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아무리 이들이 고민해도 최민혁의 속셈을 알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그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인 최용욱 회장은 도저히 최민혁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저히 이 녀석 속내를 모르겠군.”
“…….”
장승일 실장 역시 최민혁 실장이 의도적으로 이번 일을 만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추론했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다.
‘앞으로 이번 일 때문에라도 이제 회장님도 최 실장님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겠구나.’
애초에 지금 그들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최민혁이 원한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문경이는 뭐라고 해?”
“아직 자세한 것은 모르는 눈치입니다. 일전의 TRS 지분 매각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답답한 최용욱 회장은 결국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쯧, 그놈에게 연락해. 아니 이번 일은 내가 직접 가야겠어.”
“알겠습니다.”
* * *
KM 그룹 비서실에서 TRS 사업 매각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그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말겠지.
검토하다 보면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수십 개의 계열사를 관리하는 비서실이 또 헛소리하는 거지.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직접 이 일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한 이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실제로 비서실에서 검토한 후에야 이 사업의 진짜 문제점이 드러났다.
정확히는 휴대폰 사업에 대한 수익성이 빠르게 늘어난 시점에서 제대로 된 사업성 검토가 이루어졌다.
최민혁의 경고가 맞아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 이후로는 KM 그룹 비서실 분위기는 아주 달라졌다.
최문경 부회장은 안 그래도 아내 김이경의 압박 때문에 몸을 사리는 중이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는 결국 김이경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답이 황당했다.
“당장 TRS 사업을 정리해요!”
남자와는 달리 여자의 감수성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덕분에 TRS 지분 매각을 들여다봤다.
그는 당연히 지오텍 실무진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직접 이 사업 접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지오텍에서 현재 진척 중인 사안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생각처럼 간단하지가 않았다.
“이번 고속철도 무선 시스템 공급을 시작으로 국내 TRS 시장 공략을 본격적으로 나설 겁니다. TRS 서비스 자체는 한국 정부가 내년부터 적극 밀어주는 상황이라서 시기가 좋습니다.”
실제로 지오텍이 그리는 청사진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굳이 KM 그룹과 손을 잡은 것도 한국 시장 공략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다.
한국 공략 가능성을 내세워서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이스라엘에서 시범 테스트를 진행하면서 신뢰성까지 얻었다.
하지만 이건 좁은 시각에서 본 청사진이다.
한국 정부가 비록 서비스를 허락했다고 해도 그 청사진 자체가 엉터리였다.
“만약 이 사업을 접는다면 지오텍에서는 어쩔 생각입니까?”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우리 회사가 입는 손실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예상을 넘어선 지오텍의 극단적인 반응.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계약 파기가 어렵다는 것을 결론을 내린 권재홍 비서실장은 결국 부회장실에 가서 최문경 부회장 눈치만 봤다.
이번 일 보고 때문에 부회장실에 나타난 민상수 비서실 2팀장도 눈동자만 굴렸다. 실무진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빠도 너무 나빴다.
만약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다면 앞으로 그룹 신인도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다.
특히 앞으로 합작회사 설립에 대해 다른 기업이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볼 텐데, 이게 진짜 문제였다.
그런데 이미 합작회사를 다 세우고, 인력 채용까지 마친 상황이라는 점도 있다.
민상수 2팀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을 보면서 이 자리에서 빠지고 싶다는 시선을 보냈다.
결국 권재홍 비서실장이 나섰다.
“실상 중견 기업만이 아닙니다. LC 정보통신이 개발한 TRS 교환기, 중계기, 단말기 판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내 김이경과 장녀 최영란에게 시달린 최문경 부회장은 피로에 절었다.
“중국에 선적한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손실을 감수하고 계약해서 이루어진 계약입니다. 자신이 안고 있는 재고 물량을 8억에 다 팔아치운 겁니다.”
“고작 8억이라고?”
“정상적인 가격이라면 50억이 넘는 물량입니다.”
“아니 LC가 왜?”
“…그게 최근 말 나오고 있는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입니다.”
그랬다.
LC 정보통신도 뒤늦게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반응을 보고선 미래가 불투명한 TRS 사업을 슬그머니 손절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들은 심지어 지금까지 투자한 TRS 사업부를 아예 도려내는 구조 조정까지 진행 중이다.
TRS 사업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에 LC 정보통신 움직임을 아는 민상수 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LC 정보통신은 다른 중견 기업에 TRS 사업을 매각하는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습니다. 중소기업은 시장 규모가 작아서 TRS 사업을 하기에도 나쁘지 않습니다.”
TRS 시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딱 정해진 영역만 있다. 소방서, 경찰서와 같은 시장은 규모가 늘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니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끼어드는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맞지 않다는 소리군. 그걸 지오텍에서 모를 리가 없을 테니, 위약금을 걸고넘어지는 거고.”
“…네.”
TRS 사업 정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암초와 부닥친 것이다.
안 그래도 최용욱 회장에게 찍힌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조카 최민혁만 생각했다. 최민혁이 자신을 엿 먹일 생각이 없었다면 사전에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필이면 신규 인원 채용이 끝난 시점에서야 최민혁이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아주 외통수군.’
“손실은…….아, 됐다. 잠깐만. 민 부장은 그만 나가 봐.”
민상수 부장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잽싸게 부회장실에서 도망쳤다.
그 모습에 혀를 찬 최문경 부회장은 너무 분노해서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문득 이런 일이 이전에도 계속 반복되었고, 그 배후에는 반드시 최민혁이 관련이 있다는 것도 떠올렸다.
결국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민혁이 짓일까?”
독백하던 최문경 부회장은 이 엿 같은 상황으로 말미암은 스트레스 때문에 비틀거렸다.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자기 책임을 통감한 채 이를 악물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최민혁이 배후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제대로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고 최민혁을 탓할 수는 없다.
