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한국 정부는 달러가 없어서 이 나라 저 나라 구걸하는 중에 한 쪽에선 오큘러스 법인에 투자하고, 메이저 방송사가 수조 원 자금을 사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그 예산을 줄여서 다급한 다른 쪽에 투자하는 것이 맞다.
그러니 미래를 모르는 권태성 실장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하고, 실력이 좋아도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알 도리가 없었다.
‘이번 경우는 진짜 모르겠네. 그래도 이건 아닌데, 환장하겠군.’
* * *
권태성 실장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최민혁의 행동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는 이번 일에 자기 목이 걸려 있다는 확신이 들자 해외 마케팅을 담당하는 기획 2팀 강석영 부장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임권수 기획 3팀 부장을 불렀다.
아니, 그는 직접 기획실에 내려가서 모든 팀장을 전부 다 호출해서 최민혁 실장의 현황에 관한 조사를 지시했다.
“지금 진행하는 일 중에 꼭 필수적인 것을 빼고, 모든 인력을 다 동원해서 최민혁 실장을 파. 모든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다른 것은 다 보류해.”
황당한 권태성 실장의 지시에 강석영 부장이 반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황태자 안재운 라인을 잡은 상황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이번 일은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한다. 그러니 반론은 받지 않겠다. 최민혁 실장에 대한 모든 것을 다 파헤쳐 봐.”
“…알겠습니다.”
오성 전자 기획 팀이 발칵 뒤집혔다. 늘 배후에서 음모론만 꾸밀 것 같은 권태성 실장이 아예 작정하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 * *
요즘 휴가 내고 집에 칩거한 이창명 이사는 안국호 부장의 방문을 받았다.
“정말 답답합니다. 갑자기 이사님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설마 누구에게 협박이라도 들은 겁니까?”
이창명 이사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막상 말하려니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설마 황준엽 부사장이 직접 나선 겁니까? 그분이 그렇게까지 할 분은 아닌데…….”
“황 부사장이라면 내가 고민도 안 했을 거야.”
“그러면 누가…….”
“최학준 전무.”
최학준 전무는 오성 그룹 내에서도 안건민 회장의 측근 중의 하나로 꼽힌다. 단순히 전무라는 직급을 뛰어넘어서 광범위한 권력을 행사한다.
아무리 이창명 이사가 서자라고 해도 최학준 전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최학준 전무라면 설마 오성 그룹 구조 조정 본부의 그 최학준 전무님 말입니까?”
“그래, 난들 뾰쪽한 수가 없잖아.”
인상을 구긴 이창명 이사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자기가 차린 밥상 위에 숟가락만 올려서 다 먹어치우도록 한 최학준 전무에 치를 떨었다.
아무리 안재운이 멍청한 짓을 해도 안건민 회장의 안재운 사랑은 유별나다.
그걸 이번에 확신한 것이다.
이창명 이사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이제까지 사냥개 행세를 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아니, 안건민 회장에 대한 증오심이 생겨났다.
‘사냥개는 사냥개라는 건가. 개좆같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진실의 일부를 안 안국호 부장은 이창명 이사 눈치만 봤다.
“아, 김현우 수석 그 새끼는 어떻게 되었어?”
“그게 일단 아무런 조치가 없습니다. 권태성 실장이 지금 최민혁 실장에 관한 조사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고, 황준엽 부사장도 안재운 대리에만 신경이 가 있습니다.”
“더럽게 운이 좋은 놈이네.”
그랬다.
안재운이 나선 이후로 오성 전자 상황은 이전과는 완전히 바뀌었다. 모든 일이 중지되자 김현우 수석 부장에 대한 처벌도 유예된 셈이다.
눈치 빠른 김현우 수석 부장이 판이 아니다 싶어서 몸을 바짝 엎드린 것도 한 이유였다.
이창명 이사는 늘 자신이 가해자 노릇만 하다가 거꾸로 피해자가 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권 실장이 왜 최민혁 실장을 뒤지기 시작한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아.”
“이번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기존 기획실 직원 전체를 다 동원했습니다.”
“어이가 없군. 할 일이 산적해 있을 텐데, 미친 것 아냐? 가만 압력을 단단히 받았나 보군. 하긴 이번 기회가 권 실장에게는 마지막 기회일 수가 있어. 만약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은 그가 져야 할 테니까.”
