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54화 (254/1,021)

#254.

아니, 정확히는 권태성 실장의 추측이지만 이미 확신한 것이었다.

이번 협상 자리에 경험만 쌓으려고 나타난 안재운 대리는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도 수행 비서인 황순주 과장의 귓속말을 듣고 나서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민혁은 힐끗 안재운 대리 표정 변화를 살피고 나자 혀를 찼다.

“지금이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고, 무슨 맹세를 합니까?”

“네, 지금은 현대이지만 전 중요합니다. 딱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난 관계가 없다고. 전 STB 사업부 인수 같은 실패를 더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최민혁은 일방적인 압박에 주스 한 잔 부탁했고, 주스가 나오기가 무섭게 홀짝이면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딱히 오큘러스 프로젝트 일이 알려져도 상관은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입방아를 찍어서 다른 사람 귀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특히 정보통신부 쪽에는.’

정보 통신부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더러워서다. 될 수 있으면 자신이 나서서 똥 냄새가 가득한 쪽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이 일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건 이미 지난 일입니다. 그쪽에서 STB 사업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손실을 봤다면 절 탓할 일은 아닙니다. 이번 계약을 진행하는 분은 저기 제이미 이사님이니까요.”

“진심입니까?”

“네.”

최민혁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자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상 알게 뭔가. 지금 이 자리에 나온 것도 권태성 실장이 협상 자리에 자신이 없다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극구 주장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권태성 실장은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최민혁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보다 안재운 대리 표정을 살폈다. 매우 놀란 안재운 대리는 황순준 과장 반대편에 앉은 임권수 부장에게서도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막상 최민혁 실장을 앞에 두고 과거 일을 듣자 그의 표정은 조변석개처럼 계속 변화했다.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러웠다.

의문은 많았지만, 굳이 나서서 분란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안재운 대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민혁에 대해서는 그가 모를 수가 없었다.

오성 그룹 구조 조정 본부에서도 지켜보는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다.

특히 천문학적인 절세로 재미를 단단히 본 그의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어서 그를 따로 전담하는 팀도 있었다.

그런데 협상 자리에서 들은 최민혁 정보는 그룹 기조실에서 판단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왜 권태성 실장이 이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인지도 이해했다.

그는 다시 한번 권태성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째 태도가 이상하다고 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이 있었구나.’

더욱이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굳이 이 자리에 와서 설명한 것은 안재운 대리가 내막을 어느 정도 알라는 뜻이다.

경고였다.

만약 말로만 했다면 안재운 대리도 한 귀로 흘렸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권태성 실장이 굳이 자리까지 만들어준 것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안재운 대리도 이미 경영 기획실에서 단단히 쓴맛을 봤다는 것이다. 그때 아픔을 지금도 가슴 깊이 생각했다.

권태성 실장이 자기 자존심까지 건드려 가면서 만들어준 기회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나대지 않았다.

하지만 안재운 대리를 엮어서 오성 전자를 흔들 생각을 했던 최민혁으로서는 아쉬워서 혀를 찼다. 경계심이 가득한 안재운 대리의 시선은 최민혁의 입장에서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색안경을 끼고 볼 텐데, 작업 걸기에는 쉽지 않겠어.’

그는 솔직히 권태성 실장이 이런 식으로 나올지는 몰랐다.

‘날 교보재로 삼고 싶은 건가?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

최민혁은 이보다 한 가지 점을 넌지시 지적했다.

“오성 전자가 만약 오큘러스 지분을 인수한다면 다른 대기업이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언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압박을 가할 겁니다. 그 대안은 있습니까?”

권태성 실장은 잠깐 고민하다가 안재운 대리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재운 대리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것은 이번에 제가 설립한 e오성이란 계열사 통해서 지분 인수를 진행할 겁니다. 겉으로 봐서는 오성 전자와는 무관합니다.”

“호오, 그래요?”

최민혁도 겉으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심 곤혹스러웠다. e오성 설립은 일본 유학을 떠난 안재운 대리가 돌아와서 설립하는 회사이니까. 물론 다 말아먹지만 말이다.

‘만약 지금 e오성을 설립한다면 어떻게 될까. IT 거품 시기는 비켜나지만, IMF 폭탄을 맞을 텐데,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뭐,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솔직히 찜찜했다.

자신이 비튼 역사 때문에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중이다.

‘가만 오큘러스 법인은 IMF 폭탄에 무사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e오성이 박살이 나던, 오큘러스 법인이 흐지부지되던 최민혁이 알 바는 아니다.

‘아니, 그래서 지금 당장은 오큘러스 지분을 다 매각하는 것이 좋지. 정 이 사업을 하고 싶다면 IMF 후에 적당히 지분을 매입하면 되니까.’

실제로 그렇게 한 회사가 있다. 이후에 단단히 재미를 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최민혁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에게 신호를 줬고, 곧이어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가치에 평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이와 유사한 사업을 기준으로 삼아서 비교 평가했습니다.]

특히 원천 기술과 관련된 핵심 부분이 생각보다는 많았다.

그 기술은 이미 특허 출원이 된 마당이었다.

[한국 사람은 특허료에 대해서 그 의미를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기술은 단순히 위성 기술이 아니라 MPEG 표준화에도 적용될 겁니다. 실제로 그 부분을 담당한 위원회에서 진행 중인 현황입니다.]

실제로 MPEG 위원회에서도 이 위성 특허 관련된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가 요즘 유럽으로 자주 가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특허를 압도하는 터라 암묵적으로 오큘러스 관련 특허를 미는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이동호 교수는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에 더 주목을 받았다.

