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피곤한 정성근 대리는 허훈 과장을 피해서 본사로 들어섰다.
하지만 거머리 같은 허훈 과장이 정성근 대리 오른팔을 잡았다.
“커피나 한잔하자.”
“출장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저 진짜 바쁩니다.”
팔짱까지 낀 허훈 과장은 영업용 미소를 한 채 정성근 대리를 채근했다.
“어허, 사람 정말 그러기야? 나 때문에 이득을 자주 봤잖아.”
“······.”
정성근 대리가 담당한 파트 중의 하나가 위성 사업부였고, 업무 조정 때문에 허훈 과장과는 자주 만났다. 실제로 사업부 미팅 때 허훈 과장이 윤활유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허훈 과장은 잔머리를 많이 굴리지만, 업무적으로 유능한 편이라서 이일태 이사나 이석우 부장이 하지 못한 부분을 잘 견인했다.
정성근 대리도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잠깐 몇 가지만 묻고 싶어서 그래. 자네는 늘 출장 간다고 외부로 나가서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이번만 좀 부탁해.”
***
KM 전자 본사 앞의 한 커피숍은 반 정도 자리가 차 있었다. 그만큼 한국 내수 경기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허훈 과장은 요즘 몇 가지 안 좋은 소식으로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정성근 대리 눈치를 봤다.
“오성 전자가 디지털 위성방송 수신기 개발 인력을 더 확충했다고 난리야. LC 전자에서 이걸 알고, 같이 투자를 늘렸으니까.”
디지털 위성방송 수신기에 대한 대기업의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그들 역시 ETRI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 가는 것을 느껴서 투자를 대폭 늘린 것이었다.
위성 방송 자체가 새로운 시장인 것도 있지만 일단 수익성이 나기 시작하면 꾸준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성근 대리도 아직 조성돈 팀장에게서 자세한 내막을 듣지 못한 터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콜린스 대응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이 일까지는 잘 몰랐다.
그래도 최민혁 실장이 위성 사업부에 뿔이 단단히 났다는 것 정도는 들었고, 실제로 보복하려고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조성돈 팀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획 팀에 넌지시 말했으니까.
설마 허훈 과장이 초조하게 자신에게 들러붙는 이유가 그 일 때문인 줄은 몰랐다.
“늘 있는 일 아닙니까. HY 전자나 대운 전자도 같이 참여해서 공동표준규격 제정까지 진행 중인 마당에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남의 불구경이라는 듯한 말투.
내심 허훈 과장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야. 그 표준이 오성 전자가 주도한 거잖아. 만약 우리 쪽에서 진행한 일을 없던 걸로 처리하면 우리 회사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오성 전자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정성근 대리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산적한 콜린스 일거리 때문에 위성 사업부에서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일까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지금도 유럽 시장, 공장을 돌면서 피로에 절어 있었다.
허훈 과장도 좀비처럼 피로에 지친 정성근 대리의 표정을 살폈다.
“오성 전자조차 하는 것을 보면 암묵적으로 업체끼리 약속한 규정을 깨려고 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우리 위성 사업부도 최소한의 정보를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정성근 대리는 오성 전자가 갑자기 사고를 쳤는데, 최민혁 실장과는 또 사이가 나빠서 무슨 일인지 몰라 허훈 과장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지만 정말 저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 이제까지 안산 공장에서 일주일 내내 있다가 왔습니다.”
하지만 허훈 과장은 이전처럼 물러날 수가 없었다.
“아니, 내 말은 최 실장님이 최근 이동호 교수 연구 팀이나 송한성 교수 연구 팀을 계속 만난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래. 송한성 교수는 위성 전문가 아닌가. 아니, 위성 쪽 관련된 일이라면 최소한 우리 쪽 사람도 데려가야지.”
그도 들은 바가 있었지만, 굳이 그 부분에 대해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직 내부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라서 전 모릅니다.”
“자네 기획 팀원이잖아. 어떻게 기획실 내부에서 진행되는 일은 몰라?”
