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흠.”
막힘없는 최민혁 대답에 오영근 사장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일태 이사 얼굴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위성 사업부는 솔직히 나도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 더 할 말이 없군. 생각해 보면 이일태 이사를 아직 내버려 둔 것도 오성 전자와 계약 때문이었던 것 같아. 이일태 이사가 불쌍하군.’
* * *
최민혁은 보고를 끝낸 후에 조성돈 팀장을 호출해서 오큘러스 지분 매각과 관련해서 DL 정보통신과 진행되는 정보를 오성 전자에 흘렸다.
이창명 이사도 중간에 이 정보를 들었지만, 조용히 침묵했다. 그는 괜히 나섰다가 안 그래도 멍청한 안재운 대리 때문에 예민한 오성 그룹 윗선에 찍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권태성 실장은 KM 전자의 위성 사업부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미 STB 사업부 인수라는 지뢰를 밟아봤기에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DL 그룹에서 오큘러스 지분 계약이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얻자 그럴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경영 기획실에서 적응 못 한 오성 그룹 황태자 안재운 대리를 만나서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재운 대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현재 경영 기획실의 안재운 대리는 이 정보를 얻기가 무섭게 권태성 실장을 찾아왔다. 수행 비서인 황순주 과장도 이번에 동행했다.
평소 회사 조직을 나름 준수하는 안재운 대리가 이렇게 직접 기획실을 찾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권태성 실장도 크게 당황한 채 실장실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도련님, 무슨 일 때문입니까?”
“DL 그룹의 김상구 회장이 오큘러스 지분을 인수하려고 한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협상이 진행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정보통신부 측에서 이미 사전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지분 중에 27%가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에게 넘어갔습니다.”
안재운 대리의 목소리가 바로 올라갔다.
“설마 그걸 이대로 두고만 봤다는 말입니까?”
열망에 가득한 안재운 대리는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솔직히 일본 유학 따위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번 일 하나만 제대로 터뜨려도 충분히 오성 전자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권태성 실장도 안재운 대리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궁화 위성 발사를 앞둔 시점에서 관련 대기업의 행보는 빨라졌다.
위성 사업으로 말미암은 파급 효과가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힘들다고 해도 수조 원 이상의 새로운 시장이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위성 주권 시대의 개막이다.
더욱이 이 시대는 그저 말뿐인 그런 다른 정부 정책과는 달랐다.
황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혁신적인 사업이었다.
권태성 실장조차 최민혁 실장이 엮여 있지만 않았어도 이 사업 이권에 적극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이 관련된 것만으로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을 걸고 넘어갔다.
“…그런데 아직 메이저 방송사의 디지털 사업 투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이 기반에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조 단위가 들어갑니다.”
설사 위성방송 시스템이 시작된다고 해도 이에 대응되는 방송국 시스템 역시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정보통신부가 난리를 쳐도 바로 위성방송이 정착될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하는 척만 했던 것이다.
지금은 물론 지분 투자에 적극적이지만 그렇다고 그 비용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시간은 필요했다.
“그건 이미 정부에서 적극 밀어주는 것으로 알아요. 메이저 방송사에 이와 관련해서 정부 예산도 새로 늘어났고, 국회에서도 이미 확정된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요.”
인상을 잔뜩 찌푸린 권태성 실장도 식은땀을 닦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는 솔직히 이렇게 사업이 잘 풀려가는 것이 더 불안했다.
‘최 실장이 초대형 폭탄을 설치해 놨을 거야.’
그래서 안재운 대리에게 디지털 위성 사업부의 위험성을 계속 지적했다.
하지만 그도 뜨거운 욕망으로 가득한 안재운 대리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권 실장님 마음 압니다. 그래서 제가 도와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런 리스크를 권 실장님이 맡아서 해결해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안재운 대리. 단단히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최민혁도 인생 1회차를 살지 않았다면 안재운 대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
‘틀렸어.’
사실 지금까지도 조마조마했다.
최민혁 실장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나 싶어서 지켜보기만 했다.
기획사 뉴스가 나왔을 때도 그랬다. 다른 사람은 다 비웃어도 권태성 실장은 심각하게 지켜봤다. 도대체 무슨 꼼수를 부리나 싶었다. 그런데 해프닝이란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무슨 술수를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조용히 이 사건이 넘어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한 것보다 더 나쁜 결말로 흘러가고 있었다.
권태성 실장은 특히 오성 그룹 차원에서 이미 안재운 대리를 도우라는 암묵적인 압박을 계속 받았다. 이제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위성 사업 수익은 최소한 1년은 있어야 날 겁니다. 그동안은 적자가 쌓일 텐데, 그걸 감수해야 합니다.”
“아니, 그래서 권 실장님을 지금 제가 찾아온 것 아닙니까. 도와달라고!”
독단과 똥고집이 가득한 이창명 이사와는 전혀 다른 안재운 대리.
‘차라리 이창명 이사가 설쳐주면 그걸 명분 삼을 수도 있을 텐데, 귀신같이 입을 다무네.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답답한 권태성 실장은 갑자기 잠수 탄 이창명 이사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권태성 실장은 다시 몇 번이나 강조했다.
“만약 지금 이 흐름대로 흘러간다면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생긴다면 도련님에게 책임이 다 돌아갑니다.”
“제가 모든 일을 다 책임지겠습니다!”
‘미치겠네. 진짜 한숨만 나오네. 사업이 실패하면 나 같은 희생양을 내세워서 다 정리하겠지. 손실은 다른 계열사에 떠넘기면 될 테니까.’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내심을 차마 토로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한 번 미팅을 잡아보겠습니다.”
