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이런저런 일로 머릿속이 복잡한 최병연 팀장은 결국 이 문제를 미룰 수가 없었다.
[최 실장님과 상의한 후에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아, 그 툭하면 최 실장님 타령하는데,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내가 뭐 어려운 요구를 하는 겁니까. 인원이 부족하니, 본사 쪽에 가용 연구 인력을 공장에 좀 내려 보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결국 끊어진 전화.
최병연 팀장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하긴 하루 이틀 요구한 일이 아니잖아. 정략결혼설 때문에 오성 전자에 콜린스 사업부가 넘어갈까 염려하는 것 같아. 아무래도 실장님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어.’
* * *
월마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콜린스 50만대 계약에 대해서 태도를 바꾼 것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었다.
KM 전자 가치가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었다.
변화를 체감한 최민혁은 이제는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는 안산 공장 문제를 이전과는 달리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최문경 부회장이 다시 움직인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더욱이 안산 공장 인력도 콜린스 매각설로 시작된 정략결혼설 때문에 혼란이 계속된 것을 알았다. 다만 이 문제의 핵심은 좀 다른 곳이 있었다.
“결국 인력 문제군요.”
“네.”
최병연 팀장도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최민혁 고민이 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도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애초에 KM 전자가 나아가는 방향 자체가 기술 혁신 쪽이다.
굳이 불필요한 인력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최 팀장님도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시죠?”
“…MP3 생산은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 생산하실 겁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인건비가 적게 드니까요. 그리고 시기적인 문제도 있어요. 몇 년 후는 좀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필리핀이나 베트남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안산 공장의 불만이 점점 커져서 걱정입니다. 이런 시기에 해외 공장 증설을 시작한다면 또 말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안산 공장 분위기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잘되었죠. 오히려 불만을 품은 이들이 누군지 노골적으로 드러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최병연 팀장도 이미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자기 사람만큼은 철저히 챙기지만, 조직에 방해되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기 때문이다.
그도 이런 점에 대해서 최민혁을 비방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안산 공장과의 갈등 때문에 마음이 불편할 뿐이었다.
하지만 최민혁도 최병연 팀장이 고민하는 모습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그 역시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공감했다.
‘안 그래도 산적한 문제가 많아. 이런 시기에 지금 검증한 직원 외에는 다른 직원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괜찮은 인재라면 채용 안 할 이유가 없잖아. 오히려 스카우트해야지. 가만…….’
그런데 문득 인생 1회차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KM 전자 역시 법정 관리를 거쳐서 힘든 시기를 보낸 후에 일이다.
최민혁은 그 당시에 KM 전자 실무진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당시 망해가는 KM 전자 실무진이라면 다들 패배감에 젖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닌 이도 있었다.
‘강 팀장이던가? 강 뭐였는데? 아, 맞아, 강준석 팀장이었어.’
당시 삼수로 홍익대에 입학한 강준석 팀장은 2남 중에 장남으로 가정 형편이 좋지가 않았다. 그는 결국 학비 때문에 휴학을 몇 번이나 했고, 군대도 다른 이들보다 늦게 갔다.
결국 30살이라는 늦은 나이지만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나름 서울 쪽 대학을 나와서 나이라는 핸디캡이 있어도 괜찮은 대기업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뜻밖에도 망해가던 KM 전자였다.
그가 굳이 KM 전자를 선택한 이유는 워크아웃 중에 KM 전자 기존 직원이 별다른 텃세를 부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서 였다.
‘강준석 팀장의 예상은 맞았지. 덕분에 중간 계층이 뻥 뚫려서 바로 인정을 받았고, KM 전자 역사상 최초로 5년 만에 KM 전자 팀장이 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KM 전자가 기본만 모양새를 갖췄어도 강준석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KM 전자는 그러지를 못한 것이었다.
다행이라면 KM 전자는 워크아웃을 거친 후에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도 망하지 않았다.
결국 KM 전자는 살아남기는 해지만 고만고만한 중견 기업으로 전락했다.
최민혁은 헤어질 때 강준석 팀장의 안타까운 시선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가 최민혁 실장을 존경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최민혁 실장이 최훈열 전무보다는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득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화두 하나가 있었다.
‘강 팀장도 인생 2회차를 살 수 있었다면 자신의 꿈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된다면 회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자기 눈치를 보면서 문 쪽으로 걸어가는 최병연 팀장을 호출했다.
“잠깐만요.”
“네?”
“이 문제는 제가 다시 확인해서 알려줄 테니, 좀 기다려 보세요.”
“네? 저, 정말입니까?”
“그래요.”
최민혁은 씩 웃기만 했다.
‘차라리 지금이 오히려 인원 채용 적기라고 볼 수도 있어.’
* * *
최민혁은 환호하는 최병연 팀장 모습에 피식 웃고 난 후에 조성돈 팀장에게 지시를 내려서 기존 KM 그룹이 뽑은 인력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다.
조성돈 팀장은 뜬금없는 지시에도 KM 그룹 합격자를 다시 확인했고, 그 안건을 정리해서 최민혁에게 바로 보고했다.
그는 명단을 쭉 확인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강준석 팀장이 명단에 있었다. 아니, 강준석 팀장 외에 당시 끝까지 KM 전자에 붙어서 살아남은 이름을 확인했다.
‘이들이라면 믿을 만하지. 더욱이 이들이 날개를 얻는다면 어떨까?’
“321명이라, 숫자가 제법 많이 줄었네요.”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미 많은 인력을 줄인 상황이라서 급하게 신규 인원이 필요한 사업부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다른 기업으로 간 친구도 많습니다.”
