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알겠습니다.”
최민혁의 대범한 반응에 조성돈 팀장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은 이보다는 톰슨이 계약된 이후의 반응에 더 주목했다.
“주가가 무섭게 오르는군요.”
“네. 진짜 장난 아닙니다.”
“일단 작년 주가인 5,000원대는 금방 회복을 할 겁니다. 자산 가치 대비해도 지금 주가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얼마까지 오를까요?”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기존 연설 거품도 있고, 톰슨 계약 이후에 유럽 계약 건도 있습니다. 거기에 동아시아, 미국 시장 계약 건이 터질 때마다 주가는 폭등할 겁니다. 그러니 그런 점도 잘 고려해야 합니다.”
“계약 일정도 조정하라는 말씀입니까?”
“어차피 지금 당장 양산 가능한 수량이 10만 대잖아요. 추가로 무리해서 10만 대를 더 늘린다고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유럽 시장도 감당이 안 되니, 다른 시장은 엄두도 내지 못해요. 지금도 양산 문제가 계속 터져 나오는데, 만약 미국에 팔아서 불량이 나오면 그 수리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게 사실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회사가 계속 콜린스로 대박을 터트리는 것도 아니라서 지금 공장 규모를 무리하게 증설해서 대규모 공장을 운영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그건 로컬 시장을 장악한 업체와 협상을 잘해야 합니다. 서두르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업 일정 조율이 필요합니다.”
당장은 자금을 퍼부어서 공장 증설을 하고, 생산량을 키울 수는 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을 때 불량 조절이 쉽지가 않다.
더욱이 KM 전자는 이제까지 국내 판로에만 집중해 왔던 터라 해외 판로에 대한 경험 자체가 없다.
톰슨 멀티미디어와 손을 잡은 것은 한편으로 고육지책이다.
그런데 미국과 같은 시장에서도 그런 방식이 통용될 리가 없다.
계약 조건이 마냥 좋을 수가 없다.
설사 이런 영업 전략을 다 사전에 검토해서 투자한다고 해도 그다음이 문제다. 콜린스 후속 모델이 연이어서 히트를 쳐야 하는데, 그게 쉬울 리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민혁이 굳이 무리해 가면서 콜린스 생산량을 키우고, TV 사업부를 확대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오직 콜린스 거품만 키우고, MP3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니까.
이미 최민혁의 옆에 있으면서 이런 계획을 추론한 조성돈 팀장은 입맛을 다셨다.
“…실장님 말씀처럼 TV 사업부의 한계가 아쉽습니다.”
최민혁 역시 쓰게 웃었다.
“회사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매출 규모를 키워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안 된 겁니다. 만약 욕심 내서 무리하게 회사를 키우다가 뒷감당이 안 되면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무리하다가 망한 회사는 수를 헤아리기 힘드니까요.”
“…네.”
신중하다 못해서 소극적인 최민혁의 대답에 조성돈 팀장은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을 자신이 해야 하는데, 거꾸로 듣고 있으니.
‘가끔 보면 정말 20살인지 의심스럽다니까.’
최민혁은 따가운 조성돈 팀장 시선에 머쓱한 듯 웃었다.
“할 수 있는 것만 하죠. 나머지 탐욕을 버리는 것으로 하고요. 그 원칙에 맞추어서 다른 팀이나 공장 지침도 포괄적으로 정리해서 규정을 다시 한번 교육하세요.”
“알겠습니다.”
“대신에 계약이 터지는 시간을 잘 조정해서 언론에도 적절하게 정보를 푸세요.”
“그 부분은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가전 3사에도 슬며시 KM 전자 공장 사정을 흘리세요. 오성 전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콜린스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자 시즈벨에 대해서 질문했다.
“시즈벨은 왜 아직 조용합니까?”
“아무래도 톰슨 MP3 특허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 이전에 이미 1년 전부터 시즈벨이 톰슨이 가진 특허권에 대해 로비를 했다고 합니다.”
“뜻밖이군요.”
“다만 톰슨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무시당했을 뿐입니다. 다급한 톰슨이 고작 돈도 안 되는 MP3 특허 따위에는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그건 칼하인츠 박사 역시 같습니다.”
