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71화 (371/1,021)

#371.

최민혁은 직접 뉴턴 메시지 패드를 만지면서 연상되는 인생 1회차 기억을 떠올리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제품을 본 덕분에 차세대 MP3에 대한 방향성을 어느 정도 구상할 수가 있었다.

김명준 과장은 갑작스러운 최민혁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도저히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건 뭡니까?”

“세계 최초의 PDA입니다. 전 에플 CEO인 스컬리 사장이 대차게 말아먹은 작품이죠.”

“아니, 이미 망한 제품을 왜 굳이 사들여서 살피는 겁니까?”

“제품은 망했지만, 그 DNA는 나쁘지 않아요. 주변 인프라 기술을 망각했죠. 에플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오만이 저지른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면 이와 유사한 제품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직은 이런 제품 개발은 무리에요.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터치 반응 속도니까. 흑백 TN 패널로는 한계가 분명해요.”

미국 공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최민혁이 한 행동을 떠올린 김명준 과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유심히 살피는 겁니까?”

“이 기기가 망했다고, 이 기기가 보여준 미래 모바일 가치마저 형편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바일의 미래를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에플 개발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렇죠. 이 기기에 사용된 방식은 우리 MP3 플레이어에 같이 적용됩니다. 우린 지금 이 시점에 맞는 현실적인 기술만을 이용하면 됩니다.”

“…….”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이 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확신을 한 최민혁의 말투는 결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의 뜨거운 시선을 받은 채로 아직 미국 벨린 소프트 실리콘 밸리 지사에 있던 정성근 대리를 만나서 VLSI 쪽과 미팅 약속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 * *

VLSI 마크 듀켄 이사(Vice President)는 요즘 머리가 쑥쑥 빠져나가는 고통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주치의를 만나보면 일을 자제하라는 충고뿐이다.

그런데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전 에플 CEO인 스컬리가 도망간 후의 비난은 자신이 다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야심 차게 준비한 메시지 패드의 실패 때문에 에플의 미래는 암울했다.

덕분에 요즘 에플 주가는 고작 80센트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주가도 나은 편이다.

27센트를 한 번 찍고 나서 다시 80센트로 올랐으니까.

하지만 에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러니 이 패드에 들어간 ARN이 팔릴 리가 없다.

ARN 재고는 계속 쌓여만 가는데, 상황이 좋을 리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ARN에 대한 투자다.

메시지 패드가 완전히 망하면서 ARN을 바라보는 이사회 시선은 차가웠다.

에플 이사진은 차라리 ARN 지분을 이번 기회에 매각해서 현금을 마련하자고 했다.

그나마 아콘 측이 나서서 에플 이사회를 설득했다. 좀 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말짱 다 개소리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VLSI은 막장극을 벌이는 두 회사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인내도 어느 정도 미래가 보여야 가능한데,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듀캔 이사 역시 이 문제 때문에 툭하면 이사회에서 이 안건을 박살냈다. 그는 중도파로 딱히 지분을 매각하자는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VLSI 내부 분위기도 서서히 ARN을 손절매 하자는 분위기다.

[듀켄 이사, 안 그래도 심각한 손실이 더 심각해지면,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제가 모든 것을 다 책임지겠습니다.]

[글쎄, 듀켄 이사가 책임질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당신 의견은 잘 알았습니다.]

그도 자존심 때문에 큰소리쳤지만 지나고 나면 후회했다. 자신은 중도 노선을 걷고 있는데, 반뉴턴 쪽에 당한 것을 깨달았다.

뉴턴 메시지 패드가 너무 처참하게 망해서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기간에 어떤 형태로든지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플 이 미친놈들은 아직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있어. 아니, 구조조정을 할 거면, 뉴턴 같은 쓰레기 프로젝트부터 치워야 할 것 아냐!’

에플의 희망 고문.

VLSI 입장에서는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KM 전자라는 특이한 회사에서 연락을 받은 시기가 딱 이 무렵이었다.

그는 처음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상한 업체가 또 장난 전화를 했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회사란 이야기에 더 듣지는 않았다.

과거 한국의 오성 전자와 LC 전자 쪽과 몇 번 협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예 일방적인 두 회사 태도에 질리고 나서는 한국 기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특히 탐욕과 욕망이 어찌나 지독한지 상종조차 하기 싫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두 회사 태도에 혐오감마저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브런 스미스 부장(Senior Director)이 KM 전자를 조사한 내용을 가지고 직접 찾아왔다.

“KM 전자는 다른 한국 회사와는 달리 그렇게 가볍게 볼 업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콜린스를 개발한 업체니까요.”

“콜린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일전 데니스 이사님 파티에서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 평면 TV? 가만 그거 소니가 만든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소니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들어보니, 소니도 콜린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KM 전자가 월마트 측과 협상이 진척되면서 상황이 심각한 것으로 압니다.”

월마트와 콜린스 계약 문제는 워싱턴에 본사를 둔 기업 사이에서는 파다했다. 마크로 밀러 이사가 동네방네 떠들면서 KM 전자를 씹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만 해도 KM 전자의 이미지는 좋지가 않았다.

하지만 콜린스 판매가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다들 쉬쉬했다.

그들도 마크로 밀러 이사가 왜 미친 짓을 하는지 뒤늦게 안 것이다.

“아, 맞아,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가만 그러면 콜린스를 만든 업체가 KM 전자야?”

“네. 여기 연락을 해온 친구가 KM 전자 기획 팀에 소속된 것으로 압니다. 아마 비즈니스 문제로 전화한 것 같습니다. 한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듀켄 이사는 똥 덩어리 뉴턴 메시지 패드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이런 시국에 KM 전자와 미팅을 할 이유가 없었다.

