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격세지감이었다. 아니, 장승일 실장은 나름 지금까지 최민혁이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으니, 그렇게 보기도 어려웠다.
다만 피로에 절어 있는 모습만 봐서는 장승일 실장은 지금 곤경에 처해 있었다.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금방 추론했다.
‘노동부에서 최근 KM 그룹 채용 문제를 들여다본다는 소리도 있는데, 그룹 내부적으로 신규 인원 채용에 한계가 있으니까.’
“앞으로 그래야죠.”
최민혁은 다클서클에 절어 있는 장승일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도 이번 채용 문제 때문에 장승일 실장이 얼마나 곤경에 처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일방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중에 기존 신규 인원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구조조정 당한 이들의 반발이 없었다면 그럭저럭 상황을 풀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잘려 나간 이들은 그냥 있지 않았다.
그들은 KM 그룹 노조와 같이 KM 그룹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마에 붉은색 띠를 착용한 시위자는 확성기까지 든 채 맹렬하게 항의했다.
시위가 딱히 결렬한 것은 아니지만 오가는 시민의 시선을 끌었다.
심지어 이번 시위를 취재하기 나온 기자들은 신바람이 나서 한쪽에서 인터뷰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최민혁은 KM 그룹 본사 앞에 몰려와 있는 시위자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앞에 몰려와 있는 이들은 구조조정 피해 당사자입니까?”
“네.”
흥미로운 사실은 팻말을 든 채 ‘구조조정을 중단하라!’라고 항의를 하는 이들조차 최민혁 실장 모습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
이번 대규모 구조조정의 입안자인 최민혁은 자신도 혹시 시위에 욕설이라도 들을까 싶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그 이유는 시위가 최민혁에게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오성가의 역대급 재벌 사위란 말이 나오면서 다들 최민혁 행보에 대해서 이제 쉬쉬했다.
검찰, 증권감독원에서 한 걸음을 물러난 것도 오성 그룹이 배후에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아니, 꼭 그게 아니더라도 조 단위의 현금을 쥐고 있는 일약 정계의 풍운아가 바로 최민혁 실장이었다.
더욱이 지금 KM 그룹 임직원이 가장 존경하는 이도 바로 최민혁 실장이었다.
아무리 노조라고 해도 서슬 퍼런 최민혁 실장에게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최민혁은 이런저런 오해에 대해서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역대급 재벌 사위 카드를 최대한 활용해 먹었다.
‘이래서 정략결혼을 하는 것 같아. 최대한 우려먹어야지.’
“하면 그룹 구조조정도 문제가 되겠군요.”
“빠르게 진행한 계열사 몇 곳을 제외하고 다른 계열사 구조조정은 모두 홀딩 되었습니다.”
최민혁은 결정이 난 안건에 대해서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최용욱 회장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는 그냥 손 놓고 있습니까?”
“아무래도 노동부 쪽에서 말이 나오니, 한 걸음 물러났습니다.”
“지지율 때문입니까?”
“네.”
한숨을 내쉰 장승일 실장은 최근 돌아가는 상황에 만족하지 못했다.
바로 최문경 부회장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지내나 싶었는데, 구조조정 피해자가 된 이들을 부추겨서 시위를 격화시켰다.
이들은 KM 그룹 본사 앞에 몰려와서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최민혁 역시 KM 그룹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인 이들을 차분하게 살피면서 최문경 부회장이 노조 쪽을 만났다던 보고 내용을 떠올렸다.
“설마 이 일도 우리 첫째 큰아버지 작품입니까?”
“시위자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데, 배후에는 부회장님이 있습니다. 다만 아직 명확한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황당하네요.”
* * *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의 안내를 받아가면서 이런저런 보고를 받았다. 시위 문제를 포함해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그룹이 당면한 여러 가지 안건이다. 기획 조정실장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대꾸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 때문입니까?”