더욱이 TRS 사업을 검토하는 시점에서는 나쁜 계획이 아니었다. LC 정보통신조차 이 사업에 투자하고 있었으니까.
차이점이 있다면 LC 정보통신은 사업부 하나로 적당히 맛만 봤고, KM 그룹은 아예 합작사를 통해서 공동으로 밀어붙였단 점이다.
특히 후속 조치에서 LC 정보통신은 깔끔하게 사업을 정리해서 중소기업에 넘기면서 손실을 최소화한 반면에 KM 그룹은 그러기 힘들었다.
위약금 문제로 고민하던 최문경 부회장은 때마침 문을 벌컥 누군가 들어오자 버럭 화를 내려다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내가 아무도 들여보내지……. 어, 아버지?!”
최용욱 회장은 부회장실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장남을 구박했다.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아, 아닙니다.”
“TRS 사업 정리는 잘 되어가느냐?”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최용욱 회장도 아직 TRS 사업을 가지고 고민하는 장남을 보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오큘러스 프로젝트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려다가 일단 이 문제부터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주까지는 무조건 TRS 사업부터 정리해. 아니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지오텍과 협상해서 가닥을 잡아놔!”
다음 주까지 정리하라니.
지오텍 합작 법인 규모를 알고도 저런 말을 한다는 말일까.
최문경 부회장은 멍하니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면서 바로 대답하지 않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썩어 들어가는 장남 안색을 보자 다시 혀를 찼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지난 일에 대해서는 더 말 안 하마.”
“아,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 표정이 그제야 좀 나아졌다. 하지만 다시 표정이 바뀌었다. 지오텍이 진행하는 일을 보면 계약 파기 시에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더 하겠지?’
그는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말았다.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 봐.”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할 말은 많았지만, 최용욱 회장 반응을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빨리 사업을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상황이 너무 안 좋네.’
* * *
TRS 사업 정리를 위한 최문경 부회장의 행보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최용욱 회장의 지난 질책 이후에 처음으로 지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번 일만 깔끔하게 정리한다면 최용욱 회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러니 무리하게 일을 밀어붙였다.
이 일 때문에 KM 그룹 내부는 어수선해졌다.
당연히 이 사실은 최민혁의 귀에도 들어갔다.
TRS 사업을 가지고 장난쳤던 최민혁은 일이 생각보다는 더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에 만족했다.
“흥미로운 전개네요.”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ETRI와 오성 전자의 갈등이 의도대로 풀리지 않은 점을 떠올렸다. 뒤에서 작업을 치려고 했을 때는 이미 협상이 끝나고 난 다음이다.
‘권 실장을 너무 쉽게 봤어. 이번 일은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어.’
조성돈 팀장은 KM 그룹 본사가 최민혁 때문에 시끄러운 것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과 대립하는 최민혁의 입장을 알지만 말이다.
“이번 일 때문에 피해를 본 임직원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전 가능하면 이번 사업 정리가 조용히 끝났으면 합니다.”
“꼭 그렇지도 않아요. 뒤에 가서 사업 정리하게 되면 이 사업 때문에 뽑아놓은 직원을 다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갈 곳이 있을까요?”
TRS 사업과 다른 사업은 엄연히 다르다. 몇몇 대리급 직원은 경력을 인정받아서 비슷한 회사로 이직할 수가 있을 테지만 일반 사원들은 다르다.
아니,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차라리 다른 회사로 이직한 경우는 낫다.
그렇지 못한 직원은 처지가 더 애매했다.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LC 정보통신도 난리가 났다면서요?”
그는 차마 그 일도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원인이라는 점을 피력하지 못했다.
“하, 하지만…….”
“조 팀장님 마음은 저도 압니다. 그런데 경영자라면 아닌 길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진짜 임직원을 위한 길입니다.”
“…….”
조성돈 팀장은 복잡한 눈으로 최민혁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최민혁 이야기는 합리적으로 볼 때 맞는 이야기다.
다른 곳을 굳이 갈 필요가 없다.
지금 KM 전자가 그 경우였다.
콜린스가 대박이 난 덕분에 KM 전자 임직원의 몸값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오성 전자로 이직하면서 제대로 한몫 챙길 사람은 많았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추린 기획안을 읽어보다가 문득 이번 경부고속전철의 무선통신시스템 공급권에 KM지오텍이 제안서를 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건 뭡니까? 설마 벌써 국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겁니까?”
“지오텍 측에서 밀어붙인 것으로 압니다. 시작은 그들이 하고, 나중에 KM지오텍 인력이 그것을 받으면 되니까요.”
“상황이 벌써 이런 데 합작회사 설립을 접을 수가 있습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최민혁이 더 자세한 것을 파악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눈치챘다. 지오텍은 애초에 국내 시장에 들어오기 위해서 KM과 손을 잡았다. 굳이 KM 쪽 인력이 없어도 당장은 자신들 인력을 동원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뜻밖에 몇 건이 더 있었다.
최민혁은 안 그래도 ETRI와 오성 전자 대립이 김빠진 사이다가 된 것에 불만이 있었다. 잘만 하면 그 이상의 재미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오텍 말인데요. 혹시 이쪽에 아는 지인이 있습니까?”
“…지오텍이라면 예전에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거 좋네요. 조 팀장님이……. 아니죠. 괜히 조 팀장님이 나섰다가 장승일 실장이 알면 난리가 날 것 같네요. 으음, 이렇게 하죠. 차장급, 아, 그것도 좀 그렇고, 아, 정성근 대리가 좋겠네요. 정성근 대리에게 지오텍에 KM 그룹이 무슨 상태인지 넌지시 흘려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