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
KM 전자 사장실은 훈훈한 분위기였다.
특히 문형섭 부사장은 마치 잔칫상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KMP-01의 초대박 덕분에 수혜를 입은 것이다.
특히 바로 KMP-01에 들어가는 스피커. 이 미니 스피커는 오디오 사업부가 최민혁 실장의 조언을 받아서 심혈을 기울인 제품이었다.
작은 것 같아도 예약 물량까지 포함하면 누적 물량이 벌써 50만 대를 넘어가면서 그 수익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그 덕분에 이 미니 스피커를 찾는 업체가 대폭 늘어났다.
핸드폰 업체에서도 KM 전자 스피커의 품질을 어느 정도 인정해서 주문이 늘어난 것이다.
단순히 KMP-01 물량이 문제가 아니라 이와 유사한 모바일 기기나 아니면 소형기기 업체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전 최 실장이 소형 스피커 시장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할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경험해 보니, 이야기가 많이 다릅니다.”
오디오 사업부는 이 소형 스피커 덕분에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안 그래도 오디오 사업부 역시 매출이 정체되는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문형섭 부사장은 최민혁 실장 용비어천가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문 부사장이 최 실장 제안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일세. 그 부분은 누가 뭐래도 문 부사장 공이네.”
오영근 사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나날이 늘어가는 KM 전자 매출에 신바람이 났다. 이제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해야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추세를 보면 한 몇 년은 KM 전자 사장 자리에 앉아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최민혁 실장도 그걸 원하는 눈치다.
비록 오영근 사장이 혁신적인 사업에 대한 안목은 부족해도 융통성과 사내 단결 능력만큼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까칠한 최민혁 성격 때문에 두려워하던 KM 전자 임직원도 오영근 사장 덕분에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바로 굿 캅, 배드 캅 역할극이었다.
이에 따른 성과는 회사 매출에서 나타났다. KM 전자 매출이 사상 최대를 넘어서 역대급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안색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KM 전자의 매출액 전체를 차지하는 콜린스 때문이다.
문형섭 부사장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정말 월마트 쪽에서 50만 대 계약 협상과 관련해서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습니까. 우리가 요구한 것을 다 들어주는 겁니까?”
“맞아. 하지만 여전히 몇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어. 그중에 하나가 납품 단가니까.”
KM 전자 콜린스 납품 단가는 계약 물량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월마트 쪽에서는 50만 대 계약이니, 거기에 맞게 10% 마진을 더 보장해 달라고 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작은 것 같지만, 무려 2천억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숫자 1만 바뀌어도 천억 단위 차이가 난다.
협상이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군요.”
“그런데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로는 다른 업체는 이보다 더 크다고 주장하고 있어. 자신들의 영업권도 있으니, 그런 점을 보장해 달라는 거지. 그리고 무리한 요구는 아니네.”
“하지만 최 실장은 절대로 수긍 안 할 계약이군요.”
“그렇지. 최 실장은 원칙에 변화는 없다고 못을 박았으니까.”
“그것 참.”
두 사람 다 답답한 최민혁의 정책에 혀를 내둘렀다. 고작 20살이라는 나이치고는 너무 꼰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완고했다.
하지만 뭐라고 태클 걸기에는 그랬다.
지금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은 월마트와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콜린스 50만 대 물량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최민혁 실장의 오연한 자세.
과거에는 걱정스럽기만 했지만, 지금은 또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아이러니한 점은 KM 전자 매출과는 별개로 순이익 사상 최고를 쳤다는 점이다.
누적 판매 50만 대의 순이익이 무려 10%를 넘어섰다.
한국 제조업의 순이익 평균이 고작 2~3%라는 것을 고려하면 믿기 어려운 수치다. 따지고 보면 거래 업체를 쥐어짜서 얻은 이익이었다.
월마트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월마트가 계속 꼬리를 내리고 내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점이다.