“아니라고는 말을 못 하겠습니다. 특히 최문경 부회장은 이번 일을 명분 삼아 일단 구조조정 대상자를 끌어안으면서 내부적으로 지지 세력 결집을 꾀하고 있습니다.”
“설마 할아버지에게 대항하려는 건가요?”
“숨김없이 그대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 또한 아니라고는 말을 못 하겠습니다.”
정확히는 정략결혼설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도 그냥 지켜볼 수는 없었다. 최민혁에 대한 공격은 어렵다고 해도 자기 지지 세력의 결집을 꾀했다.
구조조정은 최문경 부회장에게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이 일은 최문경 부회장이 노동부 쪽을 이용해서 사건을 더 부풀렸다.
최용욱 회장도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은 혀를 차면서 인생 1회차 기억을 천천히 돌이켜 봤다. 그 기억대로라면 최문경 부회장의 지금 행동은 딱히 지나친 것도 아니었다.
“이번 공채 인력이 문제가 되면 저에게 도움을 청하지 그랬습니까?”
“최문경 부회장이 극구 반대했습니다. KM 그룹 내부 문제는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만 했습니다.”
“구조조정을 주도한 저를 일방적으로 공격했겠군요. 그렇다면 제 이미지도 나빠졌겠습니다.”
“그게…….”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눈치만 봤다. 물론 KM 그룹 임직원은 최민혁을 열렬히 지지했다. 하지만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 이들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들은 오히려 최민혁을 싫어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었다.
최민혁이 미처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최민혁은 납작 고개 숙인 최문경 부회장의 물밑 행보에 감탄했고, 힐끗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김명준 과장은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도 이런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잘되었군요.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이곳을 찾았으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대규모 구조조정 문제도 원인을 찾아가 보면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주범이죠. 지금과 같은 방법은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까.”
장승일 실장은 예상을 벗어난 최민혁 발언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소리쳤다.
“…설마 그들을 모두 KM 전자에서 끌어안겠다는 말입니까?”
“네.”
장승일 실장은 너무 놀라서 심호흡을 한 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최민혁이 이렇게 순순히 자신을 도와준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민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면……?”
“이번 일은 제가 일방적으로 KM 그룹의 손실을 끌어안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KM 그룹 오너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런데 알다시피 전 KM 그룹 오너라고 할 정도로 지분이 없습니다.”
“설마 KM 산업 지분을 원하시는 겁니까?”
“딱 현재 KM 산업 주가를 기준으로 3%, 아니, 6%만 받겠습니다.”
“…그건 제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압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문 최민혁 얼굴을 보자 질문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최민혁은 이미 거래를 제안했다. 거기에 대한 대응책이 없다면 최민혁은 아예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쁜 거래는 아니야.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이 제안을 쉽게 수긍할 것 같지가 않아. 일단 지분 문제는 빼고 알리는 것이 좋겠어. 어차피 회장님이 최종 결정을 할 테니.’
* * *
최문경 부회장은 장승일 실장에게 들은 보고 내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는 자신만 아는 조카 최민혁이 KM 그룹 채용 문제를 끌어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다만 이 일을 찬성해야 할지, 아니면 반대를 해야 할 지 확신하지 못했다.
원론적으로 찬성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최민혁이 좋은 뜻으로 이 일을 진행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때문에 권재홍 비서실장을 다시 호출했다.
“어떻게 되었어?”
“일단 아직 대기하고 있는 인원 프로필을 확인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뿐입니다. 특히 나이가 30살인 친구도 있습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321명 프로필 조사 보고서를 꼼꼼히 살폈다. 예상대로 뛰어난 인재는 이미 다른 기업을 선택하고 없었다. 그나마 있던 인력을 1차로 다 걸러냈다.
“아쉽네.”
“그러게 말입니다. 최대한 괜찮은 인재는 KM 산업과 KM 건설을 중심으로 돌렸습니다. 하지만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다른 계열사는 당장은 이들을 흡수할 여력이 없습니다.”
