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렇다고 너무 힘 줄 필요도 없어. 괜히 자세하게 하려고 이것저것 다 떠벌이는 것도 민폐야.”
“아, 네.”
“스탠포드 대학 간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그쪽에서 우리 쪽의 참여를 부탁할 때는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야.”
비디오 관련 특허는 방송 산업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들 이게 뭔가 했던 이들조차 점차 KM 전자의 비디오 특허에 관심이 쏠리자 어쩔 수 없이 요청한 것이었다.
즉 갑은 KM 전자였다.
이미 자신감을 가진 임기석 부장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꼼꼼하게 지적했다. 그는 너무 바빠서 자신 대신에 공채덕 과장을 보내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최 실장님의 기조연설을 생각해 봐. 그냥 뻔뻔하게 나가란 소리야. 거짓말도 좀 쳐. 괜찮아. 어차피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까. 가서 자랑 좀 열나게 하고 와.”
“…알겠습니다.”
공채덕 과장도 그 소심한 임기석 부장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힐끗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직원과 눈인사를 했다.
최민혁이 괴상한 테이블 쇼를 벌일 때만 해도 영문을 잘 몰랐다.
그 당시에 최민혁이 한 말은 그저 뭔가 과시하려는 것이 아닐까에 대해 의심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최민혁이 한 말은 단순히 말로 끝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이곳에 앉으면 여러분은 기존처럼 KM 전자 직원이 되어서 미래를 위한 도전을 하게 될 겁니다. 아마 쉽지 않은 미래가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겁니다. 월급도 새로운 아이템 시작 전에 삭감될 겁니다. 대신 그 고난을 극복한다면 아마 평생 월급쟁이로는 만져보지 못한 돈과 명예를 얻게 될 겁니다.
실제로 줄어든 연봉도 다시 올랐다. 그냥 오른 정도가 아니라 20% 가까이 더 올랐다. 그런데 지금 KM 전자 돌아가는 분위기를 봐서는 고작 그런 연봉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 과장님, 출장 잘 갔다 오세요!”
다들 미국으로 떠나는 공채덕 과장의 뒷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임기석 부장이 크게 소리쳤다.
“자, 가서 일해야지. 기회는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올 거야. 그러니 괜히 공 과장 부러워하지 마. 나중에는 서로 귀찮다고 할 테니까.”
“네!”
힘찬 함성.
다른 사업부 직원 역시 그 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임기석 부장 말처럼 나날이 승승장구하는 KM 전자에서 기회는 너무도 많았던 것이었다.
* * *
KM 전자의 분위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르자 직원들 어깨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역동적인 KM 전자의 모습은 과거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최민수는 이런 KM 전자 변화에 크게 당황했다.
회사 출근과 함께 나름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자신이 출근해도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인사 팀에서도 따로 관리하지 않아서 무려 3시간이나 기다렸다.
인사 팀 직원에 물어봐도 계속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최민수를 담당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마르고, 키가 작은 허훈 과장이 나타나서 소리쳤다.
“여기 최민수 씨 있습니까?”
“아, 저기 있습니다.”
“그 너무한 것 아닙니까. 최소한 인사 팀이 알아서 사업부로 데려와야죠. 아니, 최소한 전화라도 한 통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가 알아서 인사 팀을 이렇게 찾아와야 합니까?”
“죄송합니다. 최근에 뽑은 아르바이트 관리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인사 팀은 콜린스 품질 관리 때문에 뽑은 아르바이트의 실적을 추려서 앞으로 정식 직원 뽑을 때 참고할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인턴에 가까운 평가라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알이 꼴린 허훈 과장은 그런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이따위로 하지 맙시다. 우리 사업부도 잘나갈 때가 있었어요. TV 사업부가 언제까지 저럴 거라 생각합니까? 정말 사람이 그러면 안 됩니다!”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허훈 과장 위세는 사뭇 대단했다.
인사 팀도 할 말이 많았지만, 굳이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콜린스로 말미암은 일의 폭주 때문에 적당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허훈 과장은 그런 모습조차 마음에 안 든 얼굴이었다.
“민수 씨, 갑시다.”
“아, 알겠습니다.”
* * *
최민수는 위성사업부의 허훈 과장 도움을 얻어서 가까스로 자기 자리를 갔다.
