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하지만 그 표준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LC 전자는 반박했다.
“그 표준이란 게 오성 전자에게 만든 것을 기준으로 삼을 거라면 시작도 하지 마세요.”
“하지만 오성 전자에서 개발한 제품이 현재로서는 가장 현실성이 높습니다. 효율도 높고, 문제점도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일방적으로 오성 전자를 밀어주는 박재호 실장의 행동은 다른 이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는데, 오성 전자에 돈을 받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 실장, 당신을 고소할 겁니다!”
“진정 좀 하시죠. 얼마든지 협상을 통해서 여러분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닥쳐!”
LC 전자를 비롯한 다른 업체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박재호 실장은 교묘하게 그 부분을 이용해서 따로 미팅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KM 전자를 배제하는 쪽으로 타협을 봤다.
“···설마 오성 전자에서 KM 전자를 노리고 이 작업을 한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창명 이사 쪽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기술특허사용료와 같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협상을 봤습니다.”
“그렇다면야······.”
갑작스러운 오성 전자의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금 번거롭다고 해도 차라리 오성 전자에서 내놓은 공동 표준을 따라서 작업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로열티 문제만 해결된다면 말이다.
더욱이 다른 대기업 제품을 모두 표준에 반영하되 KM 전자만 따돌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의견에 LC 전자도 마지못해서 찬성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흠, 박 실장님이 그렇게까지 한다면 우리 LC 전자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프랑스 톰슨 멀티미디어 때문에 열받아 있던 대운 전자는 당연히 찬성했다.
“괜한 오해를 했지 않습니까. 사전에 미리 말했다면 굳이 우리가 이렇게 소란 피울 이유도 없었습니다.”
두 대기업이 손을 들어주자 자연스럽게 다른 기업도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이 끝나자 뒤늦게 참석한 이창명 이사는 그들의 갈등을 살피면서 그제야 히죽 웃었다.
‘최 실장, 이 새끼 한번 죽어 봐라.’
***
최민혁도 인생 1회차 일을 꽤 많이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인식 범위 밖의 일까지는 몰랐다. 이일태 이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일태 이사가 결국 KM 전자를 그만둔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확한 내막은 잘 몰랐다.
이와 연결된 오성 전자의 행보는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오성 전자의 공동 표준 이슈는 정확히 몇 달 후에 터지는데, 이것 때문에 KM 전자의 위성 사업부는 큰 타격을 받고 말았다.
오성 전자가 KM 전자를 압박할 용도로 진행한 일이었다.
결국 위성 사업부에서 진행한 일은 시간이 갈수록 별다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오성 전자가 다른 대기업과 손을 잡고 방향을 바꾸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그나마 오성 전자와 타협한 중견 기업은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은 손실을 보고 손을 떼야만 했다.
물론 소송을 건 업체도 있었지만, 오성 전자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외압에 시달리던 최훈열 전무는 이 사태에도 오성 전자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었다.
조성돈 팀장도 처음에는 최민혁이 먼저 분란을 일으켰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성 전자가 이미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자 혀를 내둘렀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몰랐습니다. 설마 오성 전자가 내부적으로 꼼수를 부릴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오성 전자의 계획을 알지 않고서야 지금까지의 일은 설명하기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최민혁 스스로도 감탄했다.
“제가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자도 아닌데, 참 신기합니다.”
진실을 말하는데, 그게 거짓처럼 느껴질 리가 없었다.
“······.”
조성돈 팀장은 새삼 최민혁 눈치를 보다가 늘 옆에 있는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김명준 과장은 혹시나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김명준 과장은 이미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은 새삼 혀를 내두른 채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최민혁은 솔직히 명분만 찾고 있었다. 그는 음모자의 웃음을 지었고, 양 손바닥을 위로 펼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ETRI나 오성 전자가 싸움하자는데, 망설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큰 논란의 소지가 될 겁니다. ETRI 내부 일도 엮여 있는데, 분명히 말이 나올 겁니다. 차라리 권태성 실장이나 이창명 이사와 만나서 한번 협상을······.”
