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
그는 곧 지금 당면한 사내 문제에만 집중했다. KM 그룹에서의 영향력을 키워서 최문경 부회장을 압박하려는 작업을 이대로 접을 수는 없었다.
다만 크게 보면 KM 그룹 계열사 중에 불필요한 기업은 차라리 정리하는 것이 나았다.
문제는 아무리 최민혁이라도 몇몇 계열사가 아니라 많은 수의 계열사를 다 날릴 수는 없었다. 지금 KM 그룹 구조조정도 상황에 따라서 사내 분위기가 나쁘면, 얼마든지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다.
거기다 최문경 부회장이 들쑤시기 시작하면 상황이 더 달라진다.
최민혁은 차라리 이번 사태를 이용해서 불필요한 사업부를 계획대로 다 도려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는 최근에 자신에게 허리를 숙인 계열사 임원을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것일까? 시기적으로도 나쁘지 않아. 콜린스 수익도 본격적으로 나고 있어서 굳이 MP3 미국 시장도 성숙하지 않는 상황에서 MP3 기획을 무리하게 밀어붙일 이유도 없잖아. 그렇다면 적아 구분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만약 첫째 큰아버지 편에 선 이들을 골라내는 것도 필요하니까.’
고민을 거듭하던 최민혁은 결국 한 가지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우선 조성돈 팀장을 호출했다.
“이렇게 하죠. KM 그룹 계열사 전체에 제 강연 공지를 내리세요. ‘KM 그룹의 미래 생존 전략’이라는 제목이 좋겠네요. 단 이번 강연에는 부장급 이상은 반드시 필참하라고 명시를 해주세요.”
갑작스러운 호출에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를 못 한 조성돈 팀장을 대신해서 김명준 과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적아 구분하시려는 겁니까?”
“네. 너무 노골적이기는 한데, 차라리 이게 좋죠. 과연 얼마나 참석할지 한 번 두고 봅시다.”
“하지만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 계열사 임직원이 참석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마 그들은 절대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만에 하나라도 절 좋아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장승일 실장은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받은 지시서를 읽다가 냉큼 최용욱 회장을 직접 찾아가서 이 안건을 보고했다.
하지만 혼사 문제로 고심에 빠진 최용욱 회장은 심드렁했다.
“문제가 될 것이 있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장소가 KM 그룹 본사가 아니라 KM 전자라는 점입니다. 거기에 부장급 이상 KM 그룹 실무진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조항이 문제입니다.”
“민혁이도 이제 정식 그룹 후계자 중의 한 사람이야. 이 정도 일은 할 수가 있어.”
“최문경 부회장님 생각은 다를 겁니다.”
최용욱 회장은 질투심이 많은 장남을 떠올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뭐 설마 문경이 그놈이 이번 강연에 참석하면 자기편이 아니라고 협박까지 할거라는 소리로 들리네?”
“충분히 그러고도 남습니다.”
“하.”
최용욱 회장은 유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도 며늘아기를 찾아가서 사과한 후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솔직히 아직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눈으로 보니 알 것 같은데, 머리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안사람에게 잔소리만 잔뜩 듣고 말았다.
그런데 아직도 정미선에게서 그 어떤 답을 듣지 못했다. 문제는 자신이 정미선을 상대로 독촉할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괜히 손자 최민혁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서 또 문제가 터질까 염려했다.
최용욱 회장은 손자 눈치만 보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참담했다. 하지만 DL 그룹에게 크로스 카운터를 날린 최민혁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웃기는 사실은 안건민 회장이 요즘 일주일에 2~3회 꼴로 전화를 한다는 거다.
안건민 회장도 이번 혼사에 처음에는 미적거리다가 최근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그 안부 전화에서는 ‘최민혁’ 이름을 200~300회 이상을 언급했다.
물론 안건민 회장 속셈은 그도 모를 수가 없었다.
‘콜린스 사업부가 그렇게 탐이 나는 걸까?’
“그런데 최민혁 이놈이 정말 콜린스 사업부 매각하는 것은 맞아?”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최민혁에게 이미 콜린스 사업부 매각에 대한 명확한 계획과 사유를 들었고, 최용욱 회장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지금 최민혁 하는 행동을 보면 정말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할 생각이 있는 사람인지 의아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최민혁 그놈이 설마 이번 콜린스 매각설 가지고 질질 끌면서 분탕질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닐 겁니다.”
“뭐 하나 제대로 드러나는 것이 없어. 안건민 회장에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어.”
장승일 실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기조실에서 다시 분석한 결과로는 만약 오성 전자가 콜린스 사업부를 인수한다면 전 세계 대형 TV 시장 점유율이 1년 안에 소니를 뛰어넘을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안 회장이 자기 막내딸까지 팔아서 밀어붙이고도 남을 일이야.”
“그나마 소니는 좀 낫습니다. 다른 일본 대형 TV 업체는 타격이 더 큽니다. 일본 TV 업계 몰락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다 히로 부사장이 그 난리를 쳤겠지. 그쪽은 조용한가?”
“계속 눈치를 보는 중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혀를 찼다.
“콜린스 매각으로 얻는 이익보다는 분탕질로 해먹는 것이 더 많겠어.”
“…아마 최 실장님이 노리는 것 중의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그건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할 때 이야기잖아. 만약 나중에 가서 안 판다고 나오면 어떻게 하지? 안 회장도 단단히 화를 낼 텐데…….”
“설마 최 실장님이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그래. 일단 그렇게 생각하지. 다른 일은 없고?”