“글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 회사는 TV와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잖아.”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고성능 TV라면 안에 칩을 넣을 수 있으니까요. 아, KMP-01이라면 연결 고리가 됩니다.”

“KMP-01? 그게 뭔데?”

“MP3 플레이어라는 물건인데, MP3를 내려받아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모바일 기기입니다.”

“그런 제품도 있어?”

마크 듀켄 이사는 영문을 몰라서 눈만 끔뻑였다. 그나마 브런 스미스 부장은 IT 기기에 관심이 많아서 아는 지인 통해서 구입한 KMP-01을 내놓았다.

“최근 한국에 관광 간 친구 통해서 어렵게 구한 물건입니다. 한번 살펴보세요.”

“이건… 놀랍네.”

마크 듀켄 이사는 깜짝 놀랐다. 그는 역시 IT 업계 전문가답게 KMP-01의 가치를 금방 알아봤다. 다만 딱 거기까지다. 이 정도 기기를 만들 회사는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다.

브런 스미스 부장이 추가로 자료를 내놓았다. 바로 MP3 원천 기술 라이센스에 대한 자료였다.

마크 듀켄 이사는 라이센스 목차를 확인하고 나서는 화들짝 놀랐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당장 톰슨 멀티미디어가 가진 특허가…….”

“그 특허도 KM 전자가 다 인수했습니다.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MP3 원천 기술 관련 핵심 특허는 전부 다 이 KM 전자에서 몽땅 샀습니다.”

“…….”

마크 듀켄 이사는 그제야 바위처럼 굳은 얼굴을 한 채 자료를 살폈다. 그로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아니,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왜 이제야 알았는지 의아했다.

“…장난 아니지? 아니, 이런 일이 있었는데, 왜 지금에서야 안 거야?”

“MP3용 모바일기기에 관심을 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KMP-01은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인 셈입니다. 그러니 이사님이 들어본 적이 없는 거죠.”

“이건 정말 놀랍네.”

마크 듀켄 이사는 KMP-01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보고서를 샅샅이 살폈다. 심지어 KMP-01 분해도 안에 첨부된 사진도 같이 확인했다. 탄성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건 꼭 비즈니스 문제만이 아니다. 상대를 만나서 한번 이야기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으음, 알겠네. 한번 일정을 잡아봐.”

“알겠습니다.”

* * *

강준석 대리는 정성근 대리가 갑자기 최민혁 실장을 데려오자 깜짝 놀랐다. 그도 정성근 대리에게 듣기는 했지만, 갑자기 최민혁 실장이 다시 이곳을 찾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최민혁은 정성근 대리를 통한 미팅 일정만 확인했다. 잠깐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줘야 하나 고민했다.

“으음, 이번 협상을 옆에서 잘 지켜보세요.”

“네.”

정성근 대리는 이미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지켜봐 최민혁의 성정을 잘 아는 터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강준석 대리는 영문을 몰라서 눈만 끔뻑거렸다. 그는 여전히 호기심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다만 이제 정성근 대리를 통해서 회사 생활을 제법 익힌 터라 이전처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궁금한 점이 많을 겁니다. 일단 지켜보기만 해요. 그것만으로도 얻는 것이 제법 있을 테니까. 스스로 얻는 것이 없다면 앞으로의 성장도 어렵습니다.”

“알겠습니다.”

정성근 대리는 그런 강준석 대리와는 달리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VLSI 쪽과 협의해서 미팅 일정을 잡겠습니다.”

“그래요.”

* * *

최민혁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마크 듀켄 이사를 만나서 기분이 좋았다. 인생 1회차였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사업 계약 문제라고 해도 이들은 한국 사업가를 잘 만나지 않았다.

애초에 바라보는 시야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잘못된 선입견도 있다.

과거 한국 대기업이 이들 실리콘 밸리와 협상을 진행했는데, 성과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기업 문화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 기업은 한국 대기업에 편견을 가진 터라 이야기가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크 듀켄 이사는 KM 전자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는 최민혁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특히 어떻게 MP3 원천 기술권자에게서 특허를 매입할 수 있었는지 그 부분에 주목했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 그들이 쉽게 특허를 넘겼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민혁은 굳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저 넌지시 서로 비전이 맞았기 때문이라는 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갔다.

냉정한 사업가 마크 듀켄 이사는 쉽게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다.

“…말이 많으시네요.”

“네?”

“실리콘 밸리 기업이 남의 기술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두는 것 같아서요.”

마크 듀켄 이사는 무안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는 최민혁의 나이를 알고 나서 얕잡아 봤다. 그런데 매몰차게 저렇게 나올 줄 몰랐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제가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얕잡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는 협상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겁니다.”

“…네.”

최민혁은 그제야 자신이 이 자리에 온 용건을 슬그머니 밝혔다.

“ARN 610말입니다.”

“ARN 610이라면, 설마 에플 뉴튼에 들어간 그 칩을 말하는 겁니까?”

“네, 그 칩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차세대 MP3 플레이어에 그 칩을 선택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흠.”

마크 듀켄은 깜짝 놀랐다. 그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로서는 예상도 못 한 제안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KMP-01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이라고 최근 팔린 수량이었다.

‘2주 만에 20만 대가 팔렸다고 했던가.’

“정확한 판매 수량이 어떻게 됩니까?”

“초도 물량은 20만 대가 팔렸고, 예약 물량까지 합치면 누적 물량은 50만 대 정도 됩니다. 부품 수급 때문에 다음 달 초면 고객 손에 들어갈 겁니다.”

“…물량이 제법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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