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
임권수 부장은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계속해서 크게 당한 터라 최호성 상무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았다.
그는 결국 KMP-01을 하나 더 사들였다. 아니, 아들 제품을 보고 질투하던 딸이 자신의 물건을 보고 하도 재촉하자 결국 추가로 두 대를 더 샀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하지만 그는 덕분에 배터리 소모 시간이 왜 중요한지 금방 깨달았다.
아들과 딸이 KMP-01을 사용하고 나서는 MP3 찬양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아빠, 이거 정말 죽여 줘요. 다른 것은 다 떠나서 사용 시간이 진짜 길어요. 소니, 파나소닉과 같은 일본 제품보다 더 월등해요!”
소니, 파나소닉의 카세트 플레이어의 배터리 사용 시간도 제법 길다. 충전용 건전지를 여분으로 들고 다니면 더 길어진다.
그런데 KMP-01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들 제품보다 사용 시간이 더 길었다. 아니,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맞았다.
디자인, 성능만 놓고도 하자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배터리 사용 시간과 같은 부분에서도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임권수 부장도 자신이 직접 KMP-01을 사용하면서 제품 완성도에 혀를 내둘렀다. 단순한 MP3 플레이어로서가 아니라 윈도우에 연결해서 TN LCD 스킨까지 바꿀 수도 있다.
자잘한 것 같아도 그렇지가 않았다. 오성 전자가 내놓은 모바일 제품 보다 소프트웨어적인 완성도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명품.
콜린스가 아날로그 TV의 정석이란 이야기는 어제오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KMP-01은 이런 콜린스보다 더 완성도가 높았다.
‘…진짜 잘 만들었네.’
임권수 부장은 정말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원래 KM 그룹 본사에 있었기에 KM 전자 제품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KM 전자에서 제품 개발하면 그 정보는 KM 본사로 오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이대로는 안 된다고 확신해 KM 그룹 본사 기획실 천경구 과장을 KM 그룹 본사 근처의 선술집에서 만났다.
“천 과장, 요즘 잘 지내지?”
“그냥 그렇습니다.”
천경구 과장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그는 비록 기조실 소속이기는 하지만 기조실 내에서도 평판이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임권수 팀장이 오성 전자로 이직한 후에는 완전히 왕따가 되었다.
기조실 내에서도 조심스럽게 생활하지만 다른 팀원들의 시선은 따가웠다.
그는 때문에 홀로 오성 전자로 이직해 버린 임권수 팀장을 원망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임권수 부장은 술잔을 따라주면서 천경구 과장 표정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어?”
단숨에 소주를 한 잔 마신 천경구 과장은 자신이 다시 술잔을 가득 채워서 한 잔을 더 마셨다. 그나마 좀 기분이 나았다.
“이대로 저를 두고 보실 겁니까?”
그도 천경구 과장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았다. 자신이 있을 때는 그나마 끈이 되어주었는데, 자신이 없다면 기획조정실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아, 조금만 기다려 봐. 나도 아직 오성 전자에서 자리 잡은 것 아냐. 지금은 그놈의 MP3 때문에 상황이 더 안 좋아. 우리 기획실이 난리가 났어. 오성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MP3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네? MP3가 그 정도 문제가 됩니까?”
“KMP-01 출하량과 예약 물량만 보면 MP3 시장이 새로 만들어진 거잖아. 앞으로 10년 동안 MP3 시장 출하량을 본다면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어. 당장 차량 쪽에도 들어가잖아.”
“하지만 차량 물량 자체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잖습니까?”
“예를 든 거잖아. 다른 예로 이건 얼마든지 휴대폰에도 적용할 수가 있어.”
“휴대폰요?”
생뚱맞은 이야기에 천경구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실상 MP3 플레이어 폰은 그다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휴대폰으로 MP3를 듣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임권수 부장 역시 소주잔을 연달아 들이켜면서 푸념을 털어놓았다.
“물론 휴대폰 CPU 성능 한계 때문에 지금 당장은 어려워. 하지만 휴대폰 CPU도 계속 발전을 거듭하고 있잖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 못 해.”
오성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MP3 디코더 문제가 나온 것은 MP3 문제가 아니라 MP3 라이센스 때문이다. 라이센스가 더 문제인 이유는 MP3 폰을 만들기 위해서는 KM 전자와 라이센스 협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천경구 과장은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니, 이건 콜린스 사태보다 더 심각했다. KM 전자가 KMP-01으로 콜린스 같은 대박을 터뜨린다면 자신의 입지는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임권수 부장은 이미 기획조정실에 있을 때부터 천경구 과장의 독단적인 성격을 잘 알았다. 그는 천경구 과장이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지시를 따를 것이라 확신했다.
“자네는 KM 그룹 기조실 과장으로 MP3 플레이어의 문제점을 한번 잘 살펴봐. 자네도 잘 알겠지만 처음 시장에 나온 물건이잖아. 분명히 문제가 많을 거야. 그걸 좀 파악해 봐.”
천경구 과장은 임권수 부장이 한 지시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오성 전자 측에 제 자리를 만들어주실 겁니까?”
“당연하지. 이번 일만 제대로 끝내. 그러면 오성 전자에서 당장 스카우트할 테니까.”
“확실하죠?”
“아, 이 친구가 날 어떻게 보는 거야.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이직이 문제가 아냐. 자네도 오성 전자에서 차장을 달수 있어!”
“…알겠습니다.”
