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당혹스러워하는 조성돈의 팀장 표정에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당당하게 나서는 방안으로 한번 기획안을 천천히 만들어 보세요.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지시를 받았지만 곤혹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아, 그리고 이번 인력 조정에 대해서 본사 분위기도 한번 살펴보세요. 혹시라도 괜한 소리가 나올지 모르니, 사전에 대비하는 것도 좋겠죠. 할아버지가 오해할 수도 있고, TRS 사업 정리 때문에 머리가 아픈 우리 큰아버지가 그걸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네.”
* * *
KM 전자의 갑작스러운 인력 조정에 KM 그룹 기획조정실에서도 관심을 두고 들여다봤다.
아마 장승일 실장도 얼마 전이라면 이 문제를 알아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정보통신부의 움직임이 생각보다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부는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된 이해 당사자를 모두 불러 모아서 실무자 회의를 진행했는데, 이 자리에는 방송국을 비롯한 언론사마저 참석했다.
방송 콘텐츠와 관련된 실무자 미팅을 벌써 진행한 것이었다.
“하하하, 이렇게 빨리 이번 일에 대한 협의를 진행할 수가 있다니, 솔직히 믿기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그 정보통신부인지도 의문입니다.”
“저희 정보통신부는 디지털 위성방송을 원하는 시민의 요구를 충실히 따른 것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도 노골적으로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와는 달랐다.
정보통신부가 주도해서 이런저런 모임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한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 진행에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디지털 위성방송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특히 이제까지 소극적이었던 언론사와 방송사가 아예 콘텐츠를 정해서 내놓았다.
“위성 전담 콘텐츠에 대한 작업은 방송사 내부적으로 이미 검토가 끝났습니다.”
이 의견은 방송사 하나가 아니라 KBC, MBS, SBC를 포함한 메이저 방송사와 12개 주요 언론사가 공동으로 취합한 것이다.
위성방송 전담 콘텐츠를 내놓은 것은 이례적인 일 같지만 정작 그들이 원한 것은 오큘러스 프로젝트, 정확히는 위성방송 사업의 합작 법인 지분이었다.
“…저희가 원하는 지분은 크지 않습니다.”
슬쩍 던진 것은 각 방송사와 언론사의 지분 분할 안건이다.
다들 내심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었다. 이 사업에 콘텐츠 사업자가 빠지면 이 계획 자체가 진행될 수가 없어서 굳이 그들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해관계 때문에 미적거리던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번 모임에 참석한 국회의원조차 달달한 이권에 눈이 돌아갔고, 그들은 법안 제정에 적극 나서겠다고 주장했다.
“이미 관련 부처에서는 이미 법안 제정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늦어도 올 하반기 안에는 법안 심사가 국회에서 진행될 겁니다.”
이미 오큘러스 프로젝트 통해서 디지털 위성방송 채널은 뚫린 상황에서 콘텐츠가 바로 올라간다면 당장 수익성을 기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성 전자도 정신없는 협의 내용에 그저 지켜만 봤는데, 뒤늦게라도 손실에 대한 지분을 약속받은 것에 만족했다.
무궁화 위성 발사 이후에 진행되는 일에 대한 계획도 이전처럼 널널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다들 협의를 하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이렇게만 일을 했어도 일이 그따위로 돌아가지 않았을 텐데…….’
* * *
위성방송 사업 실무 회의가 끝난 후에 정보통신부에서 보고를 받은 오현종 박사도 최민혁 실장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이에 그는 시즈벨 한국 법인에서 찾아온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함께 만났다. 그는 양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가리킨 후에 오현종 박사 눈을 다시 가리켰다.
“지켜보겠습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채 한 걸음 물러났다.
“복잡한 지분 문제에 전 끼고 싶지 않습니다. 송한성 교수나 이동호 교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합작 법인의 지분 가치 평가가 간단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시즈벨에 그 지분 평가 문제를 다 넘겼습니다.”
“…아, 네.”
최민혁은 욕망으로 활활 타오르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이미 이사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지 않을 테니까. 아마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을 겁니다. 다만 호구로 생각하고 이용하려고 하다가는 문제가 될 겁니다.”
“후유, 알겠습니다.”
오현종 팀장도 자신이 프로젝트를 앞에서 주도한 덕분에 오성 전자에도 큰소리를 쳤지만, 최민혁 실장에게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오큘러스 프로젝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잘 알기 때문이다.
‘잘만 하면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위성 표준으로 채택될지도 몰라.’
실제로 최민혁이 뼈대를 만든 오큘러스 프로젝트 특허는 원래 위성 표준으로 잡혔던 것이다. 그것을 좀 더 보완하고, 발전시켰다.
그 의미를 알았기에 소심한 오현종 팀장도 박재호 실장을 쳐내는데 나섰다. 최악의 상황에선 ETRI 내부 알력 싸움에 퇴출당할 위기까지 감수했다.
그만큼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완성도가 높았던 것이다.
최민혁은 갈등하는 오현종 팀장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욕심은 적당히 내시죠. 앞으로의 일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디지털 위성 사업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알겠습니다.”
오현종 팀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대기업 법무 팀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최민혁 실장이 저러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시 쉽지 않구나.’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나서서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의 법정 대리인이 되자 지분 검토는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그는 일방적으로 자기 이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사업자의 제안까지 철저하게 검토를 시작한 것이었다.
오현종 팀장도 골치 아픈 문제를 벗어던지자 프로젝트 진행 속도를 더욱더 올렸다.
여기에 한국인의 속성이 작용했다.
빨리, 빨리, 더 빨리.
