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38화 (138/1,021)

#138

물론 다양한 바이어의 비난은 그들 몫이었다.

KM 임직원은 불과 콜린스 이전만 해도 망해가는 회사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지금은 선주문에 깔려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 돌겠네.’

그래도 이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고객의 극성스러운 압력은 KM 전자 임직원으로서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새삼 최민혁 실장의 통솔력이 얼마나 탁월한지도 이때서야 깨달았다.

‘그냥 최 실장님이 지시한 대로만 하면 돼.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겠지.’

* * *

최민혁에 대한 신뢰도는 KM 전자 임직원 사이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이런 현상은 KM 전자 직원에게만 해당하지 않았다.

이동호 교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KM 전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재미를 단단히 봤다.

불만이라면 자신에게 최민혁이 좀 소홀하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반대에 해당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오성 전자다.

톰슨 계약 이후에 뜨겁게 달아오르는 KM 전자의 부상.

프랑스에 갔다가 다시 국내로 돌아온 권태성 실장은 주변의 압력을 쉽게 견디지 못했다. 그는 특히 신규 비디오 특허에 대한 것을 알자 분노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최민혁 실장을 이미 몇 번 만나서 이야기해 본 바로, 나올 대답은 뻔했다.

권태성 실장은 이를 악물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은 채 이동호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는 권태성 실장.

“…….”

이미 신 비디오 특허는 계속 뜨거운 주목을 받는 중이었다.

이동호 교수도 오히려 눈치를 봤다. 더욱이 칼하이츠 박사와 비디오 특허 공동 개발에 서명하는 것을 전화로 들었다.

‘솔직히 좀 쇼킹했지. 최민혁 실장이 중간에 길을 놔주기는 했지만, MP3 개척자인 칼하인츠 박사와 디이터 교수가 그렇게 적극 나올지는 몰랐어.’

엄밀히 말하면 MP3 특허는 이 두 사람이 자기 실력으로 만든 성과지만, 비디오 특허는 최민혁 실장이 주도했다고 봐야 했다.

이동호 교수는 이미 준비된 소스와 요리를 맛깔나게 만들었을 뿐이다.

‘하긴 MPEG 위원회 내에서도 우리 비디오 특허를 이미 최상단에 올려놓았으니까. 하긴, 덕분에 요즘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 여러 곳에서도 강연해 달라고 전화를 해오니까.’

그 대상에는 놀랍게도 미국 명문 대학도 빠지지 않았다.

자신이 박사 학위를 받은 MIT에서도 자기 연구 결과에 관심을 뒀다.

이 결과가 한국대 공대 내에도 알려지면서 이동호 교수의 영향력은 과거보다 몇 배나 상승했다.

내심 ‘꺼져!’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사회 초년생도 아닌데 그럴 수가 없었다.

복잡한 심경을 가까스로 감추었다.

“…바쁜 분이 왜 오성 전자와는 관련이 없는 우리 연구소를 찾았습니까?”

“실무진에서 뭔가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 직원에 대해서는 징계가 내려질 겁니다. 아마 다음 주 내로 사과하러 올 겁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뒤에 동행한 비서에게서 서류를 꺼내 직접 석사, 박사 과정인 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줬다.

“특채 서류입니다. 굳이 자세한 내용을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동호 교수 연구실에 있었다는 것만 표기하면 됩니다.”

당장 채용하는 서류가 아니었다.

석사나 박사 과정에는 전액 장학금뿐만 아니라 매달 인센티브도 줬다.

“…….”

한창 정신없이 MP3 프로젝트 작업을 진행하던 이들은 다들 자기 앞에 놓인 서류를 보면서 눈만 끔뻑거렸다.

이동호 교수 연구실 출신이면 무조건 오성 전자 입사가 보장된 것이었다. 그것도 공장 연구소가 아니라 오성 중앙 연구소이거나 그 상위 연구소였다.

심지어 본인이 원하면 오성 전자 본사에서 일할 수도 있었다.

‘소름 끼치네.’

이동호 교수도 자기 눈치만 보는 이들을 보면서 권태성 실장에게 말했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저희에게 매각한 비디오 특허 때문입니다.”