천경구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KMP0-01을 잘만 응용해도 다른 계열사 매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어. 그러니 장 실장도 KMP-01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일 거야.’
* * *
천경구 과장은 KM 그룹 본사로 돌아와서 몰래 KM 전자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KMP-01에 관해서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장승일 실장도 KMP-01 현황만 살필 뿐이지, 딱히 사람을 투입하지 않았다.
“장 실장님, 우리도 KMP-01을 조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계열사 중에 MP3와 관련이 있는 곳도 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아.”
“아니 그것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신사업에 적용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신사업이라…….”
장승일 실장도 선뜻 답을 해줄 수 없었다. 다만 그는 갑자기 KMP-01과 관련해서 흥분하는 천경구 과장이 오히려 이상했다.
평소에 있는 듯 없는 듯 티를 잘 내지 않던 행동과는 너무도 달랐다.
구길모 차장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경구 과장을 쳐다보았다.
슬쩍 시선을 피한 천경구 과장은 여전히 이번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PDA 사업만 해도 회장님이 늘 지켜보던 사업입니다. 만약 MP3와 폰을 결합한 모델이라면 치열한 모바일 시장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흠.”
장승일 실장도 크게 반박하지는 않았다. 천경구 과장이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었다.
그는 결국 고민 끝에 KMP-01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MP3 플레이어는 단순히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응용할 수 있는 분야가 많아. 그러니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가 있어. 필요하다면 최민혁 실장님에게 부탁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천경구 과장은 이번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더 들었다.
“…혹시 핸드폰 사업도 해당합니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 만약 MP3 가능한 휴대폰이라면 모바일 사업 쪽에 충분히 뛰어들고도 남아. 회장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알지?”
그는 이번 일을 통해서 명분을 얻기 위해서 문제점을 걸고넘어졌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러면 MP3 플레이어는 기술적인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이게 쉬워 보이니, 천 과장 자네도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하지만 현실은 달라. 이게 간단했으면, 오성 전자나 LC 전자가 왜 그냥 조용히 있었겠어?”
“…네.”
천경구 과장이 침묵하자 KM 그룹 기조실 직원은 질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MP3 플레이어 자체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천경구 과장은 임권수 부장에게 MP3 플레이어와 관련된 자세한 설명을 들었기에 구체적으로 알았다.
이미 MP3 플레이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장승일 실장은 KMP-01에 대해서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꽤 충격을 받았는데, 생각보다는 시장 반응이 너무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KMP-01은 2만 대, 8만 대가 차례로 풀렸지만, 곧 시장에서 매진되었다.
KM 전자는 부랴부랴 10만 대를 추가로 대리점에 공급했는데, 이 물량 역시 불과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전량 다 소진된 것이었다.
아무리 예약 물량이 20만 대씩 걸려 있다고 해도 직접 팔리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인 것을 고려하면 시장 반응은 소름 끼쳤다.
불과 3주 남짓한 사이에 무려 600억 매출을 올린 셈이다.
“장 실장님, 이번 일은 다들 MP3 플레이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터라 KM 전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알았어. 그건 내가 전화하지.”
장승일 실장은 곧장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요청했고, 당연히 쉽게 허락을 얻었다.
MP3 플레이어 원천 특허를 얻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 이후는 솔직히 내부 정보가 다 흘러 나가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 * *
최민혁도 장승일 실장 요청을 쿨하게 수락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기조실 직원이 인천 공장을 살펴보겠다는 말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MP3 양산이나 개발과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 실장이야 믿을 수가 있지만, 기조실 인물이 다 그렇다고 하기는 힘들지. 당장 임권수 부장만 해도 배신을 했으니까.’
최민혁도 과거 허훈 과장 경우도 있어서 다시 장승일 실장에게 전화해서 방문 예정인 직원 프로필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장승일 실장은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성돈 팀장이 장승일 실장에게 받은 천경구 과장, 박재광 과장, 이수연 대리 세 사람의 이력을 하나씩 살폈다.
이수연 대리나 박재광 과장 얼굴은 본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KM 그룹이 공중분해가 될 때 어떤 행동을 했더라.’
최민혁은 뒤늦게야 이 두 사람의 행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천경구 과장 역시 두 사람과 비슷했다.
그는 세 사람 사진이 나와 있는 프로필을 쭉 나열해 놓은 채 그들을 살폈다.
김명준 과장이 넌지시 질문했다.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장승일 실장 행동이 석연치 않아서 말이죠. 제가 아는 바로 KM 그룹 계열사 중에 MP3와 관련이 있는 사업부는 별로 없어요.”
“신규 사업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중한 장승일 실장이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냈다고 봐야 합니다.”
“아니, 누가 그런 제안을 할까요?”
“MP3 양산이나 기술에 관심을 많이 둔 친구일 겁니다.”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과의 대화에서 힌트를 잡자 장승일 실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혹시 이번 MP3 기술 검토와 관련해서 의견을 제안한 직원이 있습니까?]
[천경구 과장이 이 계획에 적극적이기는 했습니다만…….]
[천 과장이 매사에 그렇게 적극적입니까?]
[…으음, 그게 평소와는 좀 달랐습니다. 아무래도 튀는 친구는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혹시 문제가 될까요?]
최민혁은 씩 웃으면서 경고만 해주었다.
[확실치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지금 이 시점에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임권수 팀장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죠.]
[설마 천 과장이라면…….]
[혹시 짚이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장승일 실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 과장은 임권수 팀장과 제법 친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였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굳이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재고해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