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70화 (370/1,021)

#370.

다행히 그때 끼어든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장준석이었다.

장준석은 한껏 꽃단장을 한 채 공항에 도착해서 본 것이 바로 애교를 한껏 떨고 있는 안지연과, 시큰둥한 반응의 최민혁이었다.

누가 봐도 딱 연인 사이 같았다.

질투 때문에 장준석은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지금까지 안지연에 자기 인생을 몰빵했다. 그녀를 위해서 어학연수까지 가는 등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정작 지금에 와서야 그녀의 유학 이야기는 없던 것이 되었다.

알고 보니 그게 정략결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최민혁 때문에 안재운의 일본 유학이 스톱된 이후에 안지연의 유학 역시 없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지, 지연아…….”

안지연은 움찔했지만 내심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두 사람의 관계 설정을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아, 이분은 최민혁 씨야.”

‘집에서 만나라고 한 남자야.’란 말까지는 잔인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녀도 이게 잘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장준석과 이전처럼 지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준석은 자신이 소개를 받으면서 묘한 분위기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안지연의 정체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굳이 미국 유학을 사전에 준비한 것도 따지고 보면 안지연이 앞으로 유학 갈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정도로 어학에 투자를 많이 했다.

그는 당장 최민혁에게 분노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 때문에 아니라 안지연이 이상한 눈으로 볼까 염려했다.

그런데 막상 남자 얼굴을 보자 곧 한 사람을 떠올렸다.

‘최민혁 실장?’

요즘 핫한 KM 전자를 이끌어가는 최민혁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취업 때문에 살피는 기업 중의 하나가 KM 전자였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요리조리 살피다가 뒤늦게야 점점 차가워지는 장준석 눈빛을 보자 상황을 눈치챘다.

‘아, 저 친구가 안지연 씨 연인이구나. 하, 가만 이거 삼각관계야?’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장준석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안지연의 솜씨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장준석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최민혁에게 질투심을 이용해서 관심을 받기를 원한 것이다.

‘완전 재벌가 막장 드라마 찍네.’

최민혁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준석과 관련된 인생 1회차 사실을 떠올렸다. 장준석과의 관계 때문에 안지연은 계속 고통을 받다가 결국 자살했기 때문이다.

최민혁도 그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지금까지의 안지연 성격을 토대로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흠, 이걸 어쩐다.’

차라리 두 사람의 미래가 행복한 결말이었다면 여기서 깔끔하게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인연은 악연이었다.

최민혁은 쓰게 웃었다. 그는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받았다. 남녀 세 사람이 서로 있는 모습을 보자 상황을 짐작한 이도 있었다. 삼각관계는 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아, 나도 한때는 저랬는데 하며 옆사람과 속삭이는 이도 있었다.

“지연 씨, 혹시 안 회장님은 요즘 어때요?”

“아, 아버지요? 늘 그렇죠.”

“제 이야기는 안 하던가요?”

“오빠가 식사할 때면 늘 민혁 씨 이야기를 해요. 아빠는 그냥 듣기만 하죠.”

딱 이 정도면 충분했다.

두 사람 관계는 이미 집안 내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언론에서 주기적으로 나오는 정략결혼설이 가짜 뉴스가 아닌 셈이다.

장준석은 순간 부들부들 떨었지만, 곧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오히려 정중하게 나왔다.

“민혁 씨를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가끔 뉴스에서 민혁 씨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호, 그런가요?”

“이번에 출시한 KMP-01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한국대에서도 요즘은 KM 전자에 입사하려는 친구들이 많으니까요.”

“그건 뜻밖이군요.”

최민혁은 곧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장준석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었다. MP3 원천 기술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KM 전자에 대한 평판이 완전히 달라졌다.

대한미국이 망하는 날이 있어도 KM 전자가 무너지는 날은 없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왔다.

최민혁은 장준석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그의 성향을 뒤늦게 알아챘다. 왜 장준석이 안지연에게 매달리는지 알 것 같았다.

‘역시 재산일까? 하면 안지연이 시간이 지나서 그 마음을 안다면 꽤 충격을 받겠어.’

그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더 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과 가볍게 작별했다.

물론 돌아서는 두 사람 분위기가 아주 달라지는 것도 확인했다.

장준석은 심각한 얼굴로 안지연에게 계속 질문했고, 안지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장준석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바위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딱 벼랑 끝으로 몰린 남녀 사이였다.

대체로 저 순간을 지나면, 남녀 관계가 끝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 * *

김명준 과장은 어지간해서는 최민혁 개인 생활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그는 비행기 안에 들어와서 좌석에 착석하기 무섭게 질문했다.

“어쩔 생각입니까?”

“뭘 말입니까?”

“안지연 씨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안지연 씨 사생활이 엉망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그 남자 말입니까?”

“그 친구가 노리는 것은 안지연 씨가 아니라 안지연 씨 재산일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척 보면 느낌이 오죠.”

말도 안 되는 최민혁의 말에도 김명준 과장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의 놀라운 통찰력에 계속 놀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한국대 경제학과 출신이면 꽤 괜찮지 않습니까?”

“한국대 나오면 다 괜찮은가 보네요. 전 한국대 휴학생인데요?”

“아, 그거야…….”

“유명 대학 나온다고 해서 다 괜찮은 인재가 되는 건 아닙니다. 당장 이번에 입사한 321명 신입 사원 성과를 한번 살펴보세요. 결과만 놓고 보면 학벌이 그렇게 중요한 판단 지표는 아니니까.”

“아니, 제 말은 두 사람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 같은데…….”

최민혁은 스튜어디스가 가져온 주스를 홀짝이면서 툴툴거렸다.

