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02화 (102/1,021)

#102

최병연 팀장은 조창호 차장만이 아니라 자기 밑에 있는 대부분 직원이 이직에 대한 것을 묻자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뜻밖에 걱정하는 이가 많았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막바지인 프로젝트를 강제로 빼앗은 것은 나가라는 의도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부인을 해도 상황이 상황이라서 쉽게 수긍하는 이는 없었다.

안국호 부장 이전에도 몇 번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병연 팀장은 텃세라고 생각해서 지난 일을 잊으려고 했다.

심지어 안국호 부장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최소한 프로젝트 진행 자체를 막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최훈열 전무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팀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이현탁 과장이 말했다.

“최 부장님, 103 중회의실에 가보세요. 기획실 직원이 지금 부장님을 찾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알면 미리 말씀드리겠죠. 하지만 표정 봐서는 안 좋은 일 같더라고요.”

“설마 PCS 프로젝트 때문에 그래?”

“안 부장이 아무리 인간쓰레기라도 해도 프로젝트를 도둑질하고 나서 또 수작을 부리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확인했으니까요.”

“알겠어.”

‘이게 무슨 소리야?’

* * *

수원 사업장 내에는 오성 전자의 여러 사업부가 같이 혼재했다.

사업부마다 다 연구소가 있고, 이와 연계된 공장도 있다.

최병연 팀장은 늘 팀 모임을 하는 103호 중회의실에 들어가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기획실 직원을 발견했다.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저 사람은 권태성 실장?’

오성 전자 기획실장으로, 회사 내에서 꽤 알려진 인물이다. 별다른 라인도 없이 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기 일 처리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다만 사내 소문으로는,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이 임직원을 잘라버린다고 한다.

“난 권태성 기획실장이네.”

자리에 앉자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데, 주로 KM 그룹을 비롯한 중견 기업을 담당하는 기획 3팀 직원이었다.

임권수 부장이란 자는 마치 자신이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PCS가 워낙에 중요한 프로젝트라서 실력이 확실한 안국호 부장님이 마무리할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최 팀장님이 양해하셔야 합니다.”

임권수 부장은 마치 안국호 부장 대리인이라도 되는 양 그를 찬양하면서도 구조조정 중에 일어난 일을 이해해야 한다고 다독였다.

첫인상부터 밥맛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이제 와서 왜 지난 이야기를 자꾸 끄집어내는 것일까?’

임권수 부장 딴에는 최병연 팀장을 위로해 주는 척 말했지만, 오히려 그게 사람 속을 더 뒤집었다.

그런데 최병연 팀장은 뒤늦게 권태성 실장 외에 가장 늦게 소개를 하려는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

“황광수 과장?”

“…기억하시는군요. 설마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은 차장입니다.”

“쯧.”

최훈열 전무와 갈등 때문에 본사에 잠깐 갔을 때 본 적이 있던 인물이었다.

미국 출장 때문에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임권수 부장이 KM 그룹 기획 조정실에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자 착잡했다.

자기 딴에는 오성 전자가 KM 전자보다 월등하다는 점을 내보이기 위함이다.

최병연 팀장은 지금 생각보다는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서 있어서 임권수 부장의 사탕발림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자, 우리는 같은 가족 아닙니까. 제가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권태성 실장은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나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임권수 부장은 어느 정도 대화할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가방에 든 물건 하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얇은 형태의 특이한 몰드형 고압 변성기였다. 대부분이 두꺼운 형태와는 달리 권선으로 에폭시수지를 사용해서 절연화된 형태다.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

하지만 최병연 팀장은 마치 총알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몰드형 고압 변성기를 쓰다듬었다. 비록 형태는 많이 바뀌었지만, 골격은 자신이 설계한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이 고압 변성기를 설계하다가 손톱이 부러지고, 납땜할 때 실수로 인두기에 화상을 경험했다. 그 쓰라린 기억은 자기 몸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것이었다.