“그게 아무래도 권재홍 비서실장이 정미선 사모님을 직접 만난 것 같습니다.”
최용욱 회장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그놈이 며늘아기를 협박한 것은 아니겠지?”
“권 실장도 뻔히 회장님이 방문한 것을 알 텐데, 감히 그렇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님이 경호원까지 배치해서 지켜보는데, 감히 그런 짓은 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이번 혼사를 막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문경이 그놈 짓이겠군요.”
“네. 만약 최 실장님이 오성가 사위가 된다면 최문경 부회장도 꽤 큰 타격을 받을 겁니다.”
“…그렇겠지.”
최용욱 회장은 장남 최문경 부회장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다른 일은 조용하게 진행하는데, 이번 혼사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며느리 정미선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이 아팠다. 결혼할 때도 집안을 온통 뒤흔들었는데, 아들 혼사 문제는 그보다 더하기 때문이다.
“가만 그런데 민혁이 그놈은 뭐래?”
“그게 이번 강연 빼고는 조용합니다.”
“이상하네. 그놈이 그럴 리가 없잖아. 뭔가 행동을 보여야 하지 않아?”
“몇 번을 확인해 봤는데, 이번 강연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습니다.”
“그래? 그래도 몰라. 콜린스 매각설도 어쩌면 계획이 바뀔 수가 있어. 솔직히 민혁이 고놈이 사업부 안 팔겠다면 답이 없어. 장 실장 자네가 한번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해.”
“그러면 강연 문제는…….”
“민혁이 그놈의 명성도 있으니,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 * *
장승일 실장도 혹시나 싶어서 최민혁 동선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정말 조용했다. 그는 그 어떤 일도 벌이지 않았다.
그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번 일을 도저히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의 KM 그룹 내의 영향력 때문이다.
KM 그룹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정미선이 자칫 몰라서 일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건 사전에 막아야 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고맙죠. 과거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정미선은 겉으로는 장승일 실장을 환영했지만 내심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촬영 현장이 촬영 중에 스톱되고 말았다.
장승일 실장은 방문한 다른 사람과는 달리 KM 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제법 외부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KM 그룹 구조조정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면서도 최근에는 뉴스에도 오르내렸다.
어떻게 보면 KM 그룹 내에 칼자루를 쥔 저승사자나 마찬가지다.
심진모 감독도 KM 그룹 내부 사정을 최근 조사하고 나서야 방문했던 사람 이름을 알았는데, 그 과정에서 장승일 실장 프로필을 따로 확인했다. 뉴스 경제란에 자주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촬영 스텝들도 전부 정미선 눈치를 보고만 있었다.
장승일 실장은 예민한 촬영한 분위기에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촬영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괜찮아요.”
탄식한 정미선도 장승일 실장만큼은 더 구박하지 않았다. 최병문과 만날 때도 도움을 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장승일 실장이었다.
만약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최병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녀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장 실장님도 많이 변한 것 같네요. 그때는 그렇게 당당하던 분이 제 눈치만 보고 있으니.”
장승일 실장도 힐끗 정미선 눈치를 봤다. 그녀는 아직도 최민혁의 그룹 내의 영향력이 어떤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실장님의 사내 영향력은 가볍지가 않습니다.”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정미선 눈빛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장승일 실장이라면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민혁이가 그렇게 대단해요? 기사 중에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기사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다른 것을 떠나서 KM 전자 오너라서 파워가 더 막강합니다. 지금은 최문경 부회장보다 더 영향력이 크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미 KM 그룹 후계는 큰 아주버님으로 정해진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최용욱 회장은 후계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서, 설마 그러면 민혁이가 KM 그룹을 승계받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충분히 가능한 이야깁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최 실장님이 지금 진행하는 일의 파급 효과가 더 큽니다.”
“그렇구나.”
정미선도 뒤늦게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아들 최민혁 영향력이 어떤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 이야기만으로도 민혁이가 자랑스럽기만 했다.
장승일 실장도 어느 정도 정미선을 설득했다고 생각하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최민혁 실장님 혼사는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겠네요.”
정미선을 살짝 아픈 과거를 떠올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고작 결혼 문제 때문에 그토록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KM 그룹 승계 문제라면 살인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뒤늦게야 두 사람이 왜 자신을 찾아와서 그런 자세를 보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저에게 감 내라 배 내라 하는지 모르겠어요. 혼사 문제는 본인 의사가 중요하잖아요.”
“일반인의 혼사와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그런가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어요. 민혁이가 그렇게 인정받고 있다면…….”
하지만 정작 푸념을 털어놓은 정미선은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당장 자기 주변 분위기도 바뀌었다.
여자 주인공 김승연은 마치 친엄마를 대하듯이 따스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렇게 까칠하던 심진모 감독은 집사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최재현은 감히 두 눈으로 그녀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다른 촬영 스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정미선을 상대로 여왕 보듯이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밥차에 푹 빠져 있는 다른 촬영 스텝은 먹이 먹는 다람쥐처럼 죄다 정미선 눈치만 봤다.
그들도 반복되는 이 상황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이미 촬영 스텝 내에서는 정미선의 정체에 대해서 설왕설래했던 것이다.
“알았어요. 제가 민혁이를 만나서 한번 이야기나 들어볼게요. 그런데 우리 장 실장님은 어느 쪽을 미는 쪽이죠?”
“저야 뭐…….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정미선도 이제는 호기심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녀는 장승일 실장이 얼마나 뚝심이 있는 인물인지 알았다. 최용욱 회장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들 최민혁 때문에 자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도대체 민혁이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기에 다들 저런 반응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