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황광수 차장의 조언에 불안을 느낀 임권수 부장은 처음에는 당당하게 수원 사업장을 찾았다. 그러나 막상 시간이 흘러도 최병연 팀장 태도가 변하지 않자 초조했다.
그런데 그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 일어났다.
“최 부장님은 휴가 냈습니다.”
“언제 말인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이현탁 과장은 비웃었다.
“며칠 되었습니다.”
“혹시 휴가 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저야 알 수가 없죠.”
“비상 연락망이 있을 것 아냐?”
“이상하게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바쁜 기획실에서 자꾸 얼쩡거려도 됩니까?”
눈살을 잔뜩 찌푸린 임권수 부장이 소리쳤다.
“자네 말이 무슨 그따위야?”
“KM 전자 전략 기조실에서도 말이 많던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넌 누구야?”
“아, 저도 KM 전자 TV 사업부 소속이었습니다. 최훈열 전무를 만나러 갈 때 당신도 봤었죠. 당신은 그때 기억을 못 하겠지만.”
“…….”
당신이라는 말에도 임권수 부장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최훈열 전무가 움직일 때 기조실 내에서도 몰래 소통한 이가 바로 임권수 부장이었다. 그는 당시 최훈열 전무나 최문경 부회장 줄을 잡았고, 특히 최훈열 전무 일을 계속 도와서 최병연 팀장을 간접적으로 압박했다.
최병연 팀장은 그런 내막까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이현탁 과장은 본사에도 아는 인맥이 꽤 있어서 그런 사실을 파악했다. 물론 최병연 팀장에게 경고를 해주었다.
최병연 팀장은 기조실에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경계한다고 믿지 않았다.
KM 전자와는 이미 연이 끝났다고 생각한 임권수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 과거 일을 들추고 싶은 생각이 없어.”
“아마 이제는 고민해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최 팀장님이 사직서를 낼 거니까요.”
“뭐?”
임권수 부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현탁 과장은 비웃는 시선으로 임권수 부장을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빤질빤질한 얼굴을 보자 침을 뱉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우리 임 부장님이 얼마나 야비한 인물인지는 KM 전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장 실장님이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가 분노해서 받아쳤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분이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장 실장님은 당신이 한 짓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은 채 일을 처리했죠. 덕분에 회사 평판도 나쁘지 않았죠. 사실 지금 생각하면 무섭죠.”
“…….”
충격적인 이야기에 임권수 부장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화 한 번 내지 않았던 장승일 실장이 자신에 대해서 다 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장승일 실장 때문에 자기주장을 펴지 못한 것에 분노해서 회사를 그만뒀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날 믿지 않았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나에게 계속 일을 맡긴 것일까?’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현탁 과장이 비웃듯이 떠나도 단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듣던 황광수 차장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연락해 봐야지.”
* * *
최병연 팀장은 휴가를 낸 후에 얼마 있지 않아서 사직서를 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철수 차장도 다음 날에 사표를 내버리고 회사를 나가지 않았다.
이현탁 과장을 비롯한 오상현 과장 역시 그 뒤를 이었다.
조창호 차장과 안면이 있는 이들 역시 차례대로 사직서를 내버렸다.
갑자기 이들이 다 사표를 내버리자 수원 연구소는 발칵 뒤집혔다.
특히 최병연 팀장의 실적을 가로챈 안국호 부장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너무 노골적으로 한 짓이라서 이게 최병연 팀장이 사표를 내게 된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무리 오성 전자라고 해도 모두 32명이 이주일 사이에 그만둔 일이라서 기획실에도 알려졌다.
가능하면 KM 전자 일에 거리를 두려고 했던 권태성 실장도 굳은 얼굴로 사직서를 낸 연구원의 프로필을 확인하고서야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임권수 부장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조사가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설마 그 몰드 변압기를 말하는 거야? 아니, 그거야 KM 전자 내부 사정을 간단히 확인하려고 한 것뿐이잖아. 그걸로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
권태성 실장 반응은 두 사람이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평소에 냉철하기 짝이 없어서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이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하지만 이유는 있었다.
권태성 실장은 32명의 프로필 중에 오상현 과장의 이력서를 던졌다.
인사 평가에는 B로 분류되었지만, 잠재력은 S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특히 OS 관련된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인재였다.
“…이, 이게 뭡니까?”
“그게 임직원의 진짜 평가서로, 자네들이 아는 프로필은 그저 인사에 평가하는 수단일 뿐이야.”
두 사람은 그제야 굳은 안색을 한 채 갑자기 퇴직서 낸 이들 프로필을 받아서 다 확인했다.
하필이면 그만둬도 전부 조직의 핵심이 될 만한 인재가 다 나가 버렸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권태성 실장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다.
이들은 얼핏 생각해서는 대충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안국호 부장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최병연 팀장 조직을 해체한 후에 그 실적을 가로채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인사 쪽에 압박해서 최병연과 관련된 이들을 상대로 갑질을 한 것이었다.
최근 오성 그룹 구조 조정이 일어난 상황에서 진행된 일이라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권태성 실장은 만약을 위해서 철저하게 지켜보았다.
실제로 사직서에도 아예 노골적으로 안국호 부장과 관련된 일이 나와 있었다.
피곤한 권태성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들 행적에 관해서 확인을 해 봐. 사직서 수리를 막아. 필요하다면 연락을 취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설득해 보고.”
“…알겠습니다.”