“아, 제가 두 사람 사이를 훼방 놓은 것 같나 보군요.”

“네. 실장님께서 안지연 씨에게 마음이 있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늘 마음에 둔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불행한 미래가 뻔히 보이는 안지연 씨를 그냥 둘 수는 없죠. 정략결혼설을 이용한 것도 있으니, AS는 해줘야죠.”

“…확실한 겁니까?”

“김 과장님도 사람 보는 안목이 많이 퇴보한 것 같아요. 장준석이 절 보자마자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는 모습을 봤어야 했어요. 그리고 저랑 이야기할 때는 또 다른 사람처럼 변했더군요. 완전히 카멜레온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최민혁은 인생 1회차에서 안지연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기에 장준석의 성향을 어느 정도 추론했을 뿐이다. 그 정보를 토대로 장준석 표정을 살폈으니, 그 미세한 변화를 잡아낸 것이다.

“…….”

김명준 과장은 뒤늦게 장준석의 행동을 한번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최민혁 실장 말을 듣고서야 탄식하고 말았다.

“제가 왜 굳이 정략결혼식 멘트를 흘렸는지 이제는 아시겠어요?”

“…하지만 그 친구가 쉽게 포기할까요?”

“당장은 포기하지 않겠죠. 하지만 이전처럼 안지연에게 쉽게 다가가지는 못할 겁니다. 최소한 제 프로필을 확인한 후에는 눈치를 보겠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칭찬으로 듣죠.”

김명준 과장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눈을 감은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고작 그 짧은 만남 속에서 최민혁이 한 판단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놀라웠기 때문이다.

‘정말 놀랍구나.’

* * *

ARN이 발전하는 과정은 생각보다는 여러 요인이 관련되어 있다.

최민혁 자신이 끼어들었다가 ARN 사업을 근간부터 흔들 수가 있다.

‘그건 곤란해.’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은 ARN 사업이 가속화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지분 인수도 그런 점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야 한다.

따라서 조인트 벤처의 세 주주가 전부 다 손을 떼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일부 지분만 가지고 있도록 계약을 만드는 것이 좋아. 어느 정도 지분 인수에 대한 설명도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한 이익도 창출되어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지분 매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계약이 쉬운 쪽부터 해결해야겠지. 역시 시작은 VLSI가 좋겠어.’

* * *

VLSI 테크놀러지는 커스텀 IC를 설계하고, 제조하는 회사다. 회사는 실리콘 밸리에 있으며, ASIC 비즈니스를 선도한 기업이었다.

특히 VLSI 설계 툴은 입력, 시뮬레이션, 라우팅, 컴파일러를 다 포함했다. 일테면 IC 설계 통합 솔루션인 셈이다.

하지만 VLSI도 요즘은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인텔이 2년 동안 유지해 온 반도체 공동개발 계약을 끝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인텔은 이미 VLSI 지분을 다 정리했다.

VLSI가 인텔과의 불화가 생긴 것은 VLSI가 표준 칩을 생산하면서 인텔과 경쟁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텔은 경쟁사가 될 VLSI를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냉큼 정리해 버렸다.

쉽게 말해서 대기업이 이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기업을 밟아버린 것이었다.

이런 일은 VLSI에게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생긴 일은 뉴턴 메시지 패드가 쫄딱 망한 일이다.

이 일을 야심 차게 준비한 전 에플 CEO인 스컬리 사장은 이 실패 때문에 에플에서 2년 전에 쫓겨났다.

정작 현재 에플 CEO는 마케팅 천재로 알려진 마이클이다.

그는 2년 전에 에플 CEO가 된 이후부터 지금도 에플 구조조정을 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 대상 중에 하나가 바로 뉴턴 메시지 패드다.

최민혁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에플을 수렁으로 만들어놓은 뉴턴 메시지 패드를 샀다.

스타일러스 팬을 사용해서 흑백 스크린에 입력할 수 있었다.

심지어 PC와 윈도우와 통신이 된다.

비즈니스 입장에서는 꽤 유용한 기구다.

하지만 판매량은 처참했다.

웃기는 것은 이 기기에 사용된 메모리가 고작 4MB에 불과했다. 외부 메모리 인터페이스가 있다고 하지만 당장 64MB가 기본 모델인 KMP-01과는 메모리 용량 경쟁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뉴턴 메시지 패드는 흑역사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인생 1회차 기억을 떠올리면서 새삼스러운 눈으로 메시지패드를 살폈다. PDA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다.

‘만들기는 잘 만들었는데, 역시 TN 패널의 한계가 눈에 훤히 보이네. 이것으로는 반응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지.’

펜과 터치 사이의 반응은 빠르게 넘길 때면 쭉쭉 밀려 버린다.

반사적으로 사용하는 사용자로서 이 점은 꽤 불편해 보였다.

거기에 ARN610 성능이 쥐약이다.

이 물건은 장난감이 아니라 비즈니스맨이 사용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메시지 패드를 활용할 다른 수단도 보이지 않았다.

최민혁은 느린 ARN6 20MHz의 한계를 사용하면서 절실히 느꼈다. 기기 자체가 너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다만 MP3 플레이어용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건 다르게 말해서 KMP-01 차세대 모델로 이 CPU를 선택해도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이 기기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 ARN IP를 사용해서 얼마든지 다른 응용 IP를 붙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표준이 정립되지 않은 블루투스가 좋은 예였다.

생각보다는 꽤 괜찮은 아이템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아직 블루투스 표준이 확정되지 않았어. 그건 몇 년 후의 일이니까. 이것도 한번은 고민할 필요가 있어. 전체 표준을 확립하기에는 무리지만 이 기기에 적용될 수준만큼은 가능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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