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7화 (77/1,021)

#77

언론은 이번 기사를 마치 특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다 보니 KM 전자 주가는 결국 1,570원을 한 번 찍고 말았다.

상장 이래로 최저가를 갱신한 KM 전자는 여러 증권 회사에서도 두들겨 맞았다.

줄줄이 엮여 들어간 이들 재판도 계속해서 열리는 중이다.

악재가 첩첩이 쌓여서 더 공격할 수단도 없었다.

하지만 황광수 차장은 은근히 비자금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아직 비자금 부분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건 안 돼.”

“그것이면 900억이 아니라 600억, 아니, 400억까지 깎을 수 있습니다.”

“사장님 이야기로는 윗선에서 이미 따로 주의를 받은 내용이야. 그러니 자네도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낭비하지 마.”

“네? 서, 설마 비자금에 다른 정치인이라도 관련이 있는 겁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하.”

이미 KM 그룹에 있을 때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 황광수 차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나서야 알았다.

이미 KM 전자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까여서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이런 기업을 상대로 무슨 다른 수단을 손쓰기도 어려웠다.

“세무 조사는 어림도 없겠군요.”

“국세청 관료는 아마 경고로 우리 회사를 상대로 세무조사하고도 남아.”

“결국 이번에 입은 손실을 우리를 상대로 보상받겠다는 심리군요.”

“그렇겠지.”

권태성 실장도 왜 최민혁 실장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주장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황광수 차장을 비롯한 다른 팀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도 KM 전자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뾰쪽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 특허 가치를 가지고 다시 재평가를 해봤지만, 마땅히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새끼들이 진짜 욕심은 많아서. 그래도 900억은 아니잖아!’

* * *

최민혁은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지만 겉으로는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 이 일보다는 다른 처리할 일이 더 많았던 것이다.

김명준 과장은 이런 최민혁 내심을 모른 척 슬쩍 차선을 제시했다.

“적당히 협상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안 됩니다.”

단호한 최민혁.

심지어 조성돈 팀장도 왕고집 최민혁이 걱정스러워서 몇 번이나 말했다.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미 매각이 결정이 난 마당에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아무리 오성 전자가 돈이 많다고 해도 특허만 보고 900억을 내놓을 리가 없습니다.”

“땅이나 공장도 있습니다.”

“그거 다 합쳐서 아무리 잘 쳐줘도 150억을 넘지 못합니다. 암묵적으로 기획 팀에서 고려한 금액이 170억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지 않습니까?”

안다.

하지만 최민혁은 아쉬운 것이 없었다. 다른 일이 좀 늦어진다고 해도 그 일이 꼭 예상대로 쉽게 풀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또 이런 일이 생길 거야.’

그때를 위해서라도 이번 협상 결과가 중요했다.

그런데 오혜정 비서가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나타났다.

“저기 실장님, 일본 소니 측에서 비디오 특허 관련해서 미팅을 요청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소니요?”

안현수 팀장에게 부탁하기는 했지만 벌써 이렇게 연락이 올지는 몰랐다.

최민혁도 뒤늦게 소니가 이 MPEG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는 것을 새삼 인식했다. 막상 그렇다고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해본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는 곰곰이 이 상황을 고민하다가 뒤늦게야 KM 전자가 사업 다각화 측면에서 마쓰시타와 협상을 맺게 되는 것을 기억했다.

마쓰시타는 하반기에 KM 전자 대리점을 통해서 전 제품을 판매키로 한다.

이 일은 KM 전자의 매출 한계 때문에 진행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소니와 같은 기업 역시 협상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다른 회사와 법률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안현수 팀장이라면 이들과도 사전에 물밑 접촉을 했을 것이다.

최민혁은 똥줄이 탄 소니를 만나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소니가 낼 미래 MPEG 관련 특허를 다 기억했는데, 괜히 긁어서 의심을 주기는 싫었다.

이보다는 이미 낚시 미끼를 던진 마당에 느긋하게 기다렸다.

조성돈 팀장이 갑자기 바뀐 일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들고 찾아왔다.

“저기 실장님, 아무래도 이번 매각은 좀 더 시간을 두고 다시 평가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건 안 됩니다.”

“하지만 저희 쪽에서 다시 분석한 결과로는 이 특허 가치를 지금 이 시점에서 평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국내 방송업체, 아니 그들이 힘들다면 해외 업체와 같이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만약 과시적인 결과가 나온다면 이번 협상은 차라리 재고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진짜 표준화가 된다면 그래야죠. 돈 낳는 거위를 파는 정신 나간 이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안 된답니다. 이 특허의 문제점은, 구현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건 섣불리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직접 해보지 않고서야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해보면 또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말로 하는 것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특허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나 마찬가지였다.

최민혁 역시 이 비디오 특허 미래를 몰랐다면 반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현하는 게 몹시 어렵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어갑니다. 단순히 이 장비만이 문제가 아니라 받는 쪽에서도 문제가 돼요. 그것 자체가 상업화에 큰 발목을 잡을 겁니다.”