이미 최민혁이 만들어놓은 이상적인 위성방송 골격 덕분에 이전처럼 일이 늦어질 이유는 없었다. ETRI 위성 담당 연구원은 정말 미친 듯이 일하기 시작했다.
* * *
뒤늦게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KM 그룹 기획조정실은 비상이 걸렸다.
지속해서 회의를 계속했다.
기획조정실은 마치 군부대의 작전 상황실 못지않게 이 일을 심각하게 다루었다.
그들도 오성 전자와 ETRI 협상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두 회사 간의 이해관계는 간단히 해결할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짧아도 6개월, 적어도 1년 이상은 걸린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두 회사가 서로 한 걸음씩 물러나면서 타협해 버렸다. 아니 오성 전자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다.
장승일 실장도 뒤늦게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자 우선 최용욱 회장을 찾아갔다.
안 그래도 욕심 많은 김상구 회장 제안에 골치가 아픈 최용욱 회장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그렇게 중요해? 위성 사업은 자네도 부정적이었잖아?”
“물론 위성 사업이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가볍게 넘길 상황이 아닙니다. 애초에 정부는 대기업 자본의 참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최용욱 회장도 국가경쟁력 민간위원회 모임에서 말이 나온 이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정보통신부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대기업 상황도 달라졌다.
그들도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성 전자도 이번 모임에서 백기를 들었다. 오성 전자가 다 먹고 싶어도 정부에서 정한 대기업 배제 원칙 때문이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김상구 회장마저 욕망을 드러내는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오히려 불편했다.
“하지만 상황이 또 달라졌잖아. 돈이 되는 것이 뻔히 보여. 그 욕심 많은 대기업들이 쉽게 물러나겠어?”
“물론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정부 정책안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그 부분을 노리고 저희가 계속 로비를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허.”
최용욱 회장도 답답한 얼굴로 보고서를 몇 번이나 살피다가 채윤집 집사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채윤집 집사조차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었다. 그 역시 지난 모임에서 김상구 회장의 행동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건 우리가 무조건 잡아야 할 일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김상구 회장의 투자 제안에 미련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차라리 적당히 물러서는 것도 한 방법이라 봤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아직도 손자 최민혁이 무슨 수를 썼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민혁이 그 녀석이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관여한 것일까?’
“그래. 알아. 이젠 상황이 달라졌지. 하지만 경쟁자가 너무도 많아.”
“하지만 대기업은 정부 원칙 때문에 아무리 로비를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 같은 KM 그룹에게 더 좋은 기회입니다.”
“DL 그룹도 비슷한 소리를 하던데?”
장승일 실장은 놀라지 않았다. 중견 기업이라면 이번 일을 모른 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네? 설마 DL 그룹에서도 이번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김상구 회장 말로는 아주 작정을 했다고 했어. DL 정보통신은 이번 일 때문에 비상이니까. 아예 그룹 기획조정실은 작정하고 이번 일에 매달리고 있다나.”
“김상구 회장이라…….”
장승일 실장도 DL 그룹이 관심을 보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설마 김상구 회장 선에서 이 사업을 검토하는지는 처음 들어서 당황했다. 이 일은 그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통신망 사업에 DL 정보통신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힐끗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았다.
최용욱 회장 태도는 너무 소극적이었다.
“…혹시 이 사업을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최용욱 회장도 처음부터 본인이 이 일에 관여했다면 적극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인제 와서 복마전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겠나. 하지만 장 실장, 우리 KM 그룹이 김상구 회장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겠어? 아니 그 양반만이 문제가 아니잖아. 오성 전자를 비롯한 대기업 로비도 전방위로 이루어질 거야. 그들과 경쟁할 수 있겠어?”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장승일 실장도 일방적으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 역시 DL 그룹의 자금 동원력을 잘 알았다. 심지어 KM 전자의 경영권 분쟁에서 최훈열 전무를 부추긴 것이 DL 그룹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최용욱 회장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 탄식하고 말았다.
“ETRI 연구소가 이 정도 물건을 내놓을지 누가 알았겠나.”
ETRI의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두 사람에게도 충격이었다.
최용욱 회장이 다만 채윤집 집사 통해서 알아본 것만으로는 아직 최민혁 실장이 어느 정도 이 일에 관여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실무진 접대 때문에 나에게 이번 일에 대해 묻는 사람이 많아. 민혁이, 이 녀석은 이번 일과 깊숙이 관련됐을 거라는 소리가 파다해.”
“그건 틀리지 않습니다. 이미 장관급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부분 때문에 다시 조사를 진행 중인데, 아직까지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에 대해서 실장이 된 이후 행적을 잘 알았다.
“다만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 관계를 생각하면, 따로 투자하기는 했을 겁니다.”
최용욱 회장도 장승일 실장 이야기에 다시 기대했다.
“아니, 민혁이, 고 녀석이 밀어준 사업이라면 당당하게 나서면 되잖아. 왜 몰래 숨어서 그 쇼케이스를 열고 있는 거야?”
장승일 실장도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외부 압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가 있지만 여러 가지 압력이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가?”
“지금 송한성 교수 연구실은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난리입니다. 전화조차 안 될 정도이니까요.”
단순히 전화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대 인맥을 최대한 동원한 로비는 송한성 교수의 숨을 막히게 할 정도였다. 덕분에 송한성 교수는 이번 주 내내 연구 팀에게 전원 휴가를 줘버렸다.
장승일 실장은 자신이 조사한 내용과 추론을 토대로 지금 송한성 교수와 이동호 교수 주변 상황을 하나씩 말해주었다.
만약 이번 일에 최민혁이 관련이 있다고 해도 송한성 교수의 행동을 보면 누구라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최민혁이 원한 것은 MP3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