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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73화 (173/1,021)

* * *

이창명은 가까스로 차량이 출발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인상을 찌푸렸다. 또 이 일로 양종식 전무에게 한바탕 욕먹을 것이 분명했다.

‘양 전무 이 새끼가 유독 이번 기회에 날 공격하는 것도 다른 의도가 있을 거야. 어쩌다가 내가 이 모양이 된 건지.’

멀티미디어를 총괄하는 양종식 전무는 전형적인 오성맨으로, 신입 사원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전무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 곧 부사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고작 43세의 나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창명 이사와는 비교하기 힘든 이다.

그는 물론 사업부 내에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이창명 이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서자라는 점 때문에 두고 보고는 있지만 틈만 나면 계속 이창명 이사를 압박했다.

이창명 이사는 안 그래도 오성 전자 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신세인데, 이제는 물러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더욱이 차량에 탄 안국호 부장을 통해서 유영진 팀장이 결국 구속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정확히는 유영진 팀장이 자기가 다 했다고 모든 책임을 떠안았다. 이창명 이사에 대한 것도 자신이 뒤에서 다 작업했다고 시인한 것이었다.

이창명 이사는 내막을 잘 몰랐고, 그저 유영진 팀장 말만 믿고 오혜정 비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고 자백한 것이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결국 유영진 팀장을 구속하는 선에서 이번 수사를 끝낼 것이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창명 이사는 넥타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풀었다.

“다른 문제는 없겠지?”

“협상은 잘 끝났습니다. 어차피 우리 법무 팀이 뒤를 봐주는 상황이고, 담당 판사에게도 손을 써 놓았습니다.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겁니다.

안국호 부장도 긴장 때문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이창명의 눈치를 봤다. 그가 오성 전자 내에서도 날뛸 수 있었던 것도 다 이창명 이사가 배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때와는 달리 이창명 이사도 이번 일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다.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현우 그 돼지 새끼 때문에 안 그래도 미칠 지경인데, 이런 일마저 생기다니.’

이창명 이사도 창백한 안국호 부장은 보자 더 화낼 기운도 생기지 않았다.

“그놈 관리 잘해.”

“이미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잘했습니다. KJ 엔터 쪽에도 이야기해 놔서 감옥에서 나오면 실장으로 승진도 할 겁니다.”

“빌어먹을.”

뼈아픈 일이었다.

이번 일 때문에 KJ 엔터에 대한 투자도 더 늘려야 했다.

KJ 엔터는 실상 오성 전자를 비롯한 다른 계열사 임원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이창명 이사 혼자 KJ 엔터와 엮여 있지 않아서 그럭저럭 잘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여론 때문에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 했다.

그는 오성 전자 내에 어두운 일을 주로 전담했는데, 이 일로 물 위로 오르면서 입지가 좋지 않았던 것이었다.

새삼 최민혁에 대한 증오가 치솟아 올랐고, 동시에 오혜정 비서의 매혹적인 자태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오혜정 비서는 그야말로 놓친 물고기.

이창명 이사는 타오르는 욕망을 쉽게 견디지 못했다.

‘최 실장 이 새끼는 절대로 그냥 안 둔다.’

* * *

오혜정 비서는 아침 출근 시간에 전철을 기다리면서 우연히 TV 뉴스를 봤다.

TV에는 레이저 광선을 쏘는 이창명 이사 모습이 나와 있었다.

뉴스 진행자는 이창명 이사의 행동을 은근히 비난하면서 이번 사태를 세세하게 지적했다.

‘오혜정 비서’ 이름도 덩달아서 나왔는데, 이창명 이사 화면 바로 옆에 자신의 광고 장면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행인도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창명 저 새끼가 욕심을 낼 만해.”

“그러게 말이야. 오혜정 비서에 관한 이야기가 정말 많더라. 어떤 기사 글 보니, 미스코리아 대회에서도 불이익을 당했다는 소리가 있으니까.”

“하긴 미스코리아 진하고 비교해도 오히려 낫던데, 뭔가 또 있겠지.”

“그게 스폰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소리가 있어.”

“설마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그랬을까?”

“예전에 계속 미스코리아 대회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어. 지금 이창명 저 개자식이 설치는 것을 봐라. 충분히 근거가 있지.”

화면이 바뀌면서 신혼 생활을 즐기는 오혜정 비서가 콜린스를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장면이 이어졌다.

“하긴 진짜 예쁘기는 예뻐.”

물론 두 사람은 말만 한 것이 아니라 힐끗 오혜정 비서를 살폈다. 설마설마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도 하나둘씩 오혜정 비서를 보다가 한 사람이 나섰다.

“혹시 오혜정 비서 아니세요?”

“아, 네.”

그녀는 ‘오혜정 씨’가 아니라 ‘오혜정 비서’란 말이 이상하게 좋았다.

KM 전자는 오혜정 비서를 내세워서 광고 대박을 터트렸고, 이와 관련해서는 기존 임직원에게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또 다른 기회를 준다는 점을 알렸다.

이 사태는 시간이 갈수록 논란을 만들었다.

정작 오혜정이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은 결코 연예인이 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콜린스 광고로 유명세를 타면서 오혜정이라는 이름이 알려졌음에도 오혜정은 여전히 KM 전자 비서였다.

자연스럽게 ‘오혜정 비서’란 별명이 그녀에게 생겼다.

오혜정 비서.

그야말로 국민 비서였다.

오혜정 비서는 덕분에 몰려드는 시민에게 사인을 해줘야 했다.

다행이라면 시민 의식 덕분에 지하철 내에서는 별문제가 없었다.

다만 뜨거운 인기 때문에 본사에 출근하는 동안에도 고생했다.

‘아무래도 차를 사야겠어.’

* * *

아침에 모닝커피를 들고 나타난 한선화는 부러운 듯 말했다.

“오 비서, 인기 많아서 좋겠다.”

“언니도 참.”

“와, 얼굴 봐라. 진짜 통쾌한 얼굴이다. 유영진 팀장 구속된 거 봤어? 직권 남용, 공갈, 특수 협박으로 체포되었대.”

정확히는 성추행 때문에 유영진 팀장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는데, 그 기간에 또 죄를 저질러서 구속된 것이었다.

“아, 저도 아침에 들었어요.”

“지금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어. 콜린스 광고도 덕분에 대박이 났어. 콜린스 국내 광고 선주문량도 30% 가까이 더 늘어났어.”

오혜정 비서는 눈만 끔뻑거렸다.

“정말요?”

“어, 아무래도 오 비서에 대한 동정표가 많아지면서 더 광고 인기가 올라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홍보 팀도 난리가 났어.”

“다행이네요.”

그녀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이 얼마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속상하고 화도 났다. 그때는 최민혁이 그냥 화만 내고 끝나나 싶었는데,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진짜 행동으로 옮기다니.’

특히 검찰을 이용해서 이창명 이사를 쥐어짜는 모습은 그녀도 상상을 못한 일이었다.

한선화 비서는 피식 웃기만 했다.

“우리 실장님이 자기 사람 아끼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그러게요.”

그녀도 이창명 이사를 감옥에 집어넣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것까지 바라지 않았다. 상대 신분이 누구인지 잘 아니까.

한선화 비서 생각은 좀 달랐다.

“이창명 이사에 대해서는 너무 실망하지 마. 아직 우리 실장님의 보복이 끝난 것 같지 않으니까.”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한선화 비서를 쳐다보았다.

“네? 그게 무슨 말이세요?”

“두고 보면 알 거야.”

한선화 비서는 그저 웃음을 짓은 채 그냥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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