내막을 그나마 좀 짐작하는 이동호 교수는 몸을 움찔했다.

“그거야 저도 잘 모릅니다. 최 실장이 STB 사업부를 매각하면서 넘긴 것이라, 최 실장에게 가서 따지기 바랍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전 정말 아는 거 없습니다. 이번에 발표한 비디오 특허는 기존 특허와는 방향성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니 기존에 넘긴 특허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럴듯한 가짜 비디오 특허를 비싼 가격에 매각해서 뒤통수 친 분이 할 말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처음에는 버럭 화를 내려고 했던 이동호 교수도 그렇게 나갈 수가 없었다.

상대는 권태성 실장이다.

오성 전자에 취업하고 싶은 이들이 주는 따가운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최민혁 실장에게 문의해 보세요. 우리 연구 팀 역시 최민혁 실장이 제안한 대로 진행한 것이니까.”

권태성 실장은 연구실 한쪽에 놓인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차마 권태성 실장의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던 이동호 교수는 몸을 돌렸다.

“더 이상은 보안 서약서 때문에 권 실장님에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진실을 알고 싶으면 최민혁 실장에게 가서 따지세요.”

“……?”

권태성 실장도 가짜 비디오 특허로 족쇄를 걸려고 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자 잠깐 머뭇거렸다. 그 역시 눈치껏 이동호 교수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네.’

“좋습니다. 이 문제는 최민혁 실장과 만나서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오성 전자도 이동호 교수님과 앞으로 잘 지내고 싶습니다. 지난 일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인사차 이렇게 방문했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 * *

이동호 교수는 명성과 함께 찾아온 달갑지 않은 관심사에 한숨을 내쉬다가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사안을 말해주었다.

시즈벨 협상 때문에 조성돈 팀장이 정리해 온 MP3 관련 문건을 검토 중인 최민혁의 반응은 생각보다는 무덤덤했다.

[아, 권태성 실장이나 아니면 다른 대기업에서 찾아오면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후유, 도대체 영문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꼭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칼하인츠 박사나 디이터 교수 공동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 일은 미처 사전에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그렇게 처리해야 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KM 전자도 요즘 정신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신경을 써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하긴 최 실장도 정신없겠지. KM 전자는 지금 난리가 났으니까.’

* * *

KM 본사는 톰슨 계약 이후에 뛰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

심지어 주말도 반납한 채 다들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최민혁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권태성 실장의 행보를 알자 기존 연구에 박차를 가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후일 일본 소니가 고안한 공간 코딩 관련 특허 다섯 가지를 따로 추렸다.

공간 코딩 기술은 기존 비디오 특허와도 겹치는데, 인터페이스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었다.

당연히 이 결과는 이동호 교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유추한 것이었다.

그는 임기석 부장에게 즉시 이 관련 자료를 보내서 검토를 지시했다.

임기석 부장은 이미 이 일이 경험이 많은 터라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직원을 열심히 괴롭혔다.

그건 공채덕 과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임기석 부장이 지시한 일을 정리하면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최민혁의 IFA 기조연설 이후에 비디오 특허가 주목을 받았다.

그중에는 버퍼 점유율이나 모션 벡터 추정 외에 비디오 압축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빠진 퍼즐 조각처럼 이 부분이 떡하니 나타나자 혀를 내둘렀다.

‘또 최 실장님인가?’

임기석 부장도 난감했다.

“뭐 다 아는 사실이니, 묻지는 마. 다만 기존 비디오 특허와의 연관성 부분을 검토해야 하니, 그 부분을 잘 정리해. 당분간은 이동호 교수 쪽에도 입을 다물도록.”

“알겠습니다.”

기존 기술 자료도 대단했지만 이번에 받은 자료는 다이어그램, 차트, 심지어 구체적인 알고리즘까지 명시되어 있었다.

다른 비디오 특허보다는 빠른 성과가 도출되고도 남은 일이었다.

공채덕 과장은 이 흥미로운 기술 자료에 푹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 *

공채덕 과장은 새로운 기술에 푹 빠졌고, 자신이 잘나가는 만큼 천선구 과장의 소식도 궁금해서 그나마 STB 쪽과 친한 김 과장에게 질문했다.