“공동 표준 문제는 몇 년에 걸쳐서 진행된 일이어야 가능합니다. 이미 그놈들은 작정하고 있었는데, 가서 협상하자고요? 그게 잘될 것 같습니까?!”
“···아니겠죠.”
조성돈 팀장도 이번 일이 최민혁 때문이 아니라는 것과 최민혁이 사전에 대응책을 만들어 놓은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알겠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표정을 한 최민혁은 툴툴거렸다.
“괜히 제가 오성 전자를 협박해서 분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회사 내부에도 이번 일은 이일태 이사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리세요. 우린 오성 전자에 압력을 받았고, 이에 대응해서 정면으로 싸우는 것이고!”
“···네.”
***
KM 전자 기획실도 갑작스러운 오성 전자의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 중에 중도파에 해당하는 이영란 대리는 최민혁 실장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마저 했는데, 막상 일어난 일에 어이가 없었다.
“오성 전자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줄은 몰랐습니다.”
이미 조성돈 팀장에게서 이번 사태에 대해서 들은 박상기 차장은 느긋한 표정으로 커피에 시원한 얼음 하나를 넣어서 흔들었다.
“오성 전자가 마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콜린스 사태 때문에 한동안 정신 못 차렸지만 이제 서서히 반격할 때도 되었지.”
이영란 대리는 자신이 맡은 수입품 냉장고와, 세탁기 부분을 줄이고, 국내 콜린스 대리점 현황을 조사한 터라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은근히 자기 분야에 소홀한 최민혁 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이일태 이사와 관련된 일에 최민혁 실장이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오성 전자가 먼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STB 사업부가 날아가면서 이번에 콜린스 실무를 담당하게 된 이정원 과장은 피식 웃었다.
“이 대리는 너무 부정적이라서 문제야. 위에서 지시를 내릴 때는 그냥 그런가 생각해.”
하지만 박상기 차장만큼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이번 일은 실장님이 좀 지나친 것은 사실이야. 이일태 이사의 행동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ETRI 일까지 끼어든 것은 너무 했어.”
이영란 대리를 위로하던 이정원 과장은 흠칫 놀라서 박상기 차장을 쳐다보았다.
“설마 박 차장님은 이번 사태가 최 실장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둘 다겠지. 오성 전자는 이미 꿍꿍이가 있었는데, 실장님이 먼저 선수 치니, 아차 싶어서 행동에 옮긴 거야. 자본이 탄탄한 대기업과는 달리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중견 기업은 된통 당한 셈이니까.”
실제로 오성 전자는 가전 3사를 비롯한 몇몇 대기업과는 따로 타협을 봤지만 다른 중견 기업에 대해서는 혜택을 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런저런 개별 협상이 진행 중인데, 힘이 약한 그들은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불공정한 계약임에도 오성 전자의 제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정원 과장은 그제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박상기 차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조 팀장님 이야기로는 단단히 벼르고 있는 사람이 최 실장님이라고 하니까. 이번 기회에 또 한바탕하겠지. ETRI는 전쟁터가 될 거고, 이일태 이사는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꼴이 된 셈이니까.”
“하.”
기획실 직원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박상기 차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박상기 차장이 조성돈 팀장 통해서 사전에 들은 이야기는 그만큼 놀랍고도 신기한 것이었다.
‘진짜 어이없네.’
***
오성 전자의 공격이 기획실 입장에서는 그저 불구경에 가깝지만, 이일태 이사의 처지에서는 날벼락이나 마찬가지다.
이일태 이사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박재호 실장을 직접 만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ETRI 내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잘 모르는 이일태 이사는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깨닫지 못했다.
‘아냐. 다른 대기업이 바보가 아니잖아. 그들이 오성 전자의 손을 들어줄 리는 없어. 이 일은 아닐 테고, 결국 최민혁 실장 때문인가?’