임권수 부장은 마치 먹이는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쳐다보았다.

“최 부장님이라면 그게 무슨 물건인지 아시죠?”

뒤늦게야 최병연 팀장은 왜 임권수 부장이 마치 가족인 양 나왔는지 깨달았다. 이 물건이 여기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마 연구소에서 빼돌린 건가?’

오성 전자의 다양한 수법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황한 내심을 드러낼 정도로 사회 초년생은 아니었다.

“글쎄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설마 협력업체에서 빼돌린 것은 아니겠죠?”

임권수 부장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계열사 납품 샘플로 대림 전자라는 협력업체를 통해서 받은 겁니다.”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다.

KM 몰드 변성기는 애초에 TV 사업부에서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니다. TV 사업부가 대학 연구 팀과 같이 주로 설계와 테스트를 담당했고, 샘플 제작은 대림 전자에서 진행했다.

대림 전자는 이 고압 변류기만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고,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KM 몰드 변성기 관련 특허는 TV 사업부에서 다 가지고 있다.

최병연 팀장은 물끄러미 임권수 부장을 쳐다보았다.

‘아마 KM 전자 내부에 손을 쓰기 어려워서 협력업체를 조사했을 거고, 오성 계열사를 통해서 샘플을 얻었겠지.’

그런데 어차피 이 KM 몰드 변성기는 특허로 다 묶여 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설사 오성 전자가 저 샘플을 가지고 베끼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대림 전자라…….”

“이제 기억나시죠? 이 몰드 변성기와 관련된 것을 말 좀 해주십시오.”

오성 전자에서 작년에 했던 프로젝트도 가물가물한데, 그보다 몇 년 전에 같이 일했던 대림 전자에 대한 기억이 날 리 없었다.

하지만 최병연 팀장은 몰드 변성기를 만지자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이 고압 변성기 개발 과정에 흘린 땀…….

‘내가 왜 이걸 잊었을까?’

최훈열 전무가 그만큼 싫었다. 그 기억을 머릿속에 지워 버렸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했던 일이 다 같이 쓸려나갔다.

그런데 뒤늦게야 프로젝트를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몰드 변성기 개발이 끝났구나. 그렇지. 허,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이게 무엇인지 드디어 깨달았다.

이것만 성공했다면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조사하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위기감을 느낀다면 단 한 가지였다.

‘설마 신제품 개발에 성공한 거야?’

고압 변성기는 콜린스 개발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저 고비를 넘겼다면 다른 고비 역시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조성돈 팀장이 갑자기 나타나서 한 스카우트 제안이 떠올랐다.

톱니처럼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고서야 최병연 팀장은 자신의 태도를 확실히 정했다.

“모릅니다.”

깊은 사색에 잠겨 있기에 조용히 기다렸던 임권수 부장은 분노했다.

“이봐요, 최 부장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당신이 TV 사업부를 주도한 사람이라는 것은 KM 전자 직원이라면 다 알아. 그런데 인제 와서 관련 부품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예상한 지적이라서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최병연 팀장은 오히려 지금까지 고민한 갈등을 완전히 다 털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단호하게 나갔다.

“기억 안 납니다. 솔직히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KM 전자 직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당시 해외에 나가 있었지 않습니까. 당신 담당도 아니었고!”

“그렇습니까?”

권태성 실장도 알아서 최병연 부장에 압력을 넣을 것이라 기대해서 내버려 뒀지만,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얼른 끼어들었다.

“임 부장, 말을 조심 좀 해. 자네보다 경력도 많은 분이지 않나.”

“죄송합니다.”

눈치 빠른 그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자네 의욕이 넘치는 것은 알지만, 최 팀장은 우리 오성 임직원이야. 마치 범인은 조사하듯이 대우하면 어떻게 하나?”

“조심하겠습니다.”

권태성 실장은 최병연 팀장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그도 최병연 팀장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냉막하다는 것을 깨닫자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내일 다시 한번 이야기할 테니, 잘 좀 생각해 보게. 자네 프로젝트 사정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조치하겠네.”

