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최두진 사장 속마음을 모르는 김현우 수석 부장은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최 실장에게 그렇게 당해도 분하지도 않습니까?!”
“당해도 내가 당해. 네놈이 신경을 쓸 일이 아니야!”
“아뇨. 아버님 재산과 관련된 일인데, 제가 어떻게 무시하겠습니까?”
“지랄한다.”
“제가 재산을 상속해 달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저히 옆에서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렇게 나선 것뿐입니다.”
최두진 사장은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자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야?”
“당연히 소송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당시 콜린스가 발표되기 전에 아버지 지분을 최민혁 실장이 얻은 것은 이미 회사 가치를 알기에 한 행동일 뿐입니다.”
“고작 그게 다인 줄 아느냐?”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최두진 사장은 잠깐 망설이다가 민기식 고문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민기식 고문 변호사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서류를 들고 돌아와서 그걸 김현우 수석 부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보면 알 거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김현우 수석 부장은 서류를 살피기가 무섭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자신이 이제까지 했던 모든 불법 행위에 관한 증거 서류였다.
만약 이 서류가 검찰에 넘어갔다면 최하가 징역 5~6년 형은 나올 만큼 충격적인 증거였다.
“……!”
경악한 김현우 수석 부장은 그제야 아버지와 최민혁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두고 타협을 봤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악독한 새끼가.’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최훈열 전무가 구속된 것과는 달리 자신은 별다른 태클을 받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이 일 때문에 꽤 불안했고, 최민혁에게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 제안에 따라서 STB 사업부 매각과 동시에 오성 전자로 이직한 것도 다 최훈열 전무 꼴을 당할까 염려해서 였다.
하지만 최두진 사장은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최 실장이 그걸로 날 협박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네놈이 회사에 입힌 손실을 보여 주며 말을 하더라. 최훈열 전무 그놈이 똥고집으로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콜린스가 묻힌 것에도 따지고 보면 네놈이 지대한 역할을 했지.”
지시는 물론 최훈열 전무가 내렸다.
다만 안산 공장에 내려가서 행패를 부린 행동 대장 역할을 한 사람이 김현우 상무다.
그는 최훈열 전무 백만 믿고 온갖 패악질을 다 부렸던 것이다.
‘씨발.’
김현우 수석 부장은 그제야 최병연 부장 퇴출과 관련된 일을 떠올렸다. 당시 콜린스 개발을 주도한 최병연 부장을 퇴출하는 역할을 한 것이 자신이었다.
따지고 보면 최민혁은 그저 자신들 때문에 중단된 최병연 팀장의 프로젝트를 다시 재가동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중요한 일은 최민혁이 결정했지만 말이다.
그야말로 희망 고문.
이미 다 잊었던 일이다.
돌아보면 김현우 상무도 최민혁 실장처럼 콜린스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게 다 자기 것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자 분노가 다시 폭풍우처럼 치밀어 올랐다.
울화가 치민 김현우 수석 부장은 자기 가슴을 탁탁 쳤다.
호흡이 잘되지 않았다.
김현우는 최민혁에 대한 원한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왜, 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저에게는 말씀해주셔야 했지 않습니까?!”
“과연 내가 말한다고 네놈이 들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아버지 그래도 이건 제 일입니다!”
“꼭 그렇게 보기도 힘들어. 널 KM 전자에 앉힌 사람이 나니까. 망해가는 KM 전자 모습을 볼 때 마다 나도 네놈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입을 딱 벌린 김현우 수석 부장은 멍하니 아버지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온갖 감정이 지나갔다.
아들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 최두진 사장은 가만히 자식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민혁, 이놈 정말 무섭구나.’
하지만 다시 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그때는 제가 정말 미쳤습니다. 과거 한 일은 순순히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KM 전자 주식을 고작 1,500원에 넘긴 것은 정말 말이 안 됩니다. 설마 최민혁 실장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겁니까?!”
집요한 아들 주장에 최두진 사장도 혀를 찼다.
“좋다. 그렇다고 하자. 도대체 왜 날 보고 그렇게까지 하란 소리야?”
“이일태 이사 때문입니다.”
“아니, 거기서 이일태 이사 이야기는 또 왜 나와?!”
김현우 수석 부장은 그제야 오성 전자와 ETRI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감 없이 말해주었다.
“솔직히 저도 지난 일을 두고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최두진 사장조차 묵묵히 듣고 있자니 기가 찼다. 이야기가 계속 되는 동안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다가 버럭 소리쳤다.
“…그거 이창명이란 놈이 일을 벌였다면서? 설마 날 보고 최민혁 만나서 그놈의 일을 덮으라고 압력을 넣으란 소리냐?!”
“저도 소송 들어가면 이기기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겁니다. 거기에 아버지도 이미 대안이 있겠죠. 설마 이대로 당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내 일은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냐. 다만 이일태 문제만큼은 한번 말해보마. 그것이면 되냐?”
“네. 저도 더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최두진 사장은 떠나는 김현우 수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하지만 지금 있는 자식들도 문제인데, 김현우 수석 문제에 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용욱이 이야기로는 안 회장이 현우 일을 거론한 것 자체가 나에게 경고라고 하니까.’
그는 힐끗 고민에 빠진 민기식 고문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때?”
“저야 사장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내부적으로 검토한 바로는 최 실장에게 소송 걸면 이기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도 없습니다.”
KM 전자 주가가 2~3만원 정도였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무려 8만 원대까지 폭등하자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소송에서 일부 승소만 해도 무려 수백억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 민혁을 고소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어. 그런데 막상 KM 전자 변화를 보니,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네. 지금 있는 지분 6%만으로도 과거 지분보다 이익이 더 크니까.”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최두진 사장이 보유한 KM 전자 지분 가치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KM 전자 주식 가치가 몇 배나 더 높았다.