시즈벨 MP3 특허를 노리는 최민혁 처지에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문제군요.”
“아무래도 시즈벨과 협상 전에 좀 더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임기석 부장과 이동호 교수에게 지시해 놓은 것이 있으니, 나머지 자료를 빨리 보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뒤늦게 시즈벨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고, 이 회사가 어떤 곳인지 알았다. 그들이 꾸준하게 노린 MP3 가치에 대해서도 느꼈다. 새삼 최민혁 행보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MP3 가치가 어느 정도이기에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것일까?’
* * *
베를린 도심에서 벗어난 한적한 별장은 아르데코 장식에, 높은 천정과 원목 마룻바닥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MP3 특허권을 20만 달러에 매각한 칼하이츠 교수는 포도주를 음미하면서 이동호 교수가 추가로 보낸 자료를 살폈다.
“대단해.”
MPEG 관련 비디오 특허는 지금도 수천 건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전 세계 업체가 다 달려들어서 이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경쟁이 살인적이었다.
하지만 이동호 교수의 비디오 특허는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덕분에 칼하인츠 박사는 지금까지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손을 대야 했다.
맞은편에 앉은 디이터 교수는 손녀를 안은 채 느긋하게 자료를 살폈다. 그 역시 약간 난감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휴가도 즐기고 잘되었어. 차라리 지금 수정하는 게 나중에 시간을 더 아끼는 것이니까. 이동호 교수 능력이 생각보다는 더 대단한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난 소니의 나카지마 유토 박사가 이번 MPEG 포럼에서 왜 그 난리를 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이동호 박사 영향력이 커질수록 타격이 클 것 같아.”
“소니 쪽에서도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소리가 있어. 아마 이 비디오 특허 때문에 다 엎어졌으니, 미치겠지.”
실제로 최민혁이 내놓은 신 비디오 특허 10건은 원래 소니가 먹는 특허다. 그것을 중간에 가로챘을 뿐 아니라 약간의 수정을 더해서 내놓았다.
이 특허는 최민혁 인생 1회차에 나오는 소니의 비디오 특허보다 더 발전된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죽어라고 고생한 소니의 비디오 연구소 쪽은 발칵 뒤집혔다.
“기조연설을 날린 오다 히로 소니 부사장이 굳이 나카지마 박사를 미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
“난 그것보다 미국 쪽 애들이 더 웃겨. 그냥 이동호 교수를 막 밀어주는데, 너무 노골적이라서. 소니가 그렇게도 싫은지.”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복잡한 MPEG 포럼 내부의 알력 문제 때문에 두 사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디이터 교수는 특히 MP3 특허와 관련된 문제를 떠올리자 인상을 찌푸렸고, 이번 기회에 MP3 특허를 차라리 잘 매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동호 교수와 공동 연구를 할 수가 있다는 점에 만족했다.
그런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브라운호퍼 연구소에만 이곳에 있다는 통보를 했는데, 누가 찾아온 거지?’
* * *
칼하인츠 박사도 영문을 몰라서 거실 밖으로 나와서야 소란 피우는 사람을 발견했다.
고급 정장을 한 남자였다. 40대 중반에 빼어난 몸매를 가지고 있어서 마치 모델 같았다. 냉철한 눈빛만 보면 감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야, 내가 변호사라고 말했잖아. 칼하인츠 박사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잠깐 이야기만 하면 된다고 하잖아!”
서릿발 같은 음성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온 칼하인츠 박사를 보자 버럭 소리쳤다.
“박사님, 정말 이따위로 할 겁니까?!”
벌써 1년 넘게 스토커처럼 연락해 온 시즈벨의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였다.
“잠깐 아는 사람일세.”
칼하인츠 박사가 나서자 경비가 뒤로 그제야 물러났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건가?”
“브라운호퍼 연구소 통해서 알았습니다.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사람이 정말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연구소를 드나들던 저를 무시한 채 도대체 KM 전자에 MP3 특허권을 넘긴 이유가 뭡니까?”
“후유.”
무슨 말을 해도 통할 것 같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제이미 이사를 안으로 안내했다.