“어떻게 할까요?”
이창명 이사는 잠깐 지난 일을 떠올렸다. 특히 ETRI 내에서 최민혁 행동을 곰곰이 따져보았다. 당시 석연치 않은 ETRI의 오현종 팀장 얼굴을 말이다.
‘최 실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럴 수가 없겠지. 목줄 잡힌 강아지나 마찬가지였어. 오만한 ETRI 연구원이 그런 행동을 그냥 보일 리가 없어. 그렇다면 역시 최 실장이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관여했다는 말인데, 도대체 어떤 수작을 부렸을까?’
이창명 이사는 뒤늦게 권태성 실장의 처지를 이해하자 피식 웃었다.
“최민혁 실장에게 우리 내부 정보를 흘려 봐. 티 나지 않도록, 특히 권태성 실장의 움직임을 중점적으로 해서 알려.”
“네? 최, 최 실장을 도우라는 말입니까?”
“적의 적은 친구야. 지금 최 실장은 오히려 적보다 나은 친구잖아. 그렇다면 친구를 도와야지. 아, 다만 비밀리에 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안국호 부장은 음흉한 눈빛을 번쩍이는 이창명 이사의 모습에 잠깐 갈등했다. 그는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었다.
차라리 안재운 쪽에 붙을까도 고민하다가 섬뜩한 이창명 이사의 눈빛을 보자 그런 생각을 떨치고 말았다.
‘젠장 이 작자라면 날 감옥에 보내고도 남을 인간이란 것을 깜빡했어.’
* * *
안국호 부장 딴에는 나름 조심해서 최민혁 실장 쪽으로 오성 전자의 내부 정보를 흘렸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미 안국호 부장, 이창명 이사를 실시간으로 감시했다. 그들의 동선과 특이 사안에 대해서 말이다.
따라서 안국호 부장이 한 행동은 김명준 과장 보고를 거쳐서 고스란히 최민혁 실장 귀에 들어갔다.
“개판이네.”
최민혁도 설마 이창명 이사가 자신에게 정보를 흘릴지는 상상도 못했다. 자신이 내부 갈등을 부추겼지만 그게 그렇다고 이창명 이사가 다른 생각을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기획한 것보다 잘되기는 했는데,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나 다르지 않아.’
“우리 권태성 실장이 알고 싶은 것이 많은가 본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나.”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아뇨. 사람이 매사에 단호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참고만 있으면 그냥 호구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는 공격이 최고죠.”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런데 최민혁도 고민했다. 지금 상황은 자신이 예측한 판보다 더 완성도가 높았다. 괜히 잘못 건드려서 이 국면을 흔들 생각은 없었다.
“지금 오성 전자와 협상하는 정보 말입니다. 이걸 DL 그룹에 흘리죠.”
“DL 그룹과 오성 전자의 갈등을 부추길 생각입니까?”
“그렇게 되면 좋고요. 아니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두 그룹이 쉽게 칼부림을 할 것 같지 않으니까. 다만 작은 것이 모여서 결국 갈등을 키우게 마련입니다. 지금은 그 물밑 작업이라고 해두죠.”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권태성 실장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제 주변을 뒤지는 것 말인가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번에 한 번 권태성 실장의 능력을 봅시다. 과연 얼마나 진실에 접근할지 말입니다.”
김명준 과장조차 그 진실(?)이 뭔지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최민혁에게 질문했다.
“혹시 제가 그 사실을 알 수 없을까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크게 실망해서 어깨가 축 늘어진 김명준 과장을 보자 최민혁도 혀를 찼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천기(?)를 떠벌리다간 제가 박살 납니다.”
“…….”
천기 타령에 김명준 과장도 이제는 두 손을 다 들고 말았다.
‘가끔은 이해가 되다가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 * *
최민혁과 오성 전자의 협상 정보는 김명준 과장이 자연스럽게 DL 그룹에 흘렸다.
DL 그룹은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김상구 회장은 최용욱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항의했다.
[사돈어른,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미 암묵적으로 다 결정이 난 안건인데, 거기에 오성 전자를 끌어들인 겁니까?]
