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35화 (235/1,021)

#235.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지시에 크게 당황했다.

“…어, 어떻게 하시려고요?”

“뭘 어떻게 합니까. 싸움은 더 부추기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지오텍이 조용히 있다가 뒤통수를 맞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조성도 팀장도 몇 번이나 최민혁 말을 곰곰이 생각해서 반박하려다가 차마 최민혁에게 말하지 못했다. 이번 일이 잘 풀리면 최문경 부회장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KM 그룹의 내부 갈등이 이제는 외부로 영역을 넓혀가는 상황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후유, 정말 큰일이다.’

* * *

조성돈 팀장은 정성근 대리를 조용히 불러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

보통 직원이라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정성근 대리는 무덤덤했다.

눈치 빠른 그는 왜 조성돈 팀장이 비밀리에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지 금방 깨달았다.

그 역시 다른 기획 팀처럼 TRS 사업을 둘러싸고 KM 그룹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자신의 역량을 너무도 잘 알았다.

더욱이 이번 일에 대해서는 KM 전자의 도움을 일절 받을 수가 없다.

최민혁이 원하는 것은 지오텍 문제에 KM 전자, 정확히는 최민혁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직원이라면 당황해서 이리저리 자문을 구할 테지만 정성근 대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이미 최민혁과의 유럽행에서 보고 배운 것이 많았다.

심지어 아는 인맥도 있었다.

그는 즉시 한국에 정착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다양한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정성근 대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호, 말씀해 보세요.”

정성근 대리는 굳이 최민혁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KM지오텍 이야기를 넌지시 하면서 KM 그룹 내부 사정을 말했다.

“…KM 그룹이 TRS 사업을 접으려 준비를 한다는 말이군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정성근 대리 역시 그런 점을 알아봤다.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오텍도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방적으로 사업을 정리하는 것은 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말인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처음에는 헷갈려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군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잠깐 정성근 대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데 정성근 대리는 자기 할 말만 하고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지?’

정성근 대리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침묵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하지만 이미 MP3 협상을 떠올린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뒤늦게야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 역시 최민혁이 KM 그룹의 승계 구도 때문에 말이 많다는 것은 한국 기사를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

굳이 자신에게 KM 그룹 내부 일까지 거론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의미였다.

‘방해하라는 건가?’

다만 최민혁 실장이 직접 나서지 않고, 굳이 왜 대리급 인사가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신기했다. 그것도 직접적인 이야기는 다 생략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최민혁 실장이 KM 그룹 뒤통수를 치는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스스로 구체적인 제안을 받았다면 그것을 명분으로 얼마든지 최민혁에게 이권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정성근 대리 모습에 웃고 말았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지오텍 쪽에 알아보죠. 안 그래도 그쪽과는 몇 가지 특허 때문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부분까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지요. 정 대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전 이만.”

그는 최민혁 실장과 협상장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참 신기한 친구야.’

* * *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한국에 와 있는 지오텍 야론 메이탄 이사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과거 잠깐 안면이 있는 사이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 비즈니스 때문에 몇 번 본 적이 있을 뿐이다.

“오, 제이미 이사님 아닙니까. 반갑습니다.”

야론 메이탄 이사도 겉으로는 반갑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환대했지만 내심은 달랐다. 그는 왜 갑자기 여기서 시즈벨 인물이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즈벨에서는 저희 기술에 관심을 두는 겁니까?”

“세상일은 바뀌게 마련 아닙니까. 요즘 뜨거운 지오텍 기술을 그냥 넘길 수는 없습니다.”

미국 지오텍은 FHMA라는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고 나스닥 상장까지 준비 중인 회사다. 이 회사는 이스라엘에서 상용 장비 시험 마무리까지 진행했다.

특히 차세대 안테나와 GPS 기능까지 구현해서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들은 모토로라보다 자사의 기술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국내 고속도로 통신시스템에 제안서까지 내미는 등 적극적이었다.

실제로 경쟁사인 오성 전자를 비롯한 에릭스, 모토로라만 봐도 외관상 나쁘지 않았다.

지오텍은 정말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야론 메이탄 이사의 표정은 최근 지오텍의 행보와도 관련이 있었다.

“KM 그룹과 합작회사까지 설립했습니다. 일단 한국 시장을 석권한 후에 아시아 전역으로 영업을 확대할 겁니다.”

자랑질에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사실 저희 시즈벨에서도 지오텍에 대해서 몇 가지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FHMA 기술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KM 그룹은 좀 생각이 다른 것 같더군요.”

“네? 무슨 말입니까?”

“저런 그쪽에서 TRS 사업 철수를 검토 중인데, 모르셨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HY 전자에서도 우리 회사의 시스템 공급을 이야기하는 중인데, 그게 말이 됩니까. 아니 KM 그룹이 뭐가 아쉬워서 이 사업을 접는다는 말입니까?”

사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TRS 서비스는 내년이면 전국 사업자나 지역 사업자의 상용 서비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미 시험 장비 세팅까지 마친 상황이니, 이 일의 진행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몇 년 후에 TRS 가입자가 50만 명을 넘을 예정이니, 시장 잠재력이 나쁘지는 않았다.

지오텍이 특히 노리는 곳은 한국 물류업체다.