하지만 위성사업부 역시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일태 이사는 무려 15kg나 빠진 좀비 같은 몰골을 한 채 정신없이 뛰어다녔는데, 곧바로 ETRI 출장 때문에 나가 버렸다.
“최 부장, 내가 지시한 것 이번 주까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해!”
“제가 담당자를 다시 만나보겠습니다.”
“그놈들 성격 알잖아. 맨투맨으로 붙어서 계속 독촉하는 것 외에는 없어. 말이 좋아서 엔지니어지, 실상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야!”
정부와 대기업의 협력으로 진행되는 연구 속성을 잘 아는 최 부장도 한숨을 내쉬면서도 별다른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죽겠네.’
같은 말 또 하고, 또 하고 지겨웠다. 콜린스 이전만 해도 정부 연구원 탓으로 돌리면 되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일태 이사도, 위성 사업부 임직원도 신규 위성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회사에서 잘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아무리 최민혁이 회사 분위기를 본다고 해도 실적이 없는 이사를 그냥 내버려둘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김현우 상무나 최훈열 전무 라인인 그를 말이다.
위에 두 사람이 숨을 쉴 틈 없이 움직이니, 밑에 직원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들 시장 바닥의 상인처럼 이쪽저쪽에 전화하고, 연구 프로젝트 관련 담당자를 만나러 정신없이 뛰어나갔다.
허훈 과장은 정신없는 사무실 분위기에도 최민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노골적인 사수 꼰대를 부렸다.
“진짜 어리바리한 친구네, 아무리 신입이라도 뭘 해야 할지는 알 것 아니냐.”
“아, 도대체 왜 그래?”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누가 떠먹여 준다고 그러는 거야?”
“하, 이 친구 완전히 돌겠네. 젠장 맞을. 내가 신입 사원 따까리나 해야 해?”
울화를 터트리는 허훈 과장 얼굴은 실제로 상당히 좋지가 않았다. 김현우 상무 사태 이후에 위성사업부 평사원, 대리, 과장급 직원이 대다수 그만두면서 중간이 뻥 뚫렸기 때문이다.
사무실 분위기가 겨우 한가해지자 그제야 슬그머니 한마디 했다.
“민수 씨, 별일 없으면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지.”
“아, 알겠습니다.”
* * *
최민수는 담배를 핑계로 본사를 나와서 맞은편의 작은 벤치에 앉았다. 그는 허훈 과장이 왜 이곳까지 자신을 데려왔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허훈 과장의 태도가 사무실에 있을 때와는 달랐다.
허훈 과장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최민수 도련님, 죄송합니다. 주변 눈치 때문에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최 실장에 대해서는 잘 아실 거고, 지금 톰슨 계약 이후에 프랑스 대박이 터지면서 사무실이 어수선하니까요. 아무래도 구설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허훈 과장은 뭐가 그리 두려운지 오가는 사람도 살폈다. 혹시라도 KM 전자 임직원이 올까 염려한 것이었다.
첫인상은 당당하기만 했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으음,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던 허훈 과장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혹시 최 부회장님하고는…….”
기가 푹 죽은 최민수도 화가 나서 말했다. 그도 과거라면 재벌 3세라는 걸 앞세워 반말을 했겠지만, 구치소 생활 이후에 기가 팍 죽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맞아요. 여기 온 것도 우리 첫째 큰아버지 지시를 받아서입니다.”
“오, 그렇습니까?!”
말을 해놓고 최민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한심스러웠다.
눈빛을 반짝이는 허훈 과장은 담배를 꺼내서 불까지 붙여줬다.
“솔직히 최 실장이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도 최민수 도련님하고 별반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사태를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최민수도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허훈 과장은 생각보다는 현실적이었다.
“콜린스가 초대박을 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면 최병연 팀장 실적입니다. 최 실장이 한 것은 디자인뿐이죠. 거기에 차기작 모델도 과연 콜린스만큼 성공할까요?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오성 전자도 그러지 못하고, LC 전자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최민수의 처지에서 귀가 번쩍할 만한 평가였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이 바닥만 20년 있었습니다. 뻔합니다. 그러니 최 실장을 너무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지금은 조용히 버티기 하는 거죠. 그리고 기회가 올 겁니다. 그때 도련님이 나서면 되는 겁니다.”