디이터 교수는 역시 난감했다. MP3 매각에 절대 반대를 외친 사람이 그였으니까.
제이미 이사는 차가운 눈으로 디이터 교수를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고작 20만 달러에 특허권을 넘긴 이유가 뭡니까?”
칼하인츠 박사도 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어서 솔직히 말했다.
“돈 때문이 아니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디이터 교수가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나섰다.
“으음,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시즈벨이란 회사는 그냥 특허권만 매입해서 그걸로 돈 버는 걸로 알아. 난 그런 생리가 싫었을 뿐이야.”
“그러면 KM 전자는 다르다는 말입니까?”
“흠.”
정확히는 이동호 교수와의 공동 연구 때문이었다. 실제로 얻은 자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연구하는 방향성을 바꾸었다.
기존에는 뜬구름 잡는 식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눈치 빠른 제이미 이사는 거실 한쪽에 널려 있는 자료를 봤다.
하지만 디이터 교수가 다른 자료로 슬쩍 서류 위를 덮어버렸다.
그제야 제이미 이사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두 사람이 고작 20만 달러에 특허권을 넘길 리가 없었다.
자신은 무려 2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이들이었으니까.
“설마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 때문입니까?”
디이터 교수는 눈치가 빨라서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칼하인츠 교수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 양반들이 거래했군. 설마 비디오 특허로 협상한 거야? 하, 씨발.’
두 사람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이미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 두 사람이 원한 것이 바로 비디오 특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또 녹록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MP3 부분 실적이 커지면서 정작 비디오 쪽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울화가 치민 제이미 이사는 총으로 두 사람을 쏴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심호흡을 하며 일단 안정을 찾았다. 일단 이유를 알았으니, 그것이면 됐다.
“그래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양심이 있다면 동양인이 아니라 저에게 MP3 특허 지분을 넘겨야 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미안하네. 하지만 설사 최민혁 실장이 아니라고 해도 자네에게 넘길 수는 없었어.”
“아니, 그러면 최민혁 실장 그 새끼는 저랑 다른 놈입니까? 어차피 둘 다 이익을 노린 겁니다. 뭘 그렇게 차별하고 그런 겁니까?”
“…다시 말하지만 시즈벨에는 내 특허를 넘길 수 없어.”
“젠장맞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자신을 터부시한다는 것을 깨닫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잠시 두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째려봤다.
두 사람도 제이미 이사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결국 욕설을 내뱉은 제이미 이사는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론 다급하게 마이클 리트에게 전화했다.
[마이클, 나야.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란 인간에 관해서 조사를 해봐. 어린 시절부터 필요한 모든 자료를 다 확인해!]
* * *
시즈벨 이탈리아 사무실은 평소와는 달리 욕설이 오갔다.
패트린 호프만은 단신임에도 그 열정만큼은 누구에게 지지 않았다.
“제이미 이사,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란 사람 이야기를 왜 하는 건가. 난 MP3 특허권을 그렇게 노리는 이유를 모르겠어. 핵심은 통신 특허야, 특히 무선랜이나 휴대폰 원천기술을 노리는 것이 더 중요해!”
“지금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어. 혹시 CDMA 기술을 노리나 본데, 아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만약 CDMA가 표준이 안 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는 MP3로 도대체 뭘 해? 과연 저작권료에 미쳐 있는 음반사가 호락호락할 것 같아? 이 친구야 제발 정신 좀 차려!”
“지랄하네.”
모멸적인 시선에 분노한 패트릭 호프만 이사는 버럭 소리쳤다.
“이 병신아, 정말 의미 없는 짓을 그만하란 말이야. 그리고 이미 그 특허권은 KM 전자에 다 넘어갔다며? 인제 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두 사람의 갈등이 선을 넘어서자 다른 시즈벨 이사가 말렸다.
톰슨의 특허에 관심이 없던 시즈벨 이사진도 최민혁 실장이란 인간이 톰슨과 브라운호퍼 MP3 특허권을 먹었다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도 놓친 물고기가 왠지 아까웠던 것이었다. 더욱이 최민혁의 기조연설도 부정적으로 봤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