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의 제안을 잠깐 고민했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KMP-01 관련된 정보는 외부에 알려져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왕이면 장승일 실장 라인이 깔끔하면 좋다.
천경구 과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은 최문경 부회장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아니, 그는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막 지르고 싶었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지금은 내부 정보가 샌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알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조언인데, 증거도 없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면 다른 직원도 동요할 겁니다. 그러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실장님에게 그런 조언을 들을지는 몰랐습니다.]
[하하하,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민혁은 전화를 끊고 나서는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김명준 과장에게 입을 열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지 꼼꼼하게 지적했다.
‘잘되면 좋고, 효과가 없어도 상관은 없지.’
“아무래도 김 과장님이 해줄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할 일은 인천 공장에 가 있는 강준석 씨 팀원 중에 한 사람을 골라서 작업을 한번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 * *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 지시대로 인천 공장에 먼저 가서 강준석 팀을 찾았는데, 그중에 마침 눈에 띈 권우영을 선택했다.
이유는 권우영이 가장 덩치도 크고, 태도가 듬직했기 때문이다.
합기도 5단 단증을 가진 권우영은 겉으로 봐서도 어떤 지시도 잘 따를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권우영 성격이 그랬다. 강준석 팀이 우승한 것도 권우영의 배려가 있었다. 덕분에 권우영은 비록 대리 승진은 못 했지만 대신에 최고 인사 고과를 받았다.
권우영은 천경구 과장이 인천 내의 MP3 관련 양산 정보를 단 하나도 얻지 못하게 하란 지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왕이면 천경구 과장에게 가짜 정보를 흘리는 것도 중요해. 일테면 공장 내부 분위기와 같은 사소한 일을 포함해서.”
“알겠습니다.”
권우영은 이미 강준석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과 최문경 부회장 갈등을 들었다. 천경구 과장의 행동은 딱 최민혁 실장의 반대 라인이었다. 그는 굳이 자세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김명준 과장은 그런 태도에 꽤 만족했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자네 역시 강준석 씨처럼 좋은 기회를 잡는 거야.”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권우영도 강준석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다.
“…지금도 실리콘 밸리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준석이, 아니, 강준석 대리님은 계속 미국에 있는 겁니까?”
“다른 사람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도 강 대리는 아마 계속 미국에 있을 거야. 그러니 자네 역시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최병연 팀장은 KMP-01을 개발과 양산 과정을 비밀리에 진행하면서 공장을 이리저리 옮겼다.
처음에는 양산은 안산 공장에서 하는 것으로 기획되기도 했다.
그런데 콜린스 매출이 50만 대를 돌파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KMP-01을 도저히 안산 공장에서 생산할 상황이 아니었다.
최병연 팀장은 이미 안산 공장에서 콜린스 개발할 때 많은 삽질을 경험해서인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공장을 알아봤다.
가능하면 생산 설비 변경 없이 양산을 쉽게 할 수 있는 공장을 조사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삐삐 생산업체로 제법 알려진 폴라리스란 업체였다.
삐삐나 KMP-01은 외형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서 라인을 크게 변경할 필요는 없었다.
폴라리스란 이 회사도 몇 년 전만 해도 제법 잘 나갔다.
삐삐는 매달 요금이 3,000원으로, 밖에 나가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너도나도 무선호출기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격화되었다.
최신 호출기 한 대가 고작 5만원에 불과한 상황이었으니.
폴라리스는 결국 다른 업체와 경쟁에서 채산성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사용자 숫자가 천만 단위를 넘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버티려고 했다.
문제는 역시 내부 갈등이었다.
사장이 자기 친족을 회사 내에 대거 끌어들여서 가족 회사로 만들면서 새로운 신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타이밍을 놓쳤다.
심지어 이들은 사내 재산을 빼돌렸다.
그러니 폴라리스는 해가 더해갈수록 적자가 심해졌고, 곪아갔다.
그런 차에 문제가 된 것은 인천 지역 경제 불황이다.
이미 전국적으로 중소기업 파산이 늘어나는 문제가 인천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최병연 팀장이 폴라리스에 관심을 둔 것은 딱 자신이 KM 전자를 떠날 때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조성돈 팀장의 도움을 얻어서 폴라리스와 협상을 통해서 50억에 공장을 인수했다.
여기까지는 쉬웠다.
정작 문제는 폴라리스 사장이 고용한 직원 능력이 너무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이미 최민혁 실장의 과거 행보를 참고 해서 문제가 된 직원은 단호하게 모두 다 잘라냈다. 인수받기 전에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다행히 남은 직원 40명은 그렇게 무능한 이는 아니었다.
초도 물량 2만 대, 추가 물량 8만 대 생산이 어렵지 않은 이유다.
애초에 KMP-01은 콜린스와 비교해서 생산 자체가 아주 쉬웠다.
고작 들어가는 물품이라고 해봐야 메인 부품이 5개를 넘지 않았다.
자잘한 조립 부품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추가 물량 생산은 인력이 많이 부족했다.
최병연 팀장은 안산 공장 쪽에 도움을 청해서 이번에 투입된 신입 직원 중에 121명을 빼돌렸다.
안산 공장 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안 그래도 바쁜 상황에서 이제 거의 교육을 끝낸 직원 중에 121명을 빼갔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 화를 잘 안 내는 안선종 팀장이 전화기가 터질 정도로 소리쳤다.
[최 팀장, 정말 이따위로 할 거야?!!]
[…죄송합니다.]
[아니, 인력이 부족하면 새로 사람을 뽑으면 되잖아. 이제 교육을 다 끝내서 실전에 투입하는 직원을 빼가면 어쩌자는 거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쪽만 일 많아? 우리 콜린스는 지금 괜찮은 줄 알아? 국내 수요가 대폭 늘어난 덕분에 수출 물량도 간당간당해!]
