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서실 내부에서도 계속 이 문제를 파악하고 있으니까.”
KM 그룹 비서실은 아직도 최민혁의 행보에 대해서 몰랐다.
그들은 ETRI와는 KM 전자를 통해서 알고는 있었기에 그렇게 친한 것은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오히려 화를 냈다.
“이 이사, 진짜 뭐 하자는 거야. 아니, ETRI와 직접 거래를 하는 당신이 우리보고 돌아가는 상황을 물어보면 어떻게 해?”
딱 한마디 말.
하지만 이일태 이사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 말을 믿었지만, 막상 ETRI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위성 사업 디코더 관련한 연구원을 만났다.
불행히도 밑에 연구원이 아는 정보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애초에 이일태 이사 자신이 한 것은 위성 방송 시스템은 가장 말단 부분이다. 위성 방송 핵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성 시스템 메인이 프로젝트 진행 중에 지속해서 바뀌면, 그 밑에 디코드 부분 역시 계속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미 프로젝트 마무리 단계라는 예상과는 달리 변경이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오성 전자를 비롯한 LC 전자 담당자조차 공황에 빠져서 ETRI 내부를 들락날락거렸다.
그 과정에서 오성 전자를 둘러싼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불안감을 느낀 LC 전자가 다른 대기업과 손을 잡고 오성 전자를 압박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일태 이사는 큰 충격을 받은 채 불안에 떨었다.
그는 최민혁이 분노한 이후부터 갑자기 ETRI 내부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도 ETRI 내부에 지인이 있는 이석우 부장이 몇 가지를 정보를 찾았고, 심각한 얼굴로 나섰다.
“이게 사실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오성 전자의 이창명 이사가 우릴 배제하려 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이창명 이사가 왜 우릴 공격해?!”
“송한성 교수나 이동호 교수 연구 팀하고 관련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하고 긴밀한 관계입니다.”
“서, 설마 최 실장이 ETRI에 압력을 넣었다는 말이야? 아니, 그게 말이 돼? ETRI가 뭐가 답답해서 최 실장을 무서워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착잡한 이석우 부장도 ETRI 지인마다 이야기가 달라서 확답하지 못했다. ETRI 내부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세한 것까지는 몰랐다.
‘설마 최 실장이 ETRI 내부를 흔든 것일까?’
이일태 이사는 그제야 오혜정 비서에 대한 사건을 떠올렸다.
“이, 이창명 이사가 오혜정 비서 일로 우리 KM 전자를 상대로 보복한 거야? 그 시작이 우리 위성 사업부이고?”
“···아.”
깊은 탄식.
이석우 부장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눈치 빠른 허훈 과장은 한숨을 내쉰 채 두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참담한 얼굴을 한 채 차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설마 보복으로 이런 일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문득 최훈열 전무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최훈열 전무에게 일어났던 일도 따지고 보면 지독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사람을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이일태 이사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그 역시 최훈열 전무, 김현우 상무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아니, 내가 최훈열 전무처럼 죽을죄를 지은 것이 아니잖아.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부들부들 떠는 이일태 이사.
“······.”
“······.”
두 사람도 패닉에 빠진 이일태 이사를 타박하지는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위성 사업부도 이제 어떻게 될지 몰랐다.
허훈 과장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이사님에게 듣기로 최문경 부회장뿐만 아니라 최용욱 회장에게 지지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차라리 최용욱 회장님에게 중재를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일태 이사는 머뭇거렸다. 권재홍 비서실장을 만나서 이야기해 본 바로는 최용욱 회장은 모른다는 것을 본능에 따라 느꼈다.
인제 와서 따진다고 해서 이 일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바퀴벌레같이 질긴 생명을 가진 허훈 과장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님이 아니라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님도 있습니다. 그분이 과거 보인 행보를 본다면 결코 이사님 부탁을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아, 맞아. 그 방법이 있어. 확실히 장승일 실장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그는 벌떡 일어나기가 무섭게 이사실을 나가 버렸다.
두 사람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봐서는 뛰어난 임직원 때문에라도 조용히 지냈다면 이일태 이사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일태 이사가 최민혁 실장에게 대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짜 병신 같다.’
***
장승일 실장은 그다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최민혁의 행보를 주시했다. 이일태 이사가 갑자기 찾아와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이일태 이사를 다독거려 주었다.
안 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 최 실장님 성격 봐서는 이미 끝났다고 봐야지.’
장승일 실장은 왜 최민혁 실장이 문제가 된 직원을 내버려 두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최병연 팀장같이 뛰어난 인재가 서서히 KM 전자에 늘어나기 시작한 점을 주목했다.
‘이들 인재는 다른 것을 떠나서 고용 불안에 대해서는 예민하지. 아무리 최민혁 실장님이 대단하다고 해도 아무런 이유 없이 직원을 자르면 미래를 고민하니까.’
설사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이 있어도 차라리 안고 가는 것이 회사 전체 발전을 생각한다면 그게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일태 이사처럼 본인이 나서서 분탕질을 쳤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더욱이 실적이 없다면 말이다.
장승일 실장은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보다 더한 걸음 물러나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유심히 살폈다. 굳이 ETRI 내부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오가는 ETRI 인력만 봐도 짐작은 가니까 말이다.
장승일 실장은 딱히 이일태 이사 편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민혁의 자세한 행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를 찾았다.
“건강 좀 신경 쓰세요.”