오영근 사장은 다른 한 가지도 걱정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회사 매출이 콜린스에 너무 쏠린다는 점이네. 오디오 사업부만 해도 이제 겨우 2천억을 넘어섰어. 그 10배나 되는 매출이 콜린스에서 나와. 지금이야 괜찮지만, 차세대 콜린스가 걱정이네.”
문형섭 부사장 안색도 좋지가 않았다. 그 역시 최근 KM 전자 조정 기간에 나온 증권가 리포터를 꽤 많이 확인했다.
다들 걱정하는 것은 콜린스 차세대 모델이 과연 콜린스만 한 성과를 보일까 하는 점이다. 거기에 KMP-01의 매출 성장세는 어디까지 갈까 하는 점도 있다.
MP3 원천 기술로 인한 특허료 이익도 빼놓기는 어렵지만 설사 그것을 다 더한다고 해도 매년 늘어나는 이익은 한계가 있었다.
거기에 오성 전자의 PDP TV도 문제다. 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성 전자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멈추지 않았다.
콜린스를 견제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성과는 있었다.
LCD 전자 역시 가전 계열사를 총동원해서 떨이 형태로 마케팅을 진행 중이다. 이게 의외로 꽤 큰 효과가 있었다.
“…역시 디지털 TV 때문입니까?”
“PDP 성장세가 심상치 않고, LC 전자, 대운 전자, 오성 전자가 이 사업에 퍼붓는 돈이 5-6천억은 가볍게 넘어가.”
실제로 오성 전자, LC 전자, 대운 전자는 콜린스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도 디지털 TV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결과도 나왔다.
다만 아직은 근원적인 한계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이다.
적어도 1년 정도가 지나면 시장 상황이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콜린스가 가지는 강점 때문에 바로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매출 둔화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KM 전자 단기 리포트는 좋아도, KM 전자 장기 리포트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꽤 있다.
KM 전자가 어려워진다기보다는 성장세가 둔화된다는 것이 정확하다.
“더 큰 문제는 지방 기업의 부도율이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는 거야. 그러니 과도한 투자를 진행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골치 아프네요.”
두 사람 다 KM 전자 상황을 수습할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접니다!”
다만 두 사람은 갑자기 사장실에 들어온 최민혁 때문에 깜짝 놀랐다.
“어, 최 실장 아닌가?”
“깜짝이야. 미리 노크 좀 하게!”
* * *
최민혁은 두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바쁜 사람이다. 두 사람이랑 노가리 깔 시간이 없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마스터 카드 사태는 아시죠?”
오영근 사장은 과거와는 달리 별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언론이 너무 과장해서 호들갑을 떠는 것 같은데,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냐.”
“흠.”
최민혁은 오영근 사장이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자신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오영근 사장 통해서 쉽게 깨달았다.
“그렇다면 굳이 그 부분은 언급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장님을 찾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국에 잠깐 갔다 와야겠습니다.”
“미국? 혹시 콜린스 계약 때문인가?”
“아, 그거야 계약하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입니다. 매출이 줄기는 하겠지만 상관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왜?”
최민혁은 평소와는 달리 집요하게 달라붙는 두 사람의 시선에 결국 자리에 앉았다. 그는 한선화 비서가 알아서 가져다준 커피를 홀짝이면서 눈인사까지 했다.
한선화 비서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물러났다.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보자 문형섭 부사장이 툴툴거렸다.
“설마 두 사람이…….”
“아닙니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만나는 그 안지연 씨 말인가?”
“후유, 그쪽은 그저 일시적으로 만나는 것에 불과…….”
그는 힐끗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상대가 안지연이라는 것을 알자 즉시 무음으로 바꾼 후에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따가운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한 채 툴툴거렸다.