희망을 품은 최민수도 그제야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이리저리 둘러봤다. 다행히 이 시간에 나온 KM 전자 임직원은 없었다.
“이일태 이사님 입장도 좋지 않다고 하던데…….”
허훈 과장도 벤치에 풀썩 앉아서 잠깐 동안 담배를 물고만 있었다. 그 역시 시간적인 문제가 확실히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콜린스 열기가 한껏 기승을 부리는 1년 안에 이일태 이사가 잘려 버리면 상황이 또 달랐다. 당장 위성사업부는 매각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일태 이사님도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지금 진행하는 위성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겁니다. 그러고 나면 최 실장도 이일태 이사님을 못 잘라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이일태 이사도 최민수를 밀어줄 수가 있다.
만약 최민수 자신이 그 공적을 내세운다면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마치 KM 전자 지분을 증여받은 최민수처럼 말이다.
‘나라고 못할 것이 없잖아.’
“그렇게 된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허훈 과장은 간신배처럼 속삭였다.
“네. 그래서 사무실 내에서는 도련님에게 좀 까칠하게 나갈 겁니다. 그게 도련님에게 좋아요. 어차피 알게 모르게 도련님에 관한 이야기는 최 실장 귀에도 들어가니까요. 그리고 이일태 이사님이 직접 지시한 겁니다. 그러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네.”
최민수는 새삼 방향성을 잡자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사내에 들어가서도 곳곳에서 최민혁의 여파를 느꼈다.
심지어 KM 전자와 협상하러 온 외부 업체 임직원의 입을 통해서 최민혁 소리를 지겹게 들었지만, 곧 이를 악물었다.
구치소 생활 탓에 위축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권력에 대한 강한 욕망을 느꼈다. 좀 더 강력한 힘이 있다면 자신이 그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기범이 형도 있고, 우리 엄마도 있어. 심지어 첫째 큰아버지도 적극 나를 밀어준다고 하잖아. 민혁이가 한 것을 나라고 못할 것이 없잖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잖아. 한번 제대로 해보자!’
* * *
허훈 과장의 말처럼 최민수를 지켜보는 시선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 자신도 말을 하면서도 간과했다.
박광민 사원이 안산 공장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모습을 보았고, 기획 팀에 가서 쪼르르 이 사실을 폭풍 수다로 폭로했다.
성격이 착한 이정원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소심한 허훈 과장이 그럴 리가 없어.”
“설마 제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세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여간 수상한 것이 아니었다니까요. 최민수 낙하산은 말이 많은 것도 사실이잖아요.”
집행유예로 풀려난 최민수가 갑자기 회사에 입사한 것은 확실히 사내에서 말이 돌았다. 멀쩡한 인턴을 뽑아도 괜찮은데, 뜬금없이 특별 채용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박상기 차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과장, 우습게 볼 일은 아닌 것 같아. 자네도 설마 또 최훈열 전무 사태를 경험하고 싶은 거야?”
“에이, 박 차장님, 그건 정말 너무 나갔습니다. 고작 평사원으로 뭘 할 수 있다고 그러세요. 과장 나부랭이도 힘 못 쓰는데.”
“그건 모를 일이야.”
박상기 차장이 냉랭하게 나오자 다른 기획 팀도 다들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것을 떠나서 낙하산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정원 과장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최민수 스파이설에 한 표를 던졌다.
그런데 이 일은 기획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에서도 말이 나왔다.
허훈 과장이 나름 조심한다고 해도 주변의 시선을 다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정보는 다 취합되어서 프랑스에 체류 중인 조성돈 팀장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미팅을 요청한 시즈벨의 특이한 반응 때문에 고민하던 최민혁은 최민수 주변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들으면서 피식 웃었다. MP3 핵심 특허 매입 건 이후에 여유를 가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즈벨이나 오성 전자가 더 신경을 써야 할 시기지.’
“민수 형은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네?”
“어차피 제가 정보를 흘리기 전까지는 민수 형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요. 중요한 것은 민수 형을 내버려 두면 알게 모르게 불만을 품은 이들이 옆에 접근할 겁니다. 속을 알기 어려운 그 허훈 과장이란 사람도 한번 자세히 살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