아니 이대로 간다면 KM 산업 지분 가치보다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최두진 사장도 이전에 마음먹은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2만 원대에 5만 주를 확보해서 재미를 단단히 본 민기식 고문 변호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는 합니다. 다만 뒤늦게 획득한 지분 1% 평균 매입가가 3만원대라서 아쉽습니다.”
“그래도 거의 3배야. 그리고 지금 KM 전자 주가 상승세를 봐서는 더 올라.”
“그렇기는 합니다, 그런데 과연 최민혁 이사가 과연 이일태 이사를 내버려 둘까요. 아주 작정하고 일을 벌인 것 같은데요?”
“차라리 좋은 명분일 수도 있어. 어차피 지난 일에 대해서는 적당히 이야기해야 하니까. 더욱이 민혁 그놈이 KM 그룹을 노린다면 나머지 KM 그룹 계열사 지분을 원할 거야. 특히 KM 산업 주식을.”
“아, 확실히 그게 문제군요.”
“좋아. 자네도 별다른 의견이 없는 것 같으니, 민혁 그놈에게 한번 연락해 봐.”
“알겠습니다.”
* * *
최두진 사장은 최민혁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최민혁은 자신의 전화에도 크게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엉덩이가 무겁다고 알려진 자신이 이렇게 외부로 나가는 경우는 드무니까.
KM 전자 입구를 오가는 임직원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대화를 나누는 임직원의 모습은 마치 활화산처럼 활기에 넘쳤다.
[최 실장님이 결국 그룹 후계 구도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소리가 파다해.]
[당연한 거 아냐. 실장님이 쌓은 실적을 봐. 아무리 회장님이라도 해도 이제는 최문경 부회장을 일방적으로 밀 수는 없어.]
[하지만 이제 고작 최 실장님 나이는 이제 고작 20살인데, 너무 빠르지 않을까?]
[그게 좀 그렇지.]
20살에 KM 전자 기획실장이 된 것도 좀 과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최민혁이 이제까지 한 실적 때문에 그 사실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실제로 오가는 임직원 대부분은 최민혁이 KM 그룹을 승계받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KM 전자에 대한 미래는 장밋빛 전망뿐이었다.
최두진 사장은 역동하는 KM 전자 임직원의 뜨거운 열기에 깊이 감명받았다.
KM 전자는 잘 나가는 회사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보여주었다. 특히 복장 자율화에 따른 직원들의 자유로운 복장은 마치 미국 회사 분위기를 떠올리게 해서 오가는 사람마다 KM 전자 분위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요즘 뜨거운 오혜정 비서.
“과연 국민 비서, 국민 비서 하던데, 정말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녹차를 가져 왔다가 꾸벅 허리를 숙이는 오혜정 비서는 확실히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민기식 고문 변호사조차 실장실에 오는 중에 본 KM 전자 여직원의 놀라운 미모에 빠져 있다가 오혜정 비서를 보고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민혁도 민망했다.
“제가 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둘째 큰아버지가 뽑았던 이들이죠.”
‘스카우트까지 했으니까.’
“훈열이 그놈이 뽑았다고?”
“네.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만…….”
“흠.”
미스코리아 이야기를 들은 최두진 사장도 문득 아들과 관련된 사건을 떠올렸다.
바로 김현우 수석 부장의 전 비서였던 오수연과의 일이다.
최두진 사장은 굳이 자세한 내막을 듣지 않아도 왜 KM 전자 비서진이 저렇게 미인인지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도 최민혁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을 깨달았다.
‘이창명, 그놈도 결국 오혜진 비서에 미쳐서 날뛰었다고 했던가?’
정신을 차린 민기식 고문 변호사 역시 뒤늦게야 모든 사태의 한 원인을 차지한 것이 KM 전자 여비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두진 사장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내가 다 미안하군.”
최민혁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아니, 요즘 와서 이것도 괜찮더군요.’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뭐, 다 지난 일입니다.”
“하지만 인사를 사적으로 악용한 행위는 용납하기가 쉽지 않아.”
실제로 심각한 문제다. 최훈열 전무나 김현우 상무가 인사권에 칼자루를 마음대로 휘두른 덕분에 피해를 본 사람이 수백 명이 넘었다.
최민혁은 시작부터 자신이 괜찮은 수를 뒀다고 판단하자 느긋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혜정 비서를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둘째 큰아버지 여자 보는 눈이 참 높아.’
“어차피 오혜정 비서 광고 덕분에 회사 차원에서는 재미를 단단히 봤으니까요. 다음 광고로 아예 비서실 여직원을 동원한 프로젝트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우리 김현우 상무가 만든 문제도 다 해결될 겁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네.”
“지난 일은 문제가 있었지만, 어차피 모두 좋게 끝났습니다. 그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미 보상도 다 했으니까.”
“가만 그러면 오혜정 비서도 이제 연예계 쪽으로 떠나는 건가?”
“아뇨. 본인이 남아 있겠다고 해서 그대로 뒀습니다.”
“그런가?”
최두진 사장도 일반 직장인보다 연예인이 훨씬 났다는 것을 잘 알기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무실을 나서는 오혜정 비서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최민혁 얼굴을 다시 살폈다.
굳이 자세한 것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오혜정 비서가 최민혁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금방 깨달았다.
물론 최민혁의 얼굴을 봐서는 오혜정 비서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놈이다.’
최민혁은 따가운 최두진 사장 시선에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연락하셨다면 제가 직접 사장님 사무실을 찾아갔을 텐데, 바쁘신 어르신이 왜 갑자기 본사를 방문하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