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94화 (194/1,021)

#194.

“뭐 겸사 겸사지. 명색이 KM 전자 지분 6%를 소유한 대주주 아닌가. 그러니 회사 경영 상황도 한번 살필 겸 해서 나온 거네.”

최민혁은 이미 최두진 사장의 행보를 염두에 둔 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까?”

“쯧, 걱정하지 말게. 지난번에 가지고 있던 KM 전자 지분을 판 일에 대해 따질 생각은 없어. 내가 그걸로 문제 삼을 생각은 없네.”

“…네.”

최민혁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충분한 대비를 했다고 해도 지난 지분 매각을 사기죄로 걸고 가면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설사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고 해도 정황상 지금 8만 원 KM 전자 주식을 1,500원대에 매입한 것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50배 차이가 나니, 속이 쓰린 것은 사실이야. 자네가 지분 매각 협상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난 지분을 절대 팔지 않았어.”

실제로 최두진 사장은 자신이 들고 있는 KM 지분 중에 단 1주라도 이제까지 판 적이 없었다. KM 전자 지분을 넘긴 것이 처음이었다.

이런 정황도 소송에서 최두진 사장에게 유리하게 작용될 수밖에 없었다.

“…….”

최민혁도 ‘50배’란 말에 굳이 변명하지는 않았다. 만약 이게 문제가 된다면 당시 최훈열 전무, 김현우 상무가 벌인 모든 KM 전자의 콜린스에 대한 사연을 대중에게 다 폭로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지분 매각 협상을 언론이 알면 난리가 날 거야.’

1,500원에 매입한 주식 가치가 80,000원이었으니, 잘잘못을 떠나서 질투하는 이들은 최민혁을 맹렬하게 마녀사냥할 것이다.

최두진 사장도 냉랭한 최민혁의 표정을 보자 혀를 차면서 굳이 더 압박하지 않았다. 그는 슬쩍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우한테, 오성 전자 일을 들었네. 거기 ETRI도 관련이 있던데, 아마 이일태 이사 때문이겠지. 그, 자네가 노리는 목표 말이네.”

“글쎄요.”

최민혁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최민혁도 설마 여기서 이일태 이사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일단 표정 관리.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함세. 이번 일은 적당히 덮는 게 어떤가?”

“이건 그렇게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일태 이사가 지금까지 한 모든 실적이 오성 전자 덕분에 다 날아갈 상황입니다. 이사라면 모름지기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제가 허락해도 오성 전자 측에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오성 전자가 적당히 타협을 볼 거네.”

“이창명 이사가 말입니까?”

“그쪽에서도 KM 전자를 상대로 진행한 일을 다 없던 걸로 할 거야. 그러니 더 문제를 만들지 말고, 이 정도로 끝내세. 대신 지난 지분 매각 건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거론 않겠네.”

“흠.”

최민혁도 사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서 고민에 빠졌다. 지난 지분 협상은 회사 내부 정보를 이용했다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김현우 상무가 오성 전자에서 부활한 것과 관련이 있나 보군.’

물론 그는 단순히 이일태 이사 일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번 일을 그냥 넘겨서 일방적인 손해를 볼 수는 없습니다. KM 산업 지분을 넘긴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최두진 사장도 이 제안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미 최민혁이 KM 산업 지분을 노리리라는 것은 예측했기 때문이다.

“…자네도 경영권 승계 싸움에 끼려는 건가?”

“그런 것보다는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 때문입니다. 날파리처럼 계속 절 귀찮게 하는데, 이번 기회에 보험이라도 마련할까 합니다.”

“하지만 KM 산업 지분 넘기는 것은 당장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가 없어. 지분이라면 더욱이 자네 할아버지 허락이 있어야 해.”

“압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마냥 반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지금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은 계속 할아버지 경고를 무시하는 중입니다.”

‘지금으로서 할아버지도 아마 KM 산업 지분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넘겨주라고 할 겁니다.’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최민혁은 방긋 미소 지었다.

“대신에 괜찮은 조언도 한 가지 해드리죠. 아마 최두진 사장님께서는 모르기는 해도 수천억 이상의 이익을 볼 겁니다.”

아마 과거였다면 최두진 사장도 헛소리하지 말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민혁 입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최민혁의 행보는 실상 한국 재계에도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요즘 와서는 그 행보가 워낙 파격적이었다 보니 최용욱 회장이 배후라는 설이 있지만 아는 이들은 최민혁이 스스로 만든 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 피해 당사자인 최두진 사장이 최민혁 능력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게 뭔가?”

최민혁은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 내용은 일단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건방진 최민혁 행동에도 최두진 사장은 아무런 말없이, 예상을 벗어난 최민혁 제안에 고심했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최민혁이 저렇게 자신할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이미 자신이 매각한 KM 전자 지분이 8만 원까지 오른 것을 봤지 않는가. 솔직히 사람인 이상 배가 아프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알겠네. 하지만 자네 할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힘드네.”

“저도 거기까지 바라지 않습니다. 일단 이야기만 해보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 겁니다.”

“좋네.”

* * *

“선 인수 후 정산이란 특이한 형태 인수 배후에도 정부가 입김을 넣었다고?”

대답하는 장승일 실장은 힐끗 최동영 상무와 KM 건설 사장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안색은 정말 좋지가 않았다.

지난 사장단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 때문에 불려온 터라 장승일 실장은 그저 눈치만 봤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차가운 최용욱 회장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관행적으로 부실기업을 정리할 때는 정부가 주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한부 그룹의 우원 건설 입수 과정은 그동안의 관행과 달리 겉으로만 보면 민간 기업이 자율적으로 처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우원 건설의 막대한 부실을 주거래은행이 떠안아야 한다.