“요즘 오성 전자로 이직한 STB 사업부 소식은 들었습니까?”

“천선구 과장 말입니까? 이번에 결국 장기 휴가를 냈다고 합니다.”

“……?”

흥미로운 소식이라서 자세하게 물어봤다.

기존에 나간 STB 사업부 쪽과 연락이 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는 끔찍했다.

신 비디오 특허가 IFA 기존 연설 이후에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그 순위가 껑충 뛰어올라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결국 오성 전자도 이 비디오 특허를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현우 상무가 여론몰이와 소송을 통해서 오성 전자가 중견 업체의 기술 자료를 강탈하고, 그 과정에서 직원을 토사구팽 시킨다는 소리가 파다했다.

이게 단순히 소문만이 아닌 것이 이미 기존에 피해를 본 사람도 같이 나서면서 논란의 소지가 점점 더 커져 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오성 전자가 강탈한 그 기술이 큰 의미가 없는 특허였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이 진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언론의 비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오성 전자는 조용히 비디오 특허와 관련된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이 비용만 해도 무려 1,000억은 족히 넘었다.

“…충격적인 뉴스군요.”

“더 황당한 것은 이 비디오 관련 특허에 엮인 200명 가까운 엔지니어인데, 기존에 하던 프로젝트도 접고, 이 연구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중박은 고사하고, 쪽박을 찬 셈입니다.”

“새로운 연구 팀으로 옮기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은 원래 연구 팀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워서 붕 떠버렸죠. 그러니 이들이 김현우 상무 팀을 무진장 괴롭힙니다.”

“설마 그 정도면 소문이 파다하게 났겠군요?”

“말도 마십시오. 다른 사업부도 소문이 나면서 재판과는 별개로 김현우 상무 팀은 벼랑 끝으로 몰고 가니까요.”

오성 전자 연구소의 전 조직이 이를 가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출근하는 이들도 바보가 아닌데, 증오가 가득한 시선을 쉽게 견디지 못했다.

“…회사 생활이 아주 어렵겠습니다.”

“아주 지옥이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보세요. 김 대리는 결국 정신병 치료를 받는 중이랍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다른 회사 이직도 쉽지 않다는 겁니다.”

“하긴 소문이 다 났을 테니…….”

“김현우 상무가 키운 민사 재판이 문제였던 거죠. 그게 더 컸습니다.”

공채덕 과장은 천선구 과장에 대한 짜릿한 복수극에 내심 만족했다.

자신이야 주먹 한 번 휘두르고 끝낸 일이겠지만, 지금 천선구 과장이 당하는 고통은 무간지옥에 빠진 것보다 더 심했다.

‘통쾌하네.’

* * *

공채덕 과장도 과거 최민혁이 왜 STB 사업부 매각 성과를 김현우 상무에게 몰아줬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은 실상 최악의 복수였다.

시간이 갈수록 좋은 일이 모두 최민혁 실장 덕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좋은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쪽저쪽에서 비디오 특허 관련 학술대회에 참여해 달라는 초청장이 날아왔다.

미국의 경우에는 여러 명문 대학에서 초청장이 왔는데, 그중에는 스탠포드 대학도 있었다.

공채덕 과장은 석사 과정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임기석 부장은 지금 너무 바빠서 갈 수가 없었다.

미국 출장은 공채덕 과장으로 낙점된 것이었다.

공채덕 과장은 미국 출장이 처음이라서 이것저것 많이 챙겼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여행 경비. 이미 스탠포드 대학에서 항공권과 호텔 투숙 비용을 보내왔음에도 재무 팀에서 따로 관련 경비를 내놓았다.

“얼마 전에 실장님이 여행 경비에 관해서는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을 바꾸었습니다. 호텔이나 항공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남는 경비는 자신이 알아서 다 쓰면 된다.

공채덕 과장은 허겁지겁 미국 출장 준비를 끝내자 겨우 한숨을 돌렸다.

임기석 부장은 마치 자기 아들을 외국에 내보내는 사람처럼 아빠 미소를 지었다.

“공 과장, 잘 갔다 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