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07화 (307/1,021)

#307.

정미선은 다시 현장에 집중하려 하는데 촬영장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심진모 감독이 굳은 얼굴을 한 채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저, 미선 씨, 호, 혹시 권재홍 비서실장이라고 아십니까?”

“권재홍 비서실장이라면…….”

정미선은 고개를 갸웃한 채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최재현과 김승연도 촬영 중에 잠깐 쉬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최문경 부회장이라면 알 거라고…….”

“아, 저희 큰 아주버님이세요.”

“네? 네!”

심진모 감독은 예상 못 한 대답에 깜짝 놀랐고, 다시 후다닥 촬영장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몇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심진모 감독의 허락을 받자 빠른 걸음으로 정미선에게 다가왔다.

정미선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권재홍 비서실장?!”

“오랜만입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권재홍 비서실장은 난감한 얼굴로 정미선 눈치를 봤다. 과거 최문경 부회장 지시를 받아서 그녀를 괴롭힌 사람 중의 하나기 때문이다.

“…뜻밖이군요. 당신이 다시 저를 찾아오다니. 이번에도 협박할 생각입니까?”

“아, 아닙니다.”

“태도도 과거와는 많이 다르군요.”

“죄송합니다. 지난 일은 저도 윗선에서 지시를 받아서 한 일이라서…….”

“첫째 아주버님 지시라고 변명할 생각인가요?”

“지난 일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는 권재홍 비서실장.

그 행동이 얼마나 특이한 행동인지 동행한 수행원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최문경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냉혈한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권재홍 비서실장이다. 그만큼 최문경 부회장의 신뢰를 받았다.

실제로 최문경 부회장도 다른 사람과는 달리 권재홍 비서실장의 조언만큼은 늘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보면 장승일 실장과 함께 KM 그룹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나 마찬가지다.

정미선은 과거 자신조차 회사 평사원처럼 대하던 그 모습을 새삼 떠올렸다.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시아버님이 절 찾아와서 사과하지 않나. 첫째 아주버니 빼고는 회사 내에서 무서울 것이 없는 권재홍 비서실장님이 절 찾아와서 허리를 숙이다니. 이래서 세상이 참 재밌어요!”

큰소리치는 정미선이지만 내심은 좀 달랐다. 그녀는 말하면서도 떨리는 가슴을 내색하지 않았다. 권재홍 비서실장과의 대화는 그만큼 그녀에게 편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권재홍 비서실장을 보면서 가까스로 참았다.

정미선 얼굴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수행원은 조용히 뒤로 다가와서 섰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과거처럼 정미선을 괴롭히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잠깐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그녀도 마치 최문경 부회장을 대하는 것과 같이 정중한 태도에 그리고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민혁이가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이기에 이 사람이 이런 자세를 보이는 것일까?’

정미선은 곧 고개를 뒤흔들었다.

“전 할 말이 없습니다!”

당당한 그녀의 반응은 역시 그녀를 따르는 수행원을 믿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최민혁에 대한 믿음 덕분이다.

이미 최용욱 회장 입을 통해서 확인한 바. 과거처럼 권재홍 비서실장에 꿀릴 것이 없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그런 정미선의 태도에 반발하기보다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녀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채 지난 일을 사과했다.

“사모님, 지난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

그녀도 권재홍 비서실장 행동이 일시적인 변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실감했다.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꿈을 꾸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심진모 감독. 패닉에 빠져 있는 최재현. 충격에 휘청하고 있는 김승연. 다른 촬영 스텝은 패닉에 빠져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정미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렇게 말로 끝낼 일은 아니죠.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한다면!”

“압니다. 하지만 전 지시를 받는 처지에서…….”

"결국, 아주버니 탓을 하려는 건가요? 과연 그 일이 아주버니 지시 때문만입니까? 그놈의 핑계는 지겹지도 않나요?!!”

“…….”

권재홍 비서실장은 크게 당황했다. 정미선 반응이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그가 아는 정미선은 소심하면서 수동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정미선 모습은 촬영장의 다른 사람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촬영장에서 그렇게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정미선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심진모 감독은 바위처럼 굳은 얼굴을 한 채 이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최문경 부회장이라면, KM 그룹 부회장이잖아. 저 양반이 KM 그룹 후계자의 최측근이란 소리야. 아니, 저런 양반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자세지? 아, 골치 아프네.’

최용욱 회장에 이어서 KM 그룹 후계자로 이미 반쯤 공인받은 최문경 부회장은 오히려 최용욱 회장보다 심진모 감독에게 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최재현은 충격 탓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그가 정미선에게 수작을 부렸다면, 지금쯤 어떤 꼴을 당했을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모골이 송연했다.

정미선은 색다른 분위기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당신하고 할 말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 주세요.”

“잠깐만 듣고 나서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긴히 할 이야기가…….”

“당신이 할 이야기는 뻔하지요. 민혁이 혼사 문제에 끼어들고 싶은가 본데,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끼어들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촬영장의 시선을 오히려 이용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최 실장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오성가는 다른 재벌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데릴사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미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왜 권재홍 비서실장이 이곳에 나타났는지 금방 깨달았다. 바로 이간질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참 교묘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래서 더 황당했다.

‘도대체 민혁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들이 이러는 것일까?’