“저 안산에 있었다니까요.”
“아니, 설사 안산 공장에 있다고 해도 중요한 일은 조 팀장님 통해서 이야기를 듣잖아.”
“다른 일은 그런데, 콜린스만큼은 안 그래요. 일이 너무 많아서 지금 공장 쪽도 난리입니다. 오죽하면 저도 콜린스 테스트까지 도왔겠습니까?”
실제로 안산 공장은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정성근 대리도 일을 도왔다. 다소 강압적인 지시였지만 정성근 대리는 군말하지 않았다.
정성근 대리 성격상 팀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김창호 부장님은 선행개발 팀이지만 인력이 부족해서 콜린스 조립 설비에 투입되어서 콜린스 조립을 하고 있으니까요.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입에 욕을 달고 삽니다.”
푸념이 이어졌다.
안산 공장에서 진행되는 소소한 일.
생산이나 테스트에 관한 이야기다.
심지어 협력업체와 만나서 부품 단가를 협상할 때 일어났던 시시콜콜한 일도 있었다.
허훈 과장도 처음에는 공감해서 묵묵히 듣다가 뒤늦게야 자기 상황을 깨달았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 조용하던 허훈 과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고개를 갸웃한 채 눈만 끔뻑거렸다. 그는 허훈 과장이 왜 저렇게 흥분하는지 이해를 못 한 눈치다.
아니, 이해를 안 한 눈치였다.
허훈 과장이 정성근 대리와 몇 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그걸 모르겠나.
“정 대리, 정말 이럴 거야?”
“회사 들어가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진짜 아무것도 몰라?”
“그럼요.”
눈을 동그랗게 뜬 정성근 대리의 표정을 보자 허훈 과장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정 대리, 부탁 좀 하세. 최소한 어떻게 돌아가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어.”
“흠.”
정성근 대리도 허훈 과장의 태도를 보면서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이일태 이사님이 최 실장님에게 들이박은 것 때문에 그런 겁니까?”
“야, 정 대리, 지금 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잖아!”
머리를 긁적인 정성근 대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만 끔뻑였다.
허훈 과장은 복장이 터질 것 같아서 계속 정성근 대리를 압박도 하고, 협박도 했으며, 심지어 유혹까지 해보았다.
무려 3시간에 걸친 마라톤 부탁.
정성근 대리는 그제야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알아만 보면 되죠?”
“···그, 그래.”
‘이 새끼가.’
“알았습니다.”
***
기획실에 도착한 정성근 대리는 지친 얼굴을 한 채 자리에 앉았다.
배종대 과장은 마치 휴가라도 갔다 온 사람처럼 여유가 넘쳤다.
“여, 정 대리, 고생했어.”
“아주 죽겠습니다.”
“요즘 안산 공장 분위기 어때?”
“사람 손이 부족해서 아르바이트생에게 추가 수당 줘서 굴리고 있어요.”
“거기 야근도 몰래 한다면서?”
“그것 때문에 단단히 뿔난 것 같습니다. 실장님이 사내 공지로 야근 금지를 내려서 더 분노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그럭저럭 적응한 눈치예요. 저녁 있는 삶이라서 좋다면서요. 다만 몸은 불안한가 봅니다. 주문량은 계속 누적해서 쌓이는데, 생산하는 물량은 별로 늘어나지 않으니까요.”
사내 공지로 윗선에서 할당 물량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왔다. 그런데 기획실 통해서 이미 따로 생산 지시서가 내려갔다.
사내 공지와 기획안이 서로 맞지가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영업 팀을 비롯한 다른 부서에서도 물량을 달라고 난리였다.
그러니 안산 공장에서도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
이 상황에 기름을 퍼부은 이는 바로 정성근 대리다. 그는 부품 협력 업체, 각 부서, 안산 공장을 다 조율해야 했다.