정부는 은행 자율에 맡겼다고만 주장하면서 한걸음 물러났다.

오히려 정부는 이번 사례가 앞으로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좋은 모델이라고 선전했다.

이번 한부 그룹의 우원 건설 인수는 계약을 먼저 체결한 후에 공동 경영과 자산 실사를 거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생기는 지급보증도 은행이 다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 기가 막히네. 은행장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거야?”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 행동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보고서만 읽었다.

“주거래은행 내부 실무진도 처음에 이번 협상을 무조건 반대했다고 합니다.”

“외압이 있었다는 소리인가?”

“네.”

“설마 청와대인가?”

“아닙니다. 증거는 없지만,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오성 전자의 권태성 기획실장이 손을 쓴 것이 아닌가 추론하고 있습니다.”

“아니 거기 오성 전자가 왜 나와!”

장성일 실장은 KM 그룹 계열사 예를 하나씩 들면서 자금 지원이나 아니면 술술 풀려가는 상황을 하나씩 예를 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일에 알게 모르게 오성 전자의 입김이 다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

오성 전자는 놀랍게도 KM 그룹 계열사가 의도적으로 방만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계속 부추겼다. 대부분의 일이 수익성이 그렇게 높지 않고, 자금이 많이 든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최용욱 회장조차 황당한 얼굴을 한 채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안건민 회장이군.’

현재 KM 그룹의 차입금 계획은 완전히 백지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성 전자가 다양한 수법으로 그와 비슷한 작업을 물밑에서 만들고 있었다.

최용욱 회장은 힐끗 경악한 최동영 상무를 쳐다보았다.

“동영아, 할 말이 있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베트남 건설 공사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설사 오성의 입김이 있었다고 해도 잘만…….”

조용히 보고서만 읽던 장승일 실장이 냉큼 끼어들었다.

“하지만 요즘 동남아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의아한 눈으로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베트남 경제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는 소리야?”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장승일 실장은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의 외화 보유액과 경제 사정에 대한 KM 보고서 분석안을 내놓았다.

“…이건 민혁이 그놈이 했던 주장이 아닌가?”

“기획 조정실에서는 지난 KM 전자 보고서를 토대로 다시 재검토를 시작했고, 거기에는 동남아 역시 포함됩니다. 사실 이걸 조사할 때 까지만 해도 설마 그렇게 될까하고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상한 징후가 계속 포착되었습니다.”

그랬다.

최민혁이 선동한 KM 그룹 보고서를 대부분 사람은 다 잊었다.

하지만 KM 그룹 기획 조정실은 다시 꾸준한 재검토와 수정 작업을 병행했다.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의 행보를 보면서 최민혁이 한 주장이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서 다른 사람과는 달리 지속해서 관찰했다.

사실 이것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최민혁이 입을 잘 열지 않아서다. 그나마 최민혁의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 이 보고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이상 징후를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동남아 각국에 관한 조사는 면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과거 KM 그룹을 뒤흔들어 놓은 KM 전자 보고서가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서서히 실현되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우원 건설과 한부 그룹을 쿡 찍어서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수정 보고서를 토대로 검토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굳이 이번 우원 건설과의 컨소시엄을 반대한 겁니다.”

“…….”

최동영 상무도 입을 살짝 벌린 채 KM 보고서 수정안을 멍하니 읽어 내려갔다. 그 역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서 이 KM 보고서로 가장 이익을 본 사람이 최민혁이라서 이 보고서를 만든 사람이 최민혁이 아닐까 하는 얘기가 내부에 파다했다.

그런데 작금에 와서 그 보고서의 의미를 보자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설마.’

최용욱 회장 역시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으음, 이건 진짜 놀랍군. 동영아, 할 말이 더 있느냐?”

“…아, 아닙니다. 장 실장님, 이 보고서를 가져가도 됩니까?”

“네. 다만 외부 유출을 하시면 안 됩니다.”

최동영 상무와 KM 건설 사장은 KM 보고서 수정안을 살피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KM 전자 매각안과 관련해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상황 때문이다.

거기에는 KM 그룹 계열사에 대한 분석도 일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KM 건설이었다.

당시 허황한 보고서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넘겼는데,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다.

때마침 이곳을 방문한 최두진 사장은 안으로 들어가다가 패닉에 빠진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또 무슨 일이라도 터진 거야?”

“아닐세. 두 사람은 이만 가봐. 가서 다시 재검토해 봐. 아니 KM 건설이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를 다시 살펴. 손해를 봐도 좋으니,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정리해.”

“…알겠습니다.”

최두진 사장은 최용욱 회장 서재 안에 놓인 소파에 풀썩 앉은 채 영문을 몰라서 눈만 끔뻑거렸다. 서재 분위기가 너무 심각했다.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집안일이니, 자네가 신경 쓸 것은 없어.”

“나 참, 이 집안은 대주주를 왜 이렇게 괄시해?”

최용욱 회장도 흠칫 놀랐다가 뒤늦게야 최두진이 공동 사업자 이전에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말이야. 사실 자네도 KM 전자 보고서에 관한 이야기를 알 거야. 그런데…….”

최두진 사장도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최용욱 회장 이야기를 들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입이 벌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특히 최민혁과 관련된 부분에 가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민혁이 대단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하다 싶었다. 무슨 마술을 부려 예언서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놈이 분명히 수천억 가치의 조언이라고 했어. 절대로 허튼 소리가 아냐.’

최두진 사장은 그제야 최민혁이 한 제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최두진 사장은 언제 말을 꺼내면 좋을지 최용욱 회장 눈치를 봤다. KM 산업 지분을 넘기는 것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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