그녀가 아는 상식으로는 최문경 부회장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최용욱 회장의 행동도 비정상이었다.

‘하긴 아버님이 찾아온 것부터가 비상식적이었지.’

“가세요!”

권재홍 비서실장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사모님, 이 일은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문제가 아닙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그룹이 오성가에 먹힐 수도 있습니다!”

“하.”

그녀는 기가 차서 권재홍 비서실장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행히 정신적으로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갑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권재홍 비서실장이 이렇게 신사적으로 나올 리가 없었다.

“자꾸 그러면 민혁이에게 권재홍 비서실장 당신이 저를 스토킹한다고 말할 겁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최민혁’ 이름을 듣자 몸을 움찔 떨더니,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가 오늘 사모님은 방문한 것은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드리려는 의도였습니다.”

정미선은 고작 아들 이름만 내밀었는데, 권재홍 비서실장이 바짝 쪼는 것을 보자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아는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됐고요. 빨리 가세요. 안 그러면 지금 민혁이에게 바로 전화를…….”

“…지난 일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꾸벅 다시 허리를 숙인 권재홍 비서실장은 마치 도망치듯이 촬영장을 벗어나고 말았다.

오히려 정미선이 어이가 없는 눈으로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권재홍 비서실장이 하이에나같이 집요한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승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그녀는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촬영장 스텝들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최문경 부회장의 최측근이랄 수 있는 권재홍 비서실장이 정미선의 압박에 못 이겨서 줄행랑 놓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괜히 분란을 일으켜서.”

심진모 감독이 잽싸게 뛰어와서 정미선 눈치를 봤다.

“하하하, 아닙니다. 저희가 정미선 씨 가정사에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죠. 애초에 잘못은 상대가 했으니까. 저기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하고는…….”

“죄송해요. 집안일은 이 자리에서 말하기 좀 그래요.”

“아, 물론입니다. 이거 제가 크게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심진모 감독은 한껏 자세를 낮춘 채 정미선 눈치만 봤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KM 그룹 내에서 정미선이 실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첩 맞아?’

하지만 정미선도 나름 고민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일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결국 최민혁에게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최민혁도 콜린스 매각설 문제로 시작된 나비효과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다른 문제도 아닌 혼사 문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때문에 혹시라도 최문경 부회장이 이걸 빌미로 뭔가 하지 않을까 싶어서 김명준 과장에게 최문경 부회장 동선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최문경 부회장이 최근 국내로 돌아와서 하는 일을 대다수 파악했다.

최문경 부회장이 한 일 중의 하나는 이번 구조조정으로 피해를 본 이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심지어 노조 쪽과도 지속해서 만났다.

이 경우는 DL 그룹 사태와는 조금 다르게 상황이 흘러갔다.

최문경 부회장이 손을 내밀자 노조 측에서도 즉각 나섰다.

다른 KM 계열사는 최민혁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지만 KM 전자 쪽은 달랐다.

블랙리스트 노조원 7명이 최문경 부회장을 직접 만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만남 이후에 특별한 행동 변화는 없었다.

김명준 과장조차 걱정스러워했다.

“이번에도 실장님 예언이 적중했군요.”

“그보다는 일어날 수가 있는 일이죠. 첫째 큰아버지라면 당연히 하고도 남을 일이니까.”

“어떻게 할까요?”

“차라리 그냥 지켜보세요.”

“하지만 그들이 조용히 일하는 다른 근로자를 선동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최민혁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인생 1회차에서도 잘나갈 때가 있었지만 결국 실패하고만 이유 중에 하나가 사내 배신자다.

그들이 기술 특허를 빼돌리고, 사내 정보를 외부로 퍼트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배신자가 처음부터 배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돈에 넘어간 사람도 있고, 협박에 넘어간 이도 있었다.

‘바뀌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이 문제야.’

그리고 최문경 부회장의 행보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천안 연수원 개원도 무사히 진행되었습니다. 이 일에도 최문경 부회장님이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이전 시공업체가 부도난 바람에 유보되지 않았습니까?”

“이번 필리핀 공사 이권을 빌미로 신동화건설에 지분을 사들였고, 그것을 다시 KM 건설에 넘겼습니다. 거기에 자금 지원까지 했습니다.”

천안 연수원은 안팎으로 시끄러웠던 곳이다.

대지만 15만 평에, 건평이 1만 7천 평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500억이 넘는 공사비는 야당에게도 큰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지원을 강화하면서 마무리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덕분에 KM 건설도 한숨 돌렸다. 이 공사로 묶여 있는 자금을 빼낼 기회를 잡았다.

최민혁은 국내로 돌아온 최문경 부회장의 행보에 혀를 찼다.

“설마 첫째, 셋째 큰아버지가 손을 잡은 겁니까?”

“이미 몇 달 전부터 두 사람 사이가 급격히 좋아졌습니다.”

“저 때문이군요. 그래서요?”

“이번 공사를 계기로 최문경 부회장은 야당을 밀어주려고 결정한 것 같습니다.”

“공짜로 말인가요?”

“아마 딜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정위나 뭐 이런 쪽을 이용해서 들쑤시려는 겁니까?”

“그쪽은 알아보고는 있는데, 아직은 확실치가 않습니다.”

“그다지 좋은 신호는 아니군요.”

최민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IMF 이후에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치 쪽에 손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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