* * *
최병연 팀장을 비롯한 이들은 회사를 그만두기 무섭게 KM 전자에 이력서를 냈다.
아직 정식으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서 쉬쉬하지만, 조금만 살펴봐도 금방 이들의 행적을 알 수가 있었다.
최병연 팀장이 아예 안선종 팀장과 만나서 회포를 불었기 때문이다.
무려 40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서 한우 파티를 했는데,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그 내막을 안 권태성 실장은 분노했고, 최민혁 실장의 배후로 생각한 장승일 실장에게 직접 찾아가서 항의했다.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당신네 정말 우리랑 해보자는 겁니까?”
“네?”
영문을 잘 모르는 장승일 실장은 아침부터 찾아온 이 불청객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회사 임직원 32명을 몽땅 데려갔는데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제야 눈치를 챈 장승일 실장은 묵묵히 듣기만 했고, 32명이나 되는 오성 전자 직원을 빼돌렸다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최 실장님 솜씨인가?’
“으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도 우리 기조실 직원을 몰래 데려갔지 않습니까. 이런 행동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닙니까?”
32명의 프로필을 패대기친 권태성 실장은 분노했다.
“이들은 모두 오성 전자의 핵심 인재로 따로 관리합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모조리 다 빼내 갔는데, 그런 말이 나옵니까?”
프로필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장승일 실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내막을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 역시 KM 그룹 내의 핵심 인재는 자신이 다 따로 관리하기 때문이다.
오성 전자 내에서도 난다 긴다 하는 최고의 엔지니어만 다 빼돌렸으니, 권태성 실장이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으음, 대충 이해는 됩니다만 딱히 우리 쪽에서 적극 나서지도 않는 상황에서 그쪽 직원이 그만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 회사 내밀 기밀을 빼돌린 것이면 당장 소송을 걸겠습니다!”
“…설마 그런 일까지 하겠습니까.”
“두고 봅시다!”
단단히 열 받은 권태성 실장은 정말 법정 소송까지 각오하는 것 같았다.
장승일 실장은 결국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응, 난데, 차 좀 준비해. 아, 최 실장님에게 전화해서 약속도 좀 잡아.”
* * *
한창 콜린스 작업에 정신이 없던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이 약속을 잡기가 무섭게 나타나자 고개를 갸웃했다.
“또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겁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니, 정말 몰라서 그런 겁니다.”
어리둥절한 최민혁의 얼굴을 보자 장승일 실장도 눈살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특히 권태성 실장이 소송을 불사할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아, 그 일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오성 전자 법무 팀이 달려들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은 오성 전자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할 테니까요. 일테면 신사업인데, 오성 전자랑 엮일 일은 없겠죠.”
“설마 MP3 플레이어 말입니까?”
“네. 장 실장님도 이미 조사를 했을 테니,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놈의 소송을 건다는 말이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그 많은 인력을 스카우트한 겁니까?”
최민혁은 최근 있었던 오성 전자의 행태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특히 노골적인 스카우트 제안에 대해서 언급했다.
“오성 전자가 하는 일을 저라고 못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병연 팀장을 다시 불러들일까 해서 제안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인맥이 다 그만둘 줄은 몰랐네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여기 반 이상은 저도 다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저라고 해서 다른 분야 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니까요.”
“끙.”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장승일 실장은 소파에 풀썩 앉았다.
오혜정 비서는 눈치 빠르게 얼음 주스를 가져와서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린 장승일 실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디자인과 콜린스 프로젝트 현황을 확인했다.
“……?”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도 콜린스 디자인을 보자 화들짝 놀랐다. 그는 최민혁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콜린스 프로젝트를 현황을 확인하고는 입을 딱 벌렸다.
“이, 이게 뭡니까?”
최민혁도 어차피 기회가 되면 장승일 실장에게 알리려고 했다.
“아, 안 그래도 장 실장님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잘되었네요.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콜린스 프로젝트입니다.”
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치고는 이미 결과마저 다 나와 있었다.
“설마 이거 시제품은 아니겠죠? 아니, 프로젝트를 이제 막 시작했다면서 샘플이 벌써 나왔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건…….”
“아.”
최민혁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툴툴거렸다.
“기존 모델을 가지고 약간 변경을 한 것에 불과해요.”
“이게 이미 진행된 프로젝트였다는 말입니까?”
“넵. 그래서 최병연 팀장을 다시 불러들이려 한 것이죠.”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장승일 실장은 묵묵히 콜린스 프로젝트 보고서를 확인했다. 그는 보고서를 읽으면서 계속 탄식하기만 했다.
마른하늘에 뚝 떨어진 콜린스 모델.
이건 비디오 특허 열 가지보다 더 황당한 결과였다.
딱 봐도 최소 개발 기간이 3년은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
“…설마 KM 전자 지분을 싹쓸이한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눈치 빠른 장승일 실장의 지적에 움찔한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닌 게 아니라 최두진 사장의 지분과 최용욱 회장의 지분이 문제였다.
최두진 사장의 지분은 헐값 매입 논란이, 최용욱 회장 지분은 증여에 따른 세금이 문제였다.
만약 콜린스 모델이 대박을 친다면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최민혁도 국세청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면서 툴툴거렸다.
“개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일로, 지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뭐, 원하면 증거도 보여줄 수 있어요.”
“그렇다고 믿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최민혁도 확실히 자신의 판단이 바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긴, 콜린스가 대박만 나도 첫째 큰아버지를 비롯한 별의별 인간이 다 달라붙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