“네.”

아마 최민혁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최병연 팀장도 권태성 실장 제안에 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에 안 들어.’

* * *

권태성 실장은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임권수 부장을 갈구었다.

때문에 임권수 부장은 마치 복날에 두들겨 맞은 개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다음 날에 다시 최병연 팀장을 보자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의욕이 앞선 나머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권태성 실장 역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그리고 안국호 부장 사건은 내가 따로 확인을 해봤는데, 참, 할 말이 없네. 거기에 따른 보상을 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미 마음을 굳힌 최병연 팀장은 권태성 실장조차 부담스럽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도 몰드 변성기를 확인해 봤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회사에서 한 일이라서 자료도 없습니다.”

“그 친구도 참. 자네는 오성 전자 직원이잖아. 그런 점을 좀 생각하게.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이 KM 몰드 변성기 기술력이 만만치 않아. 그런 물건을 대림 전자에서 설계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특허를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어.”

최병연 팀장도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나서려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저건 왜 조사하는 겁니까?”

“KM 전자 때문이야.”

“그게 더 이상합니다. 대운 전자만 되어도 제가 이해를 합니다. 아니, 오성 전자가 뭐가 아쉬울 것이 있어서 KM 전자를 신경 씁니까?”

권태성 실장도 갑자기 최병연 팀장의 태도가 바뀌자 흠칫했다.

“솔직히 대형 TV 분야에서만큼은 KM 전자가 다른 가전 3사보다 앞선 것은 사실이잖아.”

하지만 이미 오성 전자에 오만 정이 떨어진 최병연 팀장은 이번 기회에 정보라도 얻자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면 저건 단순한 부품이 아닙니까? 왜 KM 전자의 부품 하나 가지고 이렇게 집착하는 겁니까?”

“그 부품이 가볍지 않으니까. 우리 기획 팀이 사전에 검토한 대로라면 이 몰드 변성기는 소형화와 저손실화가 가능해. 당장 프린트에만 적용해도 그 크기를 줄일 수 있으니까.”

오성 프린트에도 적용이 가능할 정도로 파급 효과가 꽤 크다는 의미였고, 품질이 그만큼 다른 고압 변성기에 비해서 월등했다.

심지어 일본이나 독일 제품보다는 한 단계 위라는 것이 오성 계열사 내부의 평가였다.

권태성 실장은 대형 TV 두께를 줄이는 데 필요하다는 TV 사업부 담당자의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최병연 팀장은 혀를 내둘렀다.

‘아직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대림 전자 통해서 저 몰드 변성기만 얻었나 보군. 특허도 확인했을 테니, 똥줄이 타겠지.’

하지만 그는 그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 좋은데, 오성 전자가 고작 이런 거 때문에 이제 망해간다는 소문이 자자한 KM 전자를 너무 과하게 신경 쓰는 것 아닙니까?”

권태성 실장도 잠깐 머뭇거렸다. 그는 결국, 이 사태를 만든 임권수 부장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임권수 부장은 몸을 움찔한 채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권태성 실장은 뒤늦게 탄식했다.

“임 부장이 자네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내가 다시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최민혁이 기획실장으로 취임한 이후에 많은 것이 바뀌었어. STB 사업부도 매각하고, 조직을 다 정비 중이야. 심지어 최민혁 실장이 최용욱 회장의 KM 전자 지분까지 증여받았어. 그러니 그냥 간과할 수만은 없잖아.”

“…….”

대수롭지 않게 나온 말에도 최병연 팀장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머리를 굴렸다. 조성돈 팀장에게 뜬금없는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안 것이었다.

‘설마 이 모든 것이 최민혁 실장 때문이었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권태성 실장은 오성 전자 기획실을 움직이는, 나름 실세 중의 실세다. 고작 KM 전자 따위에 신경을 쓸 사람은 아니었다.

호기심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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