다만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이 ETRI에 들락날락한다는 정보를 얻었지만, 그 내막은 몰랐으니까.
그는 이석우 부장을 불러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확인했다.
“조성돈 팀장 태도가 이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기획 팀이 이제까지 ETRI 관련 외주 사업에 적극 대응했는데, 갑자기 투자를 대폭 줄이고 있습니다.”
“설마 기획팀에서 딴짓이라도 해?”
“그걸 지금 확인 중입니다.”
“기획 팀 담당자가 정성근 대리였잖아? 그놈을 쪼아 봐.”
“그게 정성근 대리도 이상하게 절 자꾸 피합니다. 몇 번이나 기획실을 찾아가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콜린스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데, 답답해 죽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 부장이 지금 대리 하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이일태 이사는 길길이 날뛰었고, 이석우 부장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는 오히려 이일태 이사의 행동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게 왜 그랬습니까. 최 실장을 건드리면 반드시 보복이 따라온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한 겁니까?”
“야, 이 부장! 지금 이 일은 오성 전자에서 사고 친 문제를 말하는 거잖아. 최 실장 이야기는 거기에 넣지도 마!”
“그게 말이 됩니까? 최 실장님이 이미 ETRI 담당자와 직접 협상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습니다. 분명히 뭔가 터진다는 이야기는 계속 나왔습니다. 우리 위성 사업부 분위기를 보세요. 다들 죽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갈등.
이일태 이사는 위성 사업부 임직원의 불안한 시선을 느끼자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이 층에 있는 임직원이 다 들었다. 다들 이일태 이사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지 쉬쉬하지만, 불안한 얼굴이었다.
사무실 혼란을 본 허훈 과장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제가 한번 정 대리를 직접 만나 보겠습니다.”
이일태 이사도 그제야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할 수 있겠어?”
“해야죠. 지금까지 기획실에서 뭘 하는지 알아야 오성 전자에 대응할 것 아닙니까.”
“그래, 그래야지. 역시 허훈 과장 자네가 최고야.”
“천만에요.”
이석우 부장은 둘 사이에 끼어든 허훈 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허훈 과장이 뜻밖에 사내에 발이 넓기 때문이다.
그는 이보다 오락가락하는 이일태 이사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그랬다. 이쪽저쪽 물타기하면서 줏대도 없이 날뛰었다.
최훈열 전무나 김현우 상무가 있을 때는 그게 또 통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에게는 아예 먹히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용했다.
‘최 실장이 아무리 사람이 독해도 그냥 막 자를 수가 없다는 점을 최대한 이용한 것은 좋은데, 엉덩이에 불난 망아지처럼 설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
정성근 대리는 요즘 콜린스 후속 처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유럽 물량을 공급한 것은 좋았는데, 그다음 물량에 대한 납품 단가 협상 때문이다.
물량이 늘어나면서 납품 단가를 대폭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질 부품으로 갈아치울 수는 없어서 협력 업체를 만나 신뢰성 테스트 결과도 같이 확인해야 했다.
거기에 인력난에 허덕이는 공장에 내려가서 생산성도 검사해야 했다.
[정 대리, 그 정말 너무한 것 아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어. 아무리 수익성이 중요하다지만 제품 생산 계획도 중요하잖아!]
기존에 기획 팀에서 고안한 콜린스 기획은 전부 다 맞지가 않았다.
정성근 대리는 두 발로 뛰면서 이 일을 다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일은 줄기는커녕 쓰나미처럼 늘어만 갔다.
늘 묵묵히 일만 하는 정성근 대리도 끝없이 몰려드는 일감에 지쳐서 혀를 내둘렀다.
그는 막 출장 갔다가 본사로 돌아왔을 때 허훈 과장을 만났다.
“정 대리, 출장 잘 갔다 왔어?”
“그럭저럭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