최용욱 회장도 뒤늦게야 상황을 확인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으음, 실무진 선에서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어차피 지분 27%를 다 인수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건 예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투자하기로 한 돈이 그냥 퍼주는 것인지 압니까?]
[저도 한번 내부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자세한 것을 알아보지 않았다. 이미 장승일 실장 통해서 손자 최민혁이 둘 사이를 저울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당연한 일이다.
아마 이전이라면 최민혁을 불러 진지하게 이 문제를 협상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이제는 손자 최민혁이 부담스러웠다.
장승일 실장이 평소와는 달리 이 문제를 단단히 지적했다.
“어차피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됩니다. 굳이 실장님을 자극해서 그나마 있던 이권을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속된 말도 저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최민혁 실장님은 회장님을 생각해서 적당히 챙겨준다고 봅니다. 지분 증여한 것도 있으니, 거기에 따른 보상일 겁니다.”
“그렇지. 지분 증여한 것도 있지.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상을 해줘야지.”
“그런데 괜히 최 실장님을 자극해서 그나마 있던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만 오성 전자는 그렇다고 해도 그 녀석이 김상구 회장을 싫어해?”
“정확히는 최훈열 전무를 싫어합니다. 그 배후에 있는 김상구 회장에 대해서도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김현탁 본부장에게 한 행동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긴.”
김현탁 본부장과 관련된 소동을 떠올린 최용욱 회장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최훈열 전무의 아내 김여정이 김상구 회장의 막내딸이다. 그러니 뭔가 있다고 해도 끼어들기에 어려웠다.
그런데 만약 김상구 회장이 배후에서 뭔가 했다면 최민혁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막상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이번 일도 그냥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설마 그 녀석이 그 항공 마약 사건도 결국 보복 차원에서 한 것일까?”
“틀림없습니다. 최 실장님은 당하고는 절대로 안 넘어가는 성격입니다. 이일태 이사 경우를 봐도 알 수 없습니다. 아주 사람을 밑바닥까지 떨어뜨려서 밟아버립니다.”
“흠.”
최용욱 회장도 쌓인 것이 많은 장승일 실장의 불만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옹호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번 일은 손자 최민혁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일단 KM 그룹 사정을 적당히 알린 후에 지켜보기로 했다.
김상구 회장 전화는 받지 않았다.
“김 회장 측과는 일단 거리를 둬. 다만 돌아가는 사정은 계속 조사해 봐. 민혁 그 녀석도 그런 것 가지고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회장님에게는 어떻게 할까요?”
“아직도 TRS 사업 정리 못 했지?”
“네. 그 법정 대리인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란 자가 지독한 것 같습니다. 아주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데, 법무 팀에서도 당황한 눈치입니다.”
“멍청하긴.”
최용욱 회장은 자세한 것까지 묻지는 않았다. 일을 제대로 처리 못 한 최문경 부회장의 무능함만 탓할 뿐이었다.
* * *
최민혁도 뒤늦게 KM 그룹 전략 기획실이 시끄럽다는 통보를 받았다. 심지어 장승일 실장의 전화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오성 전자에 넌지시 정보를 흘렸다.
조용히 뒤에서 뭔가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 예상과는 달리 권태성 실장이 임권수 부장과 황광수 차장을 동행한 채 KM 전자 기획실로 직접 찾아왔다.
“최 실장님, 정말 보자 보자 하니,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설마 DL 그룹과 경쟁을 부추길 생각을 한 겁니까?!”
예상 밖의 반응.
아마 정상적인 상태라면 권태성 기획실장이 저런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다. 지분을 원하는 사람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까지 최민혁에게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아니, 황태자 안재운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것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이번에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민혁 의도를 알기 위해서라도 직접 와서 부딪친 것이다.
최민혁은 느긋한 표정으로 오혜정 비서에게 마실 것을 내오라고 권유한 후에 흥분한 권태성 실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제가 오큘러스 지분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해도 그거야 당사자가 마음대로 지분을 팔 수 있어요. 그걸 일방적으로 오성 전자가 정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설마 우리 회사를 협박하는 겁니까?!”
분노한 권태성 실장은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최민혁의 반응을 보면서 끓어오른 감정을 가까스로 죽였다.
그는 오혜정 비서가 내온 냉수를 다 마신 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