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6화 (76/1,021)

#76

비디오 특허를 꼼꼼하게 확인하던 이정원 과장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채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저도 지금 알았습니다.”

“아니, 담당자가 모른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재무 팀이나 임기석 부장님에게 물어보니, 김 상무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비밀리에 처리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최민혁 지시를 받은 임기석 부장이 김현우 상무에 따라주는 척했을 뿐이다.

열 가지 특허와 이들 특허에 대해서 같이 연구하는 연구소 실적 역시 절대 가볍지가 않았다. 기존 특허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었다.

박상기 차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연구 비용만 해도 수십억은 족히 들어갔을 텐데, 왜 우리 기획 팀에서도 몰랐을까요?”

배종대 과장이 툴툴거렸다.

“그것도 문제네요.”

이번에 시선을 받은 조성돈 팀장도 참담했다.

“김현우 상무님이 이렇게 나올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기획 팀은 한마디씩 이야기하면서 자괴심을 느꼈다.

기획 팀이 이제까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박상기 차장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몇 년간의 연구 결과가 이렇게 나왔는데, 정말 매각해도 되는 겁니까?”

“글쎄요.”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박상기 차장은 문득 최민혁이 부른 900억이라는 액수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 특허가 가치가 있다고 해도 900억은 좀 과한 것 같습니다. 실장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정권 과장 생각은 달랐다.

“우리 KM 전자 쪽은 파급 효과가 적지만 오성 전자는 다를 겁니다. 만약 이게 표준화가 된다면 비디오 관련 제품에서 매년 나오는 특허료만 해도 한 해에 몇 천억은 족히 될 겁니다. 그게 무려 이십 년을 잡으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될 겁니다.”

“흠.”

그제야 다들 왜 갑자기 오성 전자가 툭 튀어나왔고, 심지어 왜 김현우 상무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는지도 깨달았다.

‘어이가 없네.’

하지만 정성근 대리만큼은 한 가지 맹점을 지적했다.

“다 좋은데, 이거 담당자인 이 과장님도 모른다면 언제부터 누가 연구한 것일까요?”

“임기석 부장님이 했을 거야.”

“하지만 오성 전자도 수백 명의 박사급 연구원과 수백억을 퍼부어도 결과가 나오지 않잖아요. 단 한 사람의 능력으로 그게 가능합니까?”

“그거야…….”

그제야 다들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임기석 부장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기획 팀 내에서도 나왔지만 이제까지 이런 놀라운 특허를 고안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특허 출원에 앞서서 법무 팀과도 상의하는데, 그 과정을 중재하는 것은 기획 팀이기 때문이다.

중간 과정이 사라진 것이었다.

차마 김현우 상무가 이 특허를 고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최민혁이 뭔가를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시기적으로도 맞지가 않았다.

‘하지만 최 실장님이 뭔가 하기는 했을 거야. 그렇지 않고야 말이 안 되잖아. 아니,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다들 서로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설마 했지만,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작 100억 내외에서 결정이 날 것이라는 매각 협상이 예상과는 달리 간단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것도 확신했다.

‘매각하기는 하는 거야?’

* * *

기업은 급격한 경영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아웃소싱이나 구조조정과 같은 다양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외형 위주의 성장 전략 과정에서는 비효율의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영 성과를 개선하기 위해서 매각과 같은 구조조정을 한다.

STB 사업부 매각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갑툭튀로 튀어나온 열 가지 비디오 특허가 문제였다.

장승일 실장은 안현수 팀장을 비롯한 본사 인원을 데리고 최민혁 실장을 찾았다.

하지만 최민혁은 특허 문제보다는 오히려 안현수 팀장에 더 주목했다.

“안현수 팀장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오히려 더 놀랐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 때문에 약간 실망했던 안현수 팀장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협상 자리에서 최민혁이 보여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최민혁은 물론 좋은 인상을 줬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나쁘지 않아.’