KM 그룹 자체적으로 필요한 인력을 추렸고, KM 그룹의 태도에 질린 이들은 뒤늦게 포기하고 다른 회사로 가버렸다.
원래 문제가 된 KM 지오텍과 나머지 KM 그룹 계열사를 다 합쳐서 321명이 남았으니,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이들 321명은 아주 집요하거나, 아니면 다른 직장을 못 구한 경우이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이들이었다.
‘최소한 강준석 씨는 이야기가 다르지. 이 친구는 얼마든지 오성 전자를 갈 수도 있었으니까.’
“이들 채용은 현재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장승일 실장 이야기로는 일단 계속 대기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요?”
“사실 공지를 몇 번이나 보냈고, 알아서 다른 직장을 구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불행히도 이들은 여전히 KM 그룹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 같지만 정작 이력서를 잘 살펴보면 꼭 한 두 가지씩 결함이 있는 이들이다. 대다수는 다른 회사를 가고 싶어도 취업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고려해도 이들은 꽤 인내심이 강한 이들이다.
최민혁은 그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들을 키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환경을 만들 수가 있다. 하지만 신뢰는 그 자신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 버티고 있다라.”
“굳이 이들에 집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KM 전자 문을 두들기는 인재는 넘쳐납니다. 인사 팀은 채용 문의 때문에 아예 따로 전담 인력을 두었으니까요.”
“과연 그런 이들이 우리 KM 전자만을 보면서 끝까지 버틸까요?”
“네?”
“최근 노조 쪽만 봐도 눈치를 살살 보면서 우리 첫째 큰아버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이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만 서울대 출신도 저희 기업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과연 서울대 출신이라고 해서 우리 기업 체질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 우리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할까요?”
“그거야…….”
조성돈 팀장도 문득 최민혁 실장의 말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인재상을 떠올려 봤다.
골라내기가 쉽지 않았다.
최민혁은 프로필을 살피면서 오히려 만족했다.
“그런데 이들은 달라요. 이유야 어쨌든 KM 그룹에 끝까지 붙어 있어요. 설사 무슨 하자가 있다고 해도 그 사람 본성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설사 KM 전자가 망하는 그 순간에도 회사를 포기하지 않을 믿을만한 KM 전자 맨입니다.”
“…….”
조성돈 팀장도 새삼 특이한 최민혁 실장의 인재관에 다른 의견을 내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 말은 틀리지 않았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공감한 것을 보자 양손으로 손뼉을 쳤다.
“조 팀장님도 같은 의견이군요. 좋네요. 이들 모두 우리 KM 전자에서 채용하기로 합시다.”
“네?”
깜짝 놀란 조성돈 팀장은 크게 당황했다. 너무 많은 인력 채용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미 MP3 산업을 담당한 인재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콜린스가 아니라고 해도 MP3 생산이 본격화되면 인력이 필요합니다. 이들이라면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뛸 겁니다. 정글 속에서도 살아남을 겁니다. 그러니 경력으로 뽑아도 되겠지만, 지금부터 이들을 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사무직이나 다른 영업직에 지원한 사람도 많은데, 그들 모두를 일괄적으로 안산 공장에 보낼 생각입니까?”
“지켜보는 거죠. 열악한 안산 공장에서 묵묵히 버틴다면 우리 KM 전자와 평생을 같이 할 친구들이니까. 만약 중간에 포기한다면 그 친구는 어차피 나중에 떠날 친구입니다. 우리와는 맞지가 않는 거죠.”
“…실장님 말씀이 그렇다면 제가 반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최문경 부회장에게 공적이 모두 돌아갑니다.”
“아, 걱정하지 말아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 할아버지에게 한몫 단단히 뜯어내야죠. 그러니 장 실장에게 연락해서 미팅 날짜나 잡아두세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입맛을 다시는 최민혁 실장을 보자 이번에도 KM 그룹 지분을 단단히 뜯어낼 것이라 확신하고 말았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절대로 손해는 안 보는 분이니. 다만 이런 식으로 직원을 채용하다니.’
* * *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벗어나기 위한 구조조정 작업은 실상 한국 대기업 인사 팀에서 최근 화제가 되는 주제였다.
그룹별로 돈이 안 되는 사업까지 자신이 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아예 중소기업에 이런 사업을 넘기거나 아니면 구조조정을 진행해서 분리하는 방향도 실제로 진행 중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는 것은 한국 10대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견기업도 포함한다.
다만 KM 그룹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정부에서도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KM 지오텍에 합격했던 이들 중에 몇몇이 심지어 언론에 제보도 했다.
결국 TV 방송에서도 이 사건이 나와서 한동안 문제가 되었다.
이들이 분통을 터뜨린 것은 KM 지오텍이 HY 전자로 넘어간 이후에 그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도 있지만, KM 그룹에서 무조건 기다려 달라만 말만 한 채 아무런 구제 대책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KM 그룹 미처 간과한 부분이다.
그들 딴에 일단 필요한 인원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갑자기 KM 그룹 구조조정이 계열사 전방위로 퍼지면서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장승일 실장도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특히 여전히 KM 그룹에 들어오려고 하는 이들이 KM 전자 인기 때문에 버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차에 최민혁 실장이 이 문제 때문에 방문하겠다고는 연락을 해왔다.
장승일 실장은 회사 정문 앞까지 뛰어 내려가서 최민혁을 환영했다.
“실장님도 이제 KM 그룹 제반 상황을 하나씩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KM 그룹 본사를 자주 방문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