날짜가 지날수록 이 물량이 들쑥날쑥해서 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일찍 퇴근해서 몸은 편한데,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대충 내막을 이해한 배종대 과장도 이번 일에는 뜻밖에도 최민혁 실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도 처음에는 최 실장님이 왜 저러나 싶었는데, 다 맞는 것 같아. 굳이 무리해서 생산량을 늘리면 불량품이 늘어날 거야. 국내 물량도 아니고, 해외 물량에서 불량품이 늘어나면 손실이 기하급수적으로 쌓일 거야.”
커피를 들고 지나가던 박상기 차장이 피식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여, 배 과장, 이제 정신 좀 차렸나 봐.”
이죽거리는 박상기 차장 태도에 배종대 과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공급할 수 없는 물량은 포기하는 게 차라리 나으니까요. 근본적인 문제는 수요가 넘쳐나서 그런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 KM 전자 생산량을 봤을 때 마구잡이로 물량을 늘릴 상황도 아니고요.”
박상기 차장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것보다 최 실장님이 더 신기해. 나이를 떠나서 경험도 없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욕심이 없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정성근 대리는 묵묵히 자신을 반기는 이들을 보면서 컴퓨터 전원을 켰다. 그는 출장 보고서부터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산 공장 상황이 여유가 있다고 하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영업 팀은 그저 나 몰라라식으로 계속 물량을 던지니까.
문제는 납품 물량 날짜를 정할 수가 없어서 영업 팀과 안산 공장이 계속 갈등 중이었다.
안산 공장 측에서도 이제는 배 째라 식으로 나오고, 영업 실적이 날아가면 안산 공장 책임이라고 영업 팀에서 난리였기 때문이다.
정성근 대리는 그 사이에 껴서 중재한다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본사 와서도 한 가지 일이 생겼다.
‘아, 허훈 과장도 있구나. 이 실타래를 어떻게 풀지?’
“박 차장님, 그런데 위성 사업부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조성돈 팀장에게서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들은 박상기 차장은 피식 웃었다.
“갑자기 왜 위성 사업부 이야기를 꺼내? 그쪽은 매출도 얼마 되지 않아서 정 대리 자네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텐데.”
위성 사업부와 유럽 콜린스 매출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니, 실상 콜린스 매출은 이미 TV 사업부 다른 매출을 넘어선 지가 오래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오디오 사업부를 포함한 KM 전자 전체 매출을 넘어갈 터였다.
정성근 대리 처지에서 영양가 없는 위성 사업부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오다가 허훈 과장님을 만났습니다. 아주 달라붙어서 징징거리는데,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진짜 미치겠다니까요.”
박상기 차장도 평소와는 전혀 다른 정성근 대리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안산 공장에서 아주 힘들었나 보군.’
“아, 허훈 그 친구, 똥줄이 타나 보군.”
“혹시 뭐 아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글쎄.”
박상기 차장도 조성돈 팀장에게 얼핏 듣기는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까지는 잘 몰랐다.
오히려 이정원 과장이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최 실장님이 위성 사업부 관련 자료를 달라고 해서 줬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도대체 실장님이 위성 사업부의 자료를 왜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상기 차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위성 사업부 쪽과 실장님이 지금 지켜보는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는 그쪽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어.”
박상기 차장도 아직은 ETRI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는 몰랐다. 조성돈 팀장이 민감한 일이라서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구나.’
다만 눈치 빠른 정성근 대리는 그제야 허훈 과장이 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깨달았다. 그도 오성 전자의 행보를 별다르지 않게 생각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박상기 차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최 실장님과 사이가 틀어진 것 때문에 이일태 이사가 기획실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을 수도 있어. 만약 그 일이 문제가 되면 결국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이일태 이사니까. 허훈 과장이 그것 때문에 정 대리를 못살게 군 거고.”
“그렇군요.”
박상기 차장을 비롯한 기획 팀은 그제야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오성 전자가 뒤통수 친 것만 생각했는데, 막상 그 일의 대상이 이일태 이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이번 문제에 관한 책임도 이일태 이사에게 다 돌아가는구나. 설마 이것도 최 실장님이 꾸민 계략인 걸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