어차피 안현수 팀장은 KM 그룹을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다.

따라서 지금 좋은 이미지를 준다면 벨린 투자로 끌어들이는 것이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이번 협상을 명분으로 그를 호출한 것이었다.

“안 팀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매각 말입니까? 이미 다 결정이 난 일을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제값을 받고 팔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최 실장님과 동일합니다.”

“900억 말이군요.”

“네. 좀 무리한 요구이기는 하지만 오성 전자도 이제 고민을 많이 할 겁니다. 특히 LC 전자가 알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논지는 결국 매각 대금으로 귀결되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다가 혹시라도 오성 전자에서 딴짓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결국 한 가지 대안을 떠올렸다.

“혹시 소니 연구소 쪽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좋네요. 그쪽 특허 담당자에게 오성 전자 쪽에서 이 특허를 노리고 있다고 정보를 흘려보세요.”

그도 바보가 아니니, 최민혁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 * *

오성 그룹의 계열사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승용차 때문이라고 내부적으로 생각한 이도 많았지만 좀 더 복잡한 요인이 있었다.

대표적인 변화 중의 하나가 미쓰비시 자동차가 포항제철의 냉연강판을 선택한 것이다.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해서 핵심부품은 완벽하게 조달하는 구조로 된 일본 제조업이 변화를 모색했다. 즉 기술 집적도가 높은 주요 부품을 해외 기술 이전을 통한 현지생산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근원에는 역시 엔화 강세를 빼놓을 수가 없다.

채산성의 한계를 경험한 일본 기업은 수직적인 분업 체계가 아니라 수평적 분업 체계로 노선을 변경했다.

오성 전자는 이런 일본 기업의 변화를 이용해서 TFT-LCD 관련해서 후지쓰와 기술 공유에 합의한 것이다.

해외 기술 사업부 권상수 팀장은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 우려했다.

“도시바 측과의 65메가 플래시메모리 공동개발사업 진행은 순조롭습니다.”

“그쪽에서 아무런 태클이 없었고?”

“네. 이번 미쓰비시 사건이 일본 민간 연구소에도 그만큼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쪽과 진행하는 플래시메모리는 관심 밖입니다.”

아직은 플래시메모리 수요가 많지 않아서 특별한 이슈는 없었다.

권상수 팀장은 오히려 다른 한 회사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도시바는 KM 산업과도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기술과 관련해서 공동 기술 개발을 진행한 것으로 이미 확정했습니다.”

정확히는 한일 산업구조 협력 구조로 말미암은 변화 때문이지만 권태성 실장은 이보다는 KM 산업이란 말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KM 산업이 제법 잘나가나 봐?”

“그쪽은 무섭게 수익성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2년 정도만 지나면 저희도 더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할 겁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권태성 실장은 며칠 전에 있었던 STB 사업부 인수 협상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권상수 팀장도 이미 들은 바가 있어서인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STB 인수 말인가?”

“네. 저도 우연히 듣기는 했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요.”

“아니, 자네는 그놈의 원천기술 때문에 도시바에 가서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87년에 세계 최초로 낸드플래시를 상용화한 도시바는 그 위세가 사뭇 뜨겁다. 오성 전자조차 머리를 숙인 채 저자세를 취했다.

덕분에 도시바와 이번 기술 협력에 성공했지만 그게 꼭 평등한 계약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계약서 내에는 로열티 관련해서 일방적인 조건이 적지 않았다.

계약 협상 중에 더러운 꼴을 당한 권상수 팀장도 눈살을 찌푸렸다. 새삼 일본에서 당한 엽기적인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권태성 실장 역시 도시바와 협상할 때 같이 자리한 덕분에 당한 일을 잊지 않았다.

“그 새끼는 우리가 마치 자기들보다 열등 민족인 것처럼 말했잖아. 그런데 그놈의 계약 때문에 아무런 말도 못했어.”