이를 위해서 고속도로 시스템 사업에 제안서를 낸 것이니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역시 정성근 대리를 통해서 암묵적인 지시를 받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TRS 사업 자체가 참 애매해. 하지만 망할 사업은 결코 아닌데, 내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을까?’

과거 이탈리아에서 만나 협상에 임한 최민혁 얼굴을 떠올리자 곧 의혹을 떨쳐 버렸다.

그 교묘한 수작을 부리는 최민혁.

지금도 따지고 보면 그 연장선이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고서야 이 일을 이렇게 할 수는 없어.’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알고 싶은 부분이니까.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KM 그룹도 뭔가 근거가 있으니, 그런 행보를 보이는 것일 테니까.”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아니 제가 확실치도 않은 정보를 가지고 이 자리에 올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필요하다면 제가 이번 일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별다른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물러나고 말았다.

야론 메이탄 이사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행동에 화가 났다. 새삼 지난 만남에서 시즈벨이 보인 행동을 떠올렸다. 시즈벨은 차세대 기술이 있는 곳이라면 빠지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냥개였다.

그럼에도 쉽게 시즈벨을 떨치지 못한 이유는 이해관계 때문이다.

‘저 새끼가.’

* * *

야론 메이탄 이사도 설마 하면서도 일단 KM 그룹의 사정을 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이미 TRS지오텍KM 본사 건물까지 마련한 마당에 일을 진척시키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번에 신규로 뽑은 인원을 그냥 내버려 뒀다.

워낙에 조용히 진행된 일이라서 야론 메이탄 이사도 뒤늦게 확인하고서야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굳이 한 걸음 더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KM 그룹 내부 소식망을 통해서 정말 사업 정리 수순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야론 메이탄 이사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국내 시장은 지오텍이 나서서 시장을 만들어서 가져다 바치는 모양새다.

그 기반을 갖추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다니.

그는 즉시 미국 본사에 알렸다.

그리고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제안도 말이다. 당연히 지오텍 본사에서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내세우는 점에 공감했다.

지오텍 역시 이번 일을 직접 처리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렇다면 시즈벨이라는 사냥개를 동원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이라 본 것이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야론 메이탄 이사와 계약을 끝마치기 무섭게 KM 그룹을 쳐들어가서 지오텍KM 합작사 설립이 늦어지는 점을 추궁했다.

그 과정에서 KM 그룹이 사업을 재검토한다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소송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흥, 당신들은 계약을 아주 우습게 아나 봅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서 지오텍이 본 피해를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을 겁니다. 당장 미국 법정에 7억 달러 배상금 규모의 소송을 진행할 테니, 각오를 단단히 하세요!”

“……?!”

권재홍 비서실장은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영문을 몰라서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뭔가 말하려고 했을 때 이미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떠나고 말았다.

* * *

KM 그룹에서는 갑작스러운 지오텍의 태도 변화에 난리가 났다.

최문경 부회장조차 방법을 찾지 못해서 전전긍긍할 때 다시 찾아온 최용욱 회장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게……. 후유, 지오텍에서 위약금을 걸고넘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법정에 소송까지 하겠다고 협박하는데, 답이 쉽지 않습니다.”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는 최용욱 회장은 일방적이었다.

“손해를 봐도 좋으니, TRS 사업은 빨리 정리나 해.”

“건물이나 신규 채용 인원 정리도 문제입니다.”

“그건 다른 대안으로 가자.”

뒤따라 들어온 장승일 실장이 슬쩍 오큘러스 프로젝트 사업성 기획안을 최문경 부회장에게 넘겼다.

최문경 부회장은 잔뜩 화난 얼굴로 장승일 실장을 쳐다본 후에 보고서를 살폈다. 당연히 그는 곧 침묵하고 말았다.

그는 TRS 사업 검토 때문에 당연히 이 디지털 위성 사업에 대한 것을 보고받았다. 그런데 그 보고서와 지금 보고서는 너무 달라서 크게 당황했다.

특히 놀란 점은 정보통신부가 마치 사기업인 것처럼 사업에 적극적이란 점이다.

‘이게 뭐야?’

아마 여기에 최용욱 회장이 없었다면 장승일 실장 멱살을 잡고 난리를 쳤을 것이지만 차가운 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차마 이 일의 배후에 최민혁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까지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다. 김상구 회장의 대규모 투자 제안은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부회장 생각은 어떤가?”

“…이건 잘못된 정보입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이 위성 사업은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지. 지금은 달라.”

“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정보통신부 인간들이 어떤 인간인데, 이렇게 빨리 일을 진척시킬 수가 있습니까. 아니, 오성 전자는 그냥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다는 말입니까?”

최용욱 회장도 정보가 너무 느린 장남의 말에 혀를 찼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의 저런 모습이 지오텍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더는 최문경 부회장을 압박하지 않았다.

“그 대단한 오성 전자도 이번에는 ETRI에 꼬리를 내렸어. 손해를 감수하면서 물러났으니까. 아마 정보통신부도 그런 점을 고려해서 오성 전자를 챙겨주는 것은 있겠지.”

“서, 설마 벌써 합의가 끝났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최용욱 회장은 지난 모임에서 있었던 김상구 회장의 투자 제안까지 굳이 이 자리에서 말하지는 않았다. 지금 말해봐야 그나마 조용히 있던 자식이 또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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