“정략결혼설 따위는 너무 믿지 마세요. 필요 때문에 작업을 한 것에 불과하니까. 덕분에 오성 전자도 낸드 메모리를 잘 내놓지 않습니까? 어제 수작을 부릴 때 제가 전화해서 한마디 하니, 즉각 재고 물량도 보내더군요.”
실은 권태성 기획실장이 심술이나 한번 부려 보려고 했다가 최민혁에게 단단히 욕만 먹고 말았다. 본인 딴에는 실무진에서 사고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급하게 낸드 메모리를 양산한 덕분에 불량이 제법 나왔다. 하지만 워낙에 작은 물량이라서 바로 교환해 주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따라서 이건 문제도 아니었다.
오영근 사장은 이전과는 달리 흥미로운 눈빛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는 문형섭 부사장과 시선을 마주한 후에 바로 질문했다.
“…혹시 차세대 MP3 플레이어 때문인가?”
“맞습니다. 왜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 다들 난리더군요. 콜린스 초대박이 결코 일어나기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 회사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갑자기 매출이 3조 원 가까이 늘었다가 1조 원으로 줄면 입방아를 찍어댈 거야. KM 전자는 역시 망하는 회사라는 식으로 몰고 가겠지.”
“아, 생각해 보니, 우리 부회장님이라면 언론에 압력을 넣어서 그런 상황을 만들고도 남겠습니다.”
“다른 대기업도 다르지 않을 거야. KMP-01 때문에 배가 아픈 곳이 많으니까.”
최민혁도 까칠해진 오영근 사장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늘 사람 좋은 모습만 보이던 오영근 사장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영근 사장도 지금 상황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나도 더 욕심을 내기는 싫지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 회장님도 나만 보면 그런 점을 계속 언급하고 있으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잘되었네요. 사실 그런 문제도 있어요. 콜린스 초대박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대박 소리를 들을 만큼의 성과를 또 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새로운 기반 기술이 좀 필요해서 미국 업체 몇 곳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문형섭 부사장은 과거 MP3 개발 이전에 최민혁이 유럽을 돌아다녔던 기억을 떠올렸다.
“혹시 어떤 업체인지 알 수가 있을까?”
최민혁도 완전히 정보를 감추지 않았다.
“저전력 CPU 개발업체입니다.”
“저전력 CPU?"
“지금 KMP-01에 채용된 CPU 코어는 8051을 사용했습니다. 범용적인 면에서는 괜찮지만, 성능 면에서는 한계가 있어요.”
“하면 좀 더 고성능 CPU를 채택하겠다는 말 같은데, 그런 CPU라면, DSP를 말하는 건가?”
“아뇨. DSP의 가장 큰 문제는 파워 소모입니다. 그것으로는 답 안 나옵니다. 물론 저전력 CPU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좀 걸려요.”
“그러면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
최민혁은 이 부분에서 슬쩍 보안이라는 이유로 말을 돌렸다.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보안 문제 때문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은 KM 전자가 잘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끌어내리려고 할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최민혁은 LC 전자 쪽을 통해서 들은 정보를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입을 딱 벌렸다. 최문경 부회장이 최민혁을 싫어하는 것을 알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이 LC 전자를 직접 찾아가서 이간질할지는 몰랐다.
“제가 대운 전자와 같은 다른 업체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겠죠. 그러니 두 분도 궁금하겠지만 입을 좀 다물고 계세요. 어차피 이번 협상은 벨린 투자를 통해서 진행할 것이니까.”
오영근 사장이 발끈했다.
“최 실장, 그건 아닌 것 같아. 우리 회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오영근 사장, 문형섭 부사장이 하는 행동을 봐서는 자신을 단단히 믿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렇게 의심 많은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확실히 많이 달라졌어.’
그렇지 않아도 ARN과 관련해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이 업체는 기존 판매 방식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 KM 전자가 지분을 일부라도 인수하게 되면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지만 차라리 벨린 투자를 통해서 진행하는 것이 났습니다. 그러면 KM 전자로 인한 부작용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