민혁 실장 예찬가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국내 그 어디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행보를 감추기 위해서 우선 배로 중국, 일본을 경유해서 미국 뉴욕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스테이크로 유명한 피터루거 스테이크 하우스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최민혁을 뒤따른 조성돈 팀장은 힐끗 자기 앞에 나온 맛깔스러운 스테이크를 쳐다보면서 툴툴거렸다.
“지금 IPS LCD 양산이 더 급한 일 아닙니까?”
최민혁은 정신없이 오가는 뉴욕커를 보면서 스테이크 맛을 즐겼다.
“좋네요. 먹어보세요.”
조성돈 팀장은 어쩔 수 없이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확실히 맛은 좋았다. 입에 착 감기는 그 맛은 한국에서는 맛보기 힘들었다.
최민혁은 인생 1회차에서 미국 뉴욕커 삶을 한 때는 동경했다. 이렇게 스테이크 맛집에서 여유를 느껴 보는 것이 바람이었다.
지금은 그저 삶의 일부였지만 인생 1회차에서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LC 전자에 대해서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정 안되면 오성 전자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방법이 없으면 HY 전자와 손잡아도 됩니다.”
“하지만 실장님이 LC 전자를 후보로 생각한 것은 기술력 때문 아닙니까?”
“그건 인정해야죠.”
확실히 LC 전자가 품질 관리 능력이 탁월한 것은 사실이다. HY 전자 보다는 한 수 위였다. 어떻게 보면 오성 전자보다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오성 전자가 제대로 투자를 진행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였다.
최민혁은 그런 자잘한 문제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것은 우리 지시에 따라주는 하청업체입니다. 그러니 그게 더 중요합니다. 아직 시간은 여유가 있어요.”
조성돈 팀장이 머뭇거렸다. 그 역시 최민혁 행보가 가끔 황당하기는 했지만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묵묵히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그걸 말하지 않아서 지켜보기만 했다.
“…도대체 뭘 목표로 하신 겁니까?”
“다 알면 재미가 있습니까? 조 팀장님도 한번 고민을 해보세요.”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K투스는 그렇다고 해도 IPS LCD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양산에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수천억이 기본으로… 수조가 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 회사가 잘나가도…….”
그는 정확히는 차세대 패널 개발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 지시에 따라서 일을 진행하고, 결과를 내놓기는 했지만 아직도 영문을 잘 몰랐다.
최민혁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저런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전 LCD 양산을 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