냉랭하면서도 차가운 말에 권상수 팀장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권상수 팀장 고생하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어. 하지만 너무 현실적으로만 보지 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면 그만큼 손해니까.”

“그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KM 전자 측에서 900억을 요구했다고 하던데, 정말 그 제안을 들어줄 생각입니까?”

집요한 권상수 팀장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황 차장이 신경 쓰여?”

사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기획 팀에서 황광수 차장 입지는 더 커진다. 자연스럽게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기획 팀의 한 분야를 맡을 것이다.

무섭게 성장하는 황광수 차장이 부담스러운 권상수 부장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황 차장이 KM 그룹 출신이지 않습니까.”

“황 차장은 인수를 반대하는데?”

“네? 그럴 리가요.”

“정말이야. 이번 일은 좀 더 지켜보자는 식으로 나와.”

“그렇습니까.”

권태성 실장은 두 사람의 알력 관계를 잘 아는 터라 굳이 그 점을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처럼 이용하고 있으니까.

권상수 부장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일본 소니 측에서 이번 매각에 대해서 안 것 같습니다.”

그는 KM 전자 측에서 흘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갈았다.

‘이 새끼들이.’

“반응이 어떤데?”

“소니, 미쓰비시, 마쓰시타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특히 소니 측 연구소 쪽 담당자는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습니다. 당장 달려가면서 확인하는 것을 제가 봤으니까요.”

“소니가 이쪽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었군.”

“그쪽이 아무래도 모바일 멀티미디어 매출이 높습니다. 만약 이 특허를 뺏기기라도 한다면 타격이 우리에 비할 바는 아닐 겁니다.”

권태성 실장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자네는 그런 사실까지 알았으면서도 이번 협상을 반대하는 거야?”

“전 반대한다고 말 안 했습니다. 시간을 들여서 확인해 보자고 했을 뿐입니다. 이동호 교수를 아는 연구 팀 이야기로는 말도 안 된다고 하니까요.”

“그건 나중 일이야. 만약 LC 전자에, 아니 소니 그놈들이 중간에 끼어들면 어쩔 생각이야?”

“그게 사실…….”

설마 기술 덕후인 소니가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막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일본 기업이 외국 원천 기술을 사들이는 데는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게 꼭 한국 기업이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설마 그때 가서 KM 전자에 수백억 로열티 협상을 하자는 거야. 새로운 멀티미디어 제품이 나올 때마다 협상을 또 따로 해야 해. 더욱이 이번 일은 MPEG 위원회가 관련된 특허 시스템과도 관련이 있어서 압력을 넣기도 어려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 뜻은 잘 알았어.”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 마음 모르는 것 아냐. 다만 너무 선을 넘지 마. 중요한 것은 회사 이익이니까.”

“알겠습니다.”

* * *

모든 일이 딱 정해진 타이밍을 놓치면 일이 어려워진다.

지나간 기회는 또 오지 않는다.

권태성 실장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기에 이번 STB 사업부 인수에 대해서는 다른 중요한 일보다 우선순위를 높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인맥을 다 동원해서 다시 재검토했다.

비록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깽판 놓기는 했지만, 이번 특허를 절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이번 일 때문에 자문한 모든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만약 이번 인수는 반드시 성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결국 오성 전자 사장을 거쳐서 그룹 사장단 회의까지 올라갔다.

권태성 실장도 이 때문만큼은 크게 긴장했는데, 결과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KM 전자 STB 사업부 인수를 성사시킬 것.]

인수 대금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언급이 없었다.

그냥 무조건 인수하란 지시만 내려왔다.

그는 이제 이게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알자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했다.

하지만 황광수 차장은 여전히 불안했다.

“이제 제가 뭐라고 해봐야 쓸데없는 소리만 될 것 같습니다. 전 가능하면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대금 자체를 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KM 전자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오늘도 최훈열 전무의 재판 때문에 공영방송에서 또다시 잠깐 동안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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