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그건 더 이상하죠. 이제 대학교 1학년인 최민혁 실장이 뭘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글쎄.”
아마 권태성 실장도 최민혁에게 당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직접 마주한 최민혁의 첫인상이 그만큼 강렬했다.
물론 그 이후의 일도 그의 상상을 가볍게 벗어났다.
이제는 최문경 부회장의 꼼수라는 것을 알아도 상관이 없었다.
“정말 모를 일이군요. 하지만 이미 몇 년 지난 일인데, 저라고 해서 아는 것은 없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말리는 사람조차 물린 채 그냥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권태성 실장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몰드형 고압 변성기를 살폈다.
‘이번 조직 재편에서 불이익을 꽤 받았는데, 그 때문이겠지. 골치 아프네. 이 변성기는 관련 특허가 너무 많아. 아예 베끼려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만들었어. 뭔가 있기는 있다는 소리인데, 다른 채널 통해서 알아봐야겠어.’
* * *
최병연도 애초에 다시 오성 전자를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주변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야비한 수법을 사용하는 기획실 행태를 보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권태성 실장의 행적을 조성돈 팀장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에게 연락받은 최민혁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최민혁이 전화를 받자 최병연도 크게 당황해서 잠깐 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오성 전자의 행동이 너무 괘씸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기획실에서 작정하고 움직이는 것으로 압니다. 보통 저 정도 진행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저희도 그래서 똑같이 한 겁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데, 그 시작이 최병연 팀장님을 스카우트한 겁니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깨달은 최병연 팀장은 탄식하고 말았다.
[하, 그게 또 그렇게 됩니까?]
[저는 절대로 당하고는 그냥 있지 않습니다. 오성 전자가 우리 쪽 사람을 빼 가는데, 우리라고 해서 못할 것이 있습니까?]
[아, 네.]
저쪽에서 공격하는데, 이쪽에서 반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 상대가 오성 전자라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최병연 팀장은 순간 전혀 생각도 못 한 대답도 최민혁에게 들었다.
[만약 과거 최 팀장님이 자발적으로 KM 전자를 나갔다면 이런 연락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회사 고위직에서 직권을 남용해서 생긴 문제 아닙니까. 그건 범죄행위로, 예외적인 경우죠.]
[그렇지만 이미 TV 설계 쪽은…….]
[조 팀장 통해서 전달했지만, 최 팀장님에게는 TV 설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쪽 일을 맡길 겁니다. 칩 설계를 포함한 전혀 다른 제품입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그쪽에서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더 데려오세요. 제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니까요.]
[…네.]
최병은 팀장은 그제야 최민혁 의도가 평범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단순히 자신에게만 연락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지?’
웃기는 사실은 조창호 차장을 비롯해서 당장 머리에 떠오른 사람만 다섯 명이 훌쩍 넘는다는 것이다. 다들 오성 전자에서도 독보적인 실력자였다.
‘하, 이거야 원.’
* * *
최병연 팀장은 이전과는 달리 이직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미 오성 전자에 있으면 회사 생리를 경험했기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비록 최훈열 전무와의 갈등 때문에 고생도 했지만 KM 전자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 스트레스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최고의 회사였다.
비록 연봉은 좀 깎이기는 하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봐서는 콜린스 모델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을 테니,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과 같이 이직한 과거의 대형 팀 소속 임직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오성 전자에 와서 알게 된 조창호 차장을 따르는 이들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들 중에는 OS 쪽의 전문가인 오상현 과장도 이제는 치를 떨었다.
“뭐 툭하면 바꾸는데, 도대체 일하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놈의 새끼들은 OS가 뭔지도 잘 몰라요. 프로그램은 베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월급이 많이 깎일 거야. 오성 전자처럼 돈이 많은 회사는 아냐.”
“이번에 STB 사업부를 매각하고, 협력업체랑 협상해서 1,300억을 챙긴 것으로 압니다. 그 정도면 돈 많은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는 예상 밖의 호응에 난감했지만 알게 모르게 조직 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이들이라서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모든 조직이 그렇지만 고름 짜듯이 쥐어짜는 오성 전자 행태에 반감을 품은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이들 이력서를 받아서 보낼 수밖에.’
* * *
“32명이라…….”
최민혁은 생각보다 많은 지원자 이력서를 확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칩 엔지니어부터 시작해서 OS를 비롯해 필요한 이들이 다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력도 빵빵했다. 대다수가 석사급 이상의 인물로, 대학 동아리에서부터 실적을 쌓은 소위 말하는 전문가였다.
기존 STB 사업부 소속 엔지니어보다 질적으로도 격이 달랐다.
애초에 엔지니어 속성상 튀는 인물이 주였는데, 최민혁이 원하는 인재였다.
심지어 이들은 최병연 팀장이 어느 정도 그 실력을 검증하고 확인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예상보다는 많은 지원자 숫자에 당황했다.
“너무 많은 것이 아닐까요?”
“아뇨. 다 필요합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제품을 개발하는데 이들이 다 필요합니까?”
“MP3 플레이어죠.”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MP3 플레이어를 개발하는 데 굳이 이렇게까지 많은 이들이 필요합니까?”
“아마 필요할 겁니다. 크게 보면 기존 칩을 이용한 제품과 전용 칩을 이용한 제품 두 가지로 나누어서 진행할 테니까요.”
“그러면 OS 쪽은 필요 없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펌웨어가 주겠지만 이와는 별개로 독립된 모바일 OS도 같이 할 겁니다.”