실제로 안산 공장 임직원은 다들 죽을 맛이었다. 최민혁이 콜린스 사업부 매각 때문에 직원 고용을 동결시켰기 때문이다.
그나마 KM 그룹 신입 사원 321명을 다 데려와서 생산에 투입한 덕분에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일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인원이 충원되면서 생산 물량이 늘어났는데, 당연히 예약 물량이 출하되면서 소문이 가파르게 퍼졌다. 결국, 주문량은 더 늘어났다.
팔리면 팔릴수록 예약 주문은 오히려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된 것이었다.
특히 KM 전자의 브랜드 인지도가 중견 기업에서 대기업 이미지로 바뀌면서 판매 수량은 점진적으로 계속 늘어났다.
콜린스 수량이 결국 40만 대를 돌파하더니, 50만 대에 이르렀다. 무려 2조 원 매출을 결국 돌파했다. 이것은 누구도 예상을 못 한 일이었다.
한 우물만을 선택해서 선택과 집중을 한 덕분이었다.
KM 전자는 오직 콜린스에만 집중해서 생산 단가를 떨어뜨린 덕분에 더 많은 영업 이익을 올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KMP-01의 성공은 바로 이 콜린스가 기반이었다.
콜린스를 사들인 고객은 KM 전자 제품에 크게 만족했고, 늘 KM 전자 제품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차에 나온 제품이 바로 KMP-01이다.
이들이 KMP-01 제품을 사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브랜드 인지도, 혁신적인 제품 덕분에 최민혁의 예상과는 달리 KMP-01이 불티나게 팔린 것이었다.
최병연 팀장은 조성돈 팀장 통해서 들은 이 복잡한 사정을 안선종 팀장에게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번 한 번만 부탁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상황이 진행되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안선종 팀장도 화를 삼켰다. 그 역시 KMP-01을 봤기에 돌아가는 상황을 이미 짐작했다. 정작 그 역시 아들 친구가 들고 다니는 KMP-01을 봤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님이 지시한 것이겠지?]
[네.]
안선종 팀장은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딱히 최병연 팀장을 계속 타박하지는 않았다.
[KMP-01이 정말 잘 만들기는 잘 만들었어. 반응은 어때?]
[최고입니다. 예약 물량이 계속 쌓여서 줄어들지가 않습니다.]
[그건 좀 이상하네. 수요가 그렇게 많아?]
[입소문도 입소문이지만 적게는 두 개, 많게는 세 개까지 구입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단순한 수요로만 보기는 힘듭니다.]
그랬다.
KMP-01 출하량 폭증은 단순히 한 대씩 팔려서 생긴 문제가 아니었다. KMP-01 완성도에 반한 고객이 다른 지인 선물용으로 더 구입한 것이다.
그러니 그걸 본 다른 지인은 KMP-01에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안선종 팀장은 뒤늦게 지난 회의에서 최민혁이 한 결정을 떠올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KMP-01은 왜 판매 연기를 결정한 건가?]
[실장님은 좀 더 발전된 MP3을 고민했고, 미국 내의 MP3 상황이 모호했습니다.]
[한국 내의 상황은… 좀 달랐군. 4대 PC 통신사가 그렇게 난리를 치고, 음원 저작권 협회에서 대규모 소송까지 진행해서 뉴스에도 나오고 있으니.]
[그건 최 실장님도 미처 예상 못 한 일입니다.]
[하긴 제품 판매 결과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가 없지. 후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공장 내에서 이번 일로 불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앞으로 이런 일은 두 번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최병연 팀장은 어찌어찌 일단 안산 공장 측에 사과해서 넘어갔다.
다만 상황이 이런 덕분에 인천 공장은 어수선했다.
직원 40명이 KM 전자 신입 직원 121명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 * *
천경구 과장이 인천 공장을 찾아서 본 것은 정신이 없는 인천 공장, 그 상황을 보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신입사원들이었다.
그는 KM 그룹 기획조정실이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이번에 이쪽으로 옮긴 121명 중의 한 명인 권우영이었다. 그는 김명준 과장에게 받은 지시를 다시 곰곰이 떠올리면서 의도적으로 나섰다.
“신입 사원 권우영입니다.”
“아, 우영 씨, 만나서 반가워.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계열사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야. 혹시 하는 일은 마음에 들어?”
“최고입니다.”
“이런저런 안 좋은 이야기가 많던데, 정말 지금 상황에 만족해?”
“사람이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일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사회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병처럼 군기가 가득 든 모습.
회사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굴려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모습이다.
‘미친 건가?’
천경구 과장은 권우영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른 신입 사원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권우영은 자신의 덩치를 이용해서 천경구 과장 시선을 막았다.
“이번에 공장에 내려온 모든 신입 사원은 최민혁 실장님의 지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우리 신입 사원은 최상의 업무 훈련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천경구 과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권우영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권우영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막았다.
권우영은 자기 내심을 밝히지 않았다. 김명준 과장 통해서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가 거의 스파이 수준이라는 말에 새삼 천경구 과장 얼굴을 살폈다.
천경구 과장도 화가 났지만 천하장사 같은 권우영 기세에 질려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혹시 힘든 점은 있어?”
“전 원래 기획 팀에 지원했는데, 당장 안산 공장에 배정되었습니다. 안산 공장 생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다시 다른 생산 경험을 쌓도록 이번엔 인천 공장 쪽으로 파견 보내줬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상식을 벗어난 권우영 말에 천경구 과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획실과 공장 설비는 전혀 다른 데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