눈 그늘이 가득한 장승일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회장님이 경영에 나서면서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습니다.”
“할아버지가요?”
“네. 아무래도 최문경 부회장님이 미덥지 못해서 그런지 KM 산업부터 시작해서 KM 계열사 경영 성과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예상 밖의 이야기에 최민혁은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설마 저랑 관계도 있는 겁니까?”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 못 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회장님의 KM 전자 경영 성과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계열사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구조 조정을 할 예정입니다.”
“······?”
최민혁은 전혀 예상 밖의 말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본진인 KM 전자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장승일 실장이 넌지시 다른 제안을 했다.
“설마 다른 계열사 지분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제가 관심을 둬야 할까요?”
“그건······.”
장승일 실장도 뒤늦게 콜린스 국내 완판 소식을 떠올렸다. 사실 늦은 감이 있었다. 워낙에 유럽 홍보에 열을 올린 나머지 국내를 소홀했다.
그런데 하루 매출이 무려 800억이 넘는 성과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최민혁은 슬쩍 장승일 실장의 유혹을 떨쳐버렸다.
“자, 그런 이야기 말고, 오늘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설마 이일태 이사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습니다. 아, 물론 제가 실장님 일에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일태 이사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저희 기획 조정실이 특별하게 실장님을 지켜보지 않아도 계속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흠.”
최민혁도 장승일 실장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머리를 굴렸다. 열심히 생각해 보니, 딱히 장승일 실장과 관련된 일은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역시 이일태 이사 처리다.
“혹시 오성 전자 때문입니까?”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됩니다. 전 실장님이 이일태 이사 때문에 나섰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으니까요. 실장님은 마치 오성 전자와의 싸움에 안달이 난 분 같습니다.”
‘역시 눈치가 빨라.’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이창명 이사가 한 짓을 보면서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설마 오성 전자가 시비 걸면 무조건 참으란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는 차마 최민혁이 의도적으로 이창명 이사를 부추기지 않습니까란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뭔가 있군. 위성 사업부의 디코더로 ETRI 내부가 그렇게 소란스러운 수는 없어. 도대체 최 실장님은 ETRI 내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일까? 아무래도 회장님이 안 회장의 제안 때문에 고민이 많던데, 회장님에게 보고해야겠어.’
***
장승일 실장의 예상처럼 ETRI 내부는 생각보다는 시끄러웠다.
오현종 팀장과 김승구 팀장은 자신의 연구 인력만을 총동원해서 따로 최민혁의 위성 시스템 수정 작업에 착수했다.
뒤늦게야 내막을 안 연구원은 다들 매우 놀랐지만 반발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기존 시스템은 박재호 실장의 무리한 압박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연구소 내부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많이 돌았다.
기존에 진행하던 ETRI 연구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최근 출근 때마다 임직원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이창명 이사는 예상과는 다른 ETRI 행보에 폭발했다. 그 분노를 식힐 수가 없어서 결국 ETRI로 내려가서 박재호 실장을 찾았다.
아직 두 사람의 배신을 잘 모르는 박재호 실장도 살기 위해서 자기 나름 한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위성 방송 수신기에 대한 공동표준규격 제정이라.”
“다만 우리 ETRI가 먼저 나설 수는 없습니다. 이사님이 적당히 판을 깔아주셔야 합니다. 일테면 따로 만든 수신기라든지······.”
“별도 수신기라면··· 있습니다.”
“오, 그거면 더 좋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삼아서 표준규격을 정하면 됩니다.”
호들갑을 떠는 표정과는 달리 박재호 실장은 내심 혀를 찼다.
‘이 새끼들이 뒤통수치려고 작정했구나.’
아마 LC 전자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다른 협력 업체 중에는 자칫하면 전반적인 수정을 다시 해야 한다.
이미 유료TV 규격도 어느 정도 정리가 다 끝난 마당인데, 작정하고 준비를 한 것이었다.
이 일이 오성 전자가 독단적으로 했을 리는 없었다. 분명히 ETRI 내에도 돈 받고 몰래 뒤에서 작업한 놈들도 있을 것이었다.
‘내부 단속도 따로 해야겠어.’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는 중에 다른 사업부까지 건드려서 정보를 얻었다. 윗선에서는 KM 전자를 건드리는 것을 암묵적으로 승인했기에 가능했다.
문제는 이 일이 잘못되면 몽땅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에 또 끌려갈 수는 없어.’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겁니다.”
“저야 오성 전자 측에서 그림을 잘 만들어주면 거기에 손을 얻을 뿐입니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손을 잡았다.
박재호 실장은 내심 이 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자신이 먼저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
[오늘 오성 전자는 디지털 위성방송 수신기와 관련된 제품 라인을 선보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오성 전자의 이 독자 개발 제품은 두 달 후에 정식으로 출시한다고 밝혔습니다.]
오성 전자의 갑작스러운 이 발표는 LC 전자를 비롯한 관련 업체를 뒤흔들었다.
그들은 오성 전자에 대한 노골적인 비방과 동시에 ETRI를 찾아가서 항의했다.
“이게 어떻게 오성 전자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겁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한 일은 뭐라는 말입니까. 당신들 미친 것 아닙니까?”
박재호 실장도 이미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분노에 가득한 업체의 반응에 몸을 떨었다.
“공동 표준 재정이 끝나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될 겁니다.”
오성 전자가 독자 개발한 것이 아니라 공동 개발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