* * *
최민혁은 애초에 오큘러스 지분 매각 협상에서는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권태성 실장이 자신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오성 전자 본사로 갈 수밖에 없었다.
오성 전자 본사 입구에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이동호 교수, 송한성 교수를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오성 전자 본사 입구에서 기다린 사람이 권태성 실장을 포함한 오성 전자 기획 팀 직원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최민혁은 마치 자신이 오성 전자 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권태성 실장 안내를 받아서 오성 전자 본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따가운 시선은 덤이다.
오성 전자 실세 중에 한 사람으로 유명한 권태성 실장이 직접 나서서 안내하니, 오가는 오성 전자 직원도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은 전부 최민혁 부하처럼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저분은 권태성 실장님이잖아. 저분이 누굴 안내하는 거야?]
[…가만 저 사람은 설마,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 아냐?]
[최민혁 실장이라면 설마 회사 직원 복지로 6층 건물의 음악 연습실을 사들인 그 양반을 말하는 거야?]
[어. 해프닝이라고는 하는데, 과연 정말 그런지는 두고 봐야지. 무슨 6층 건물을 사원 복지 용도로 사용한다는 말인지.]
[그거 원래 신영 기획사 건물이라고 하잖아. 어지간한 중견 기획사보다 더 설비가 좋을 거야.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솔직히 난 돈 씀씀이 보고 더 놀랐어. 많이 벌어서 돈을 쓰는 거야 자기 마음이지만 수백억짜리 건물을 자동차 사듯이 샀으니.]
[1조 자산가인데, 고작 건물 하나 사들인 걸 가지고 그러면 좀 그렇지. 그래도 부동산을 매입했으니, 나쁜 투자는 아니잖아.]
[나도 공감이야. 우리나라 재벌 3세 중에 망해가는 기업을 일으켜서 저렇게 돈을 많이 번 이는 없잖아. 그 돈으로 빌딩을 매입했으니, 나쁘지 않아.]
[너희도 콜린스 써봐. 그러면 최 실장에 대해서 다시 평가할 테니까.]
놀랍게도 최민혁을 알아본 이가 있었다.
아니, 생각보다 많았다.
심심하면 언론에 사진이 오르내린 덕분에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많았다.
최민혁은 덕분에 오성 전자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집중 조명을 받았다.
최민혁 예찬론에 심취한 직원을 따가운 눈으로 쳐다본 권태성 실장은 딱히 최민혁을 환대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너무 급해서 최민혁 실장 안내까지 도맡은 것이었다.
“최 실장님 명성이 자자합니다.”
“제가 뭐 한 게 있습니까. 다 우리 기획 팀에서 처리한 일이죠.”
“제가 듣기로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모든 일을 그렇게 쉽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최 회장님이 나섰다고요? 설마 저에게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최 실장님만이 아시겠죠. 김현우 수석 부장 같은 악성 바이러스를 오성 전자에 집어넣은 것도 좋은 의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흠.”
최민혁은 김현우 수석 부장 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아직 흥미를 느끼고 지켜보고 있는 뉴스였다.
‘사실 김현우 수석 부장 현황이 궁금하기는 한데…….’
차마 권태성 실장에게 묻지는 못했다.
“그런데 꼭 제가 이 협상에 참석해야 합니까?”
두 눈을 부릅뜬 권태성 실장은 피식 웃었다.
“일은 두 번 세 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자가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 이 일과 무관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
권태성 실장은 이죽거리는 최민혁 실장을 냉랭하게 쳐다보았다. 솔직히 욕설이 치밀어 올랐지만 참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그렇게 싫던 이창명 이사가 정말 보고 싶었다. 이창명 이사만 평소와 같아도 자신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역시 뭔가 있어. 도대체 디지털 위성 사업으로 무슨 수작을 부린 걸까. 정말 영문을 모르겠네.’
* * *
안재운 대리도 꼰대 저리 가라 싶은 권태성 실장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경영 기획실에 있으면서 권태성 실장 명성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큘러스 프로젝트 지분 계약 대상으로 나온 사람이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가 나온 것은 이해가 된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두 사람의 법정 대리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협상 자리에 나온 것이 어리둥절했다.
실제로 최민혁은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정중한 어조로 한쪽 끝에 앉아서 자신은 이 계약 협상과는 무관하다고 가식을 떠는 최민혁 실장 맞은편에 앉아서 잠시 쳐다보았다.
회의 정중앙에 앉은 실무진은 죄다 구석 쪽에 앉은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따가운 시선에 혀를 차면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지난 협상 자리에서 보고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권태성 실장님은 왜 이 자리에 딱 찍어서 저까지 나오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팔짱까지 낀 권태성 실장은 차가운 눈으로 최민혁을 째려봤다.
“솔직해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
게슴츠레한 눈을 한 권태성 기획실장은 정중하지만 차가운 어조로 일축했다.
“박사님 두 분 연구 배후에 최 실장님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ETRI 측에서 저자세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흠.”
“아니면 이 자리에서 정말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이 없다고 맹세하십시오. 그러면 저기 제이미 이사님과 협상하겠습니다.”
지적을 받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어깨를 으쓱한 채 답하지 않았다. 그는 새삼 놀란 눈으로 권태성 실장을 쳐다보았다.
“…….”
최민혁 실장도 따가운 권태성 실장의 태도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권태성 실장은 아예 작정하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