위성 응용 사업에서도 그 자신이 이바지한 특허가 대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제이미 이사는 그와 관련된 복잡한 서류를 일일이 다 꺼내서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혹시라도 이 특허를 베껴서 뭔가 하시려는 것은 말기 바랍니다. 저희 시즈벨에서 하는 일이 특허 도둑놈을 잡아서 사골국까지 끓여 먹는 겁니다!]

물론 이 협상 과정에서 주로 나온 이야기는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아니라 DL 그룹이 얼마나 적극적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오큘러스 법인 가치가 얼마가 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오큘러스의 지분 가치는 생각보다는 점점 올라갔다.

‘10%에 1,000억이라, 위성 사업부 넣어서 1,300억까지 받을까. 아니면 7% 넣어서 2,000억까지는 땅길까?’

이런저런 선택안이 떠올랐다.

하지만 굳이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DL 그룹의 김상구 회장님이 좀 더 가격을 올릴 테니, 말이다.

권태성 실장의 얼굴은 무슨 떫은 감을 씹은 사람 마냥 좋지가 않았다. 아마 안재운 대리가 없었다면 그냥 이 계약은 없던 걸로 했을 거다.

불행히도 안재운 대리는 쉽게 자기 욕망을 떨치지 못했다.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은 수익성을 떠나서 안정적인 사업이란 것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권태성 실장은 나름 주도적으로 나가려고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상황이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에 이를 악문 채, 최민혁 실장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휘파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은 최민혁은 괜히 억울했다.

‘돌겠군. 협상은 제이미 이사가 하는데, 왜 날 저렇게 원망할까? 당장은 장밋빛 미래가 있어서 의심할 이유가 없는데, 왜 저러나 몰라. 64MB 낸드 메모리 이야기 꺼낼 타이밍이 애매해.’

결국 64MB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 문제는 다음으로 넘겼다.

시간은 최민혁 편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했는데, 악착같이 뽑아먹어야지. 적당히 당근도 주면, 또 저 표정이 바뀔 거야. 서로 돕고 사는 거지.’

* * *

오큘러스 지분 협상은 생각보다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최민혁은 애초에 이 오큘러스 지분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냥 공돈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니 1,000억을 받아도 많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오큘러스 법인은 지금 당장은 10% 지분이 1,000억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성 전자 입장은 다르다. 정확히 안재운 대리 입장은 달랐다. 그가 그리고 있는 미래 비전에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주다. 디지털 위성 사업은 그의 로드맵과 정확히 일치했다.

더욱이 독점적인 사업이라서 파생 사업에도 투자를 늘려가면, 안정적인 캐시 카우 광산을 확보한 것이나 진배없다.

권태성 실장조차 이런 점을 순순히 인정했다. 다만 STB 사업부 일도 있고 해서 오큘러스 프로젝트 진행 사안을 수십 차례나 검토했다.

최고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비록 KM 전자 위성 사업부는 쓰레기지만 그 권리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위성 사업부 인수 후에 수신기 공급 물량을 대폭 늘릴 수가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위성방송 수신기 국내시장을 장악하고, 미국이나 유럽 시장을 공략한다면 손실은 입지 않을 것이라 봤다.

아니 제대로만 잭팟이 터진다면 위성 기술이라는 비교 우위 기술 때문에 피 터지는 경쟁을 해야 하는 어중간한 가전 사업보다는 훨씬 나았다.

‘확실히 나쁘지는 않아.’

권태성 실장 표정을 읽은 안재운 대리도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권 실장님, 이번 일만 도와주세요. 제가 이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권태성 실장도 싫은 얼굴은 아니다. 오성 전자 내에 별다른 인맥이 없는 처지에서 안재운 대리는 괜찮은 선택이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계열사 사장을 넘어서서 그 이상도 볼 수 있었다.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권 실장님은 이미 KM 전자를 다른 누구보다 잘 압니다. 특히 최 실장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도 최 실장을 얕잡아 봤지만, 이번 미팅을 통해서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확실히 이창명 이사와는 다른 안재운 대리였다.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꼼수를 이미 경험해 봤기에 혀를 찼다.

“최 실장이 비록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지만 겉보기와는 다릅니다. 생각보다는 탁월한 사업 감각도 있고, 냉정한 면은 한국 대기업 재벌 3세 중에는 보기 힘듭니다.”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운이 좋아서 그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그것만으로 힘들 테니까.”

“그래서 걱정입니다. 최 실장 같은 이가 굳이 디지털 위성 사업 지분을 매각하는 것은 다른 뭔가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기획 팀 내에서도 수십 차례 확인을 한 내용 아닙니까. 심지어 외부 연구 평가로 용역까지 준 것으로 압니다. 그 평가도 최고였고요. 그런데도 최 실장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게 하…….”

최민혁 실장에게 당해보지 못한 안재운은 자기 말을 여전히 믿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도 설득에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확실한 것이 좋다고 차라리 다른 기회를 노리는 것이 어떨까요. 최 실장은 절대로 좋은 의도로 저러는 게 아닙니다.”

“최 실장의 의도가 걱정은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 잠재력을 무시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하아.”

그도 가슴이 답답했다. 문제는 안재운 대리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미칠 지경이다. 최민혁 꼼수라도 알면 좋을 텐데, 알 방법이 없었다. 아니 뒤늦게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최 실장이 지금 하는 일이 도련님을 부추기는 것이 목적일까?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앞뒤가 안 맞아. 그런 사실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다는 소리야?’

물론 아니다. 최민혁이 원래 그린 그림은 권태성 실장과 이창명 이사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더 있다면 디지털 위성 사업을 노린 또 다른 오성 전자 내의 제3세력이었다.

안재운 대리가 끼어든 것은 그의 계획과는 좀 달랐다.

그리고 최민혁도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미래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6년이나 바뀐 미래를 그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있다고 한다면 IMF 시기에 과연 오큘러스 법인이 멀쩡하게 굴러갈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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