여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계열사 매각을 진행하면서 크게 내부적으로 갈등하는 중이다. KM 그룹 본사 로비에 와서 시위를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생존 문제로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 신입 사원을 뽑을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뭐래?”
“회장님은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도 이번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굳이 반대할 것은 아닙니다. 계속 말이 나오고 있는데, 여론이 나빠지면 그만큼 부담이 됩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고민했다. 애초에 이번 일을 계기로 그룹 내에 주도권을 잡아서 구조조정부터 중단시킬 생각이었다.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이들을 그룹이 흡수하는 간단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최민혁이 한 가지 제안을 내놓으면서 상황이 또 달라졌다.
“정치권 쪽은 우리가 부추겼으니, 흐음, 이거 정말 골치네.”
“네. 시작은 우리 쪽에서 밀어붙였지만, 지금은 여론이 점점 나빠져서 여러 언론에서 우리 그룹이 신규 채용 인원을 방치한 것을 계속 걸고넘어지는 중입니다.”
“어쩔 수가 없나?”
“이번 일은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321명을 잘만 이용하면 KM 전자의 내부 갈등을 부추길 수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일단 프로필을 보고 적당한 인물을 한번 골라봐. 그리고 KM 전자 노조 측과 계속 만나 봐. 이들을 이용해서 KM 전자 내부에 언제라도 작업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가만 그런데 최민혁 그놈이 이런 일을 그냥 진행한 거야? 자세히 한번 확인을 해봐. 분명히 뭔가 더 있을 것 같으니까.”
“다시 원점에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 * *
최용욱 회장의 생각에도 당연히 이번 신입 사원 문제를 공짜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도 최문경 부회장 눈치 때문에 자기 지분을 가지고 고민했다.
“장 실장 생각은 어때? 만약 지분을 더 넘기면 그놈이 가만히 있겠어?”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필사적인 최문경 부회장 행보를 떠올린 장승일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 회장님에게 직접 찾아와서 결사반대를 외칠 겁니다.”
“그렇겠지?”
“안 그래도 KM 전자에 대해서 예민한 상황입니다. 하물며 이런 시기에 KM 산업 지분을 추가로 최민혁 실장에게 넘기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습니다.”
최용욱 회장도 순순히 수긍했다.
“하면 다른 대안이 없겠어?”
“최민혁 실장님은 아무리 회장님이라도 주고받는 것이 철저합니다. 지분 외에 다른 대안은 현재 없습니다. KM 전자 내의 재산은 배제하더라도 현재 최 실장님이 보유한 현금만 1조 원이 넘는데, 다른 제안은 아예 듣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지. 후유, 내 손자지만 이제 만만하게 볼 수는 없겠어.”
최용욱 회장도 손자라서 그냥 넘긴 최민혁 재산을 이제 가볍게 보기가 어려웠다.
1조 원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장승일 실장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최민혁 재산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는 결국 눈치를 보다가 다른 제안을 슬며시 내밀었다.
“어차피 문제가 되는 것은 회장님의 지분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지분이라면 어떨까요? 그건 최문경 부회장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최두진 그 친구 지분 말인가?”
“네. 물론 최 사장님도 회장님 제안을 쉽게 받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KM 전자 지분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민혁이가 그 제안을 받을까?”
“아직 남아 있는 지분이 좀 더 있습니다. 그중에 일부면 됩니다.”
“그렇다면 교환 비율이 문제겠어.”
“그건 최두진 사장님이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회장님의 중재입니다.
“그래. 급한 불부터 꺼야지. 자네가 가서 한번 이야기해 봐.”
“알겠습니다.”
* * *
최두진 사장은 최민혁 때문에 손해도 많이 봤지만, KM 전자 주식 덕분에 이익도 꽤 봤다. 그는 당시 최민혁을 엿 먹이기 위해서 매집해 둔 지분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비록 최민혁처럼 조 단위 이익을 본 것은 아니지만 수백억 차익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