“모바일 OS라면 혹시 임베디드 OS를 말하는 겁니까?”
“그와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구조 자체가 틀립니다. 객체지향형 형태의 새로운 OS를 고안할 것이니까요.”
“…….”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이 풀어놓은 보따리 일부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미 MP3 플레이어가 단순히 그냥 제품이 아니라 뭔가 연관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규모가 그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최민혁이 굳이 객체지향형 OS를 염두에 둔 것은 앞으로 애플과의 협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윈도우와는 구조 자체가 다른 형태로, 후일 20년이 지난 후에야 서서히 그 빛을 발하는 구조다.
시작부터 그 구조를 모태로 해서 기반을 다지려는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실력자가 필요해. 그것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들로.’
그런데 마침 최병연 팀장이 추천한 오상현 과장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리눅스 전문가로, 대학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한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비전까지 전혀 모르는 조성돈 팀장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객, 아니, 객체지형형 OS가 무엇입니까?”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집요하게 질문하자 피식 웃었다.
“아니, 기획 팀장님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저에게 조사해서 따로 보고를 올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조성돈 팀장도 당혹스러웠다. 물론 콜린스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라서 신규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했다. 그런데 그 윤곽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TV 사업부는 지금 당장 우리를 먹여 살리는 사업이라면 MP3 플레이어는 향후 우리 회사가 나아갈 미래 방향입니다. 그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MP3 플레이어는 단순히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기반 기술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겁니다. 그래서 MP3 플레이어 개발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확립시킬 수단이니까요.”
“잘은 모르지만, 콜린스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런데도 정말 TV 사업부를 매각하실 생각입니까?”
“CRT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어요.”
“하면 MP3 플레이어 쪽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는 말씀이군요.”
최민혁은 방긋 웃기만 했다.
“그쪽이라면 세계 그 어떤 전문가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이 조금 이해가 됐다.
‘확실히 아날로그 TV에 이은 디지털 TV는 자본이 너무 많이 들어가. 우리 같은 중견기업에서 할 만한 사업은 아냐. 결국 TV 사업부를 고가에 팔아치우기 위해서 지금 일을 벌인다는 말인데, 허참.’
* * *
임권수 부장은 KM 그룹에 있을 때도 기회가 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그가 굳이 KM 그룹 기조실에서 나온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장승일 실장은 매사에 일을 크게 벌이지 않아서 티가 나지 않았다.
임권수 부장이 의도적으로 제안한 모든 일이 장승일 실장 선에서 멈춘 것이었다.
거기에 자기를 의도적으로 죽인다고 장승일 실장을 의심했고, 최용욱 회장의 신뢰를 받는 장승일 실장을 질투했다.
그런 차에 이직했으니.
오성 전자 기획 팀에 와서 KM 전자와 관련된 일을 맡게 되자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오늘도 최병연 팀장을 만나서 정보를 캤다.
“정말 지긋지긋한 분이네요.”
“하하하,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지난 일은 제가 다시 사과하겠습니다.”
“아니, 아는 게 없다고 하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권 실장님 지시를 받아서 안국호 부장 일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회사 감사 팀에도 통보할 겁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최병연 팀장은 너무 완고해서 차선으로 이미 그와 안면이 있는 이들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이직 의견이 다 끝난 마당이라서 임권수 부장을 피해 다녔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짜증이 난 임권수 부장은 냉랭한 시선을 한 채 쳐다보는 황광수 차장을 보았다.
“황 차장은 왜 그런 눈으로 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권 실장님이 비록 이번 일에 대한 실권을 맡기기는 했지만,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임권수 부장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일축했다.
“자네는 KM에 있을 때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그러니 일을 제대로 해도 평가를 못 받잖아.”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장 실장이 자네 실적을 얼마나 엎어버렸는지 몰라?”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장 실장님 판단이 맞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사 옳은 일이라고 해도 조직에 피해를 준다면 보류하는 것이 맞으니까요.”
“흰소리는 그만해. 결국, 자네를 죽이려고 장 실장이 그 짓을 한 거야.”
“정말 답답합니다.”
“정신 좀 차려!”
일방적인 임권수 부장의 태도에 황광수 차장은 한숨을 내쉬다가 불쑥 말했다.
“그러면 권 실장님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오성 전자 기획실장이 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입니까. 그런데 굳이 이 일에 자신이 직접 매달리는 것을 보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겠지.”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만큼 타격이 크겠죠. 특히 데이콤 지분 인수에 대한 손실 때문에 위에서 박살 나기도 했고요.”
“무슨 말이야?”
“지난 일도 저에게 다 책임을 교묘하게 뒤집어씌우더군요. 그런데 굳이 KM 전자 관리 일에서는 손 떼고, 팀장님에게 그 일을 맡긴 것도 잘못되면 희생양이 필요해서일 겁니다.”
“하,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분노한 임권수 부장.
하지만 KM 전자와 관련된 일로 인해서 독박을 쓴 황광수 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야 차장 직급이니, 잘리지 않는다.
그런데 비디오 특허를 포함해서 이번 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긴 내가 충고한 다음에 임권수 부장을 데리고 왔으니까.’
“만약 이번 일도 실패한다면 임 부장님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심지어 KM 전자와 진행했던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
등골이 서늘해진 임권수 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바보가 아닌데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기획 3팀 팀장에 내정한 것도 따지고 보면 비정기 인사이동이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고민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