“하지만 이보다 나은 대안이 없는 지금에는 그게 최선입니다.”

최민혁은 묘한 미소를 한 채 눈빛을 반짝였다.

“만약 있다면 어때요?”

“네?”

조성돈 팀장도 놀라서 눈만 끔뻑였다. 그가 지금 가지고 온 보고서는 단순히 기획 팀만이 아니라 관련 연구소 전문가 통해서 자문한 거다. 최민혁의 의견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책상에 몰래 넣어둔 서류 하나를 꺼내서 조성돈 팀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 맙소사!”

그 역시 최근 비디오 관련 특허를 조사하면서 MPEG 특허에 관해서 눈을 뜬 상황이다. 자신이 본 기술 보고서 자료는 아주 간결함에도 효율은 더 높았다.

심지어 구체적인 설계 개요도 나와 있었는데, 기존 특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론적인 측면은 비슷하지만 그걸 구현하는 방식 자체가 아주 달랐던 것이었다.

비록 아이디어에 불과하지만 두 가지 자료를 비교하고서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 자료는 어떻게 구한 겁니까? 설마 따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겁니까?”

최민혁은 복잡한 대답보다는 간단하게 한마디만 했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두세요.”

“후유, 알겠습니다.”

“아, 그 자료는 저 주시고요.”

“…네.”

조성돈 팀장은 입맛만 다신 채 최민혁 눈치를 힐끗힐끗 보다가 힘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죽어라고 대안을 연구했는데, 그게 다 헛짓이 되어버린 것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오히려 피식 웃으면서 지켜만 봤다.

옆에서 지켜만 보던 김명준 과장도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실장님, 저도 그 분야를 잘 모르지만, 꼭 이렇게 복잡하게 처리하셔야 합니까?”

“네. 으음, 본게임 앞서서 튜토리얼 훈련을 시킨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튜토리얼요?”

“네.”

그는 더 이상 조성돈 팀장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 * *

매각 대금 900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에 기획 팀은 이 안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바뀐 매각 대금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대비책을 준비해야 했는데, 매각 대금 하나만 바뀌어도 기존에 했던 모든 매각과 관련된 보고 파일은 전부다 바뀌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해서 보고서를 올린 조성돈 팀장의 안색이 좋지 못하자 다들 긴장했다.

혹시라도 무슨 실수가 있어서 깨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박상기 차장이 대표로 나섰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진짜 비디오 특허에 대해서 고민하던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

“요즘 팀장님도 평소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가끔은 좀 쉬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 그럴 여유가 안 됩니다.”

그는 따가운 다른 팀원의 시선을 의식했으나, 아직은 최민혁의 지시 때문에 자세한 내막을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약간은 허탈했다.

최민혁은 서랍에서 달랑 서류 하나만 내밀었는데, 자신들이 팀원과 모여서 그렇게 노력했던 일이 다 헛짓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을 팀원에게 이해시킬 수도 없었고, 이해시킬 힘도 없었다.

박상기 차장이 결국 맥빠진 조성돈 팀장을 소회의실에 가서 넌지시 이야기를 해보았다.

“…실장님이 함구령을 내려서 제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역시 그 비디오 특허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짐작하셨습니까?”

“아니, 좀 이상해서요. 그렇게 가치가 높은 특허라면 굳이 최 실장님이 김현우 상무 좋아하라고 사업부를 매각할 이유가 없어요. 뭔가 다른 함정이 있겠죠. 일테면 구현하기 힘든 문제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든지 하는 문제죠.”

“그렇습니까?”

박상기 차장은 그제야 의혹을 푼 채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팀장님이 왜 그렇게 고민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최 실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전 제가 최 실장님에 대해서 그나마 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 정도입니까?”

“네.”

두 사람은 최민혁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았지만, 딱히 최민혁의 배후에 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 *

최민혁은 기획 팀의 분위기를 보면서 앞으로 일을 좀 더 구상하다가 문득 소니 측 제안을 곰곰이 고민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실무진 협상이라는 명분으로 조성돈 팀장 통해서 슬쩍 오성 전자에도 흘렸다.

권태성 실장도 숨김없이 그대로 나오는 소니 측의 행동에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미 매각 협상이 진행 중인데, 거기에 끼어들어서 재를 뿌린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새끼들이 진짜로 해보자는 거야?”

900억이라는 매각 대금 때문에 비디오 관련 특허를 다시 원점에서 재분석한다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제 소니 때문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사실 오성 기획 팀에서는 다른 대안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굳이 정석이 안 된다면 다른 대안도 많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가루가 되도록 박살이 난 KM 전자를 공격할 건수는 없었다.

더 안 좋은 것은 누가 소문을 낸 것인지 STB 사업부 매각 협상이 지라시를 통해서 돌기 시작했다.

KM 전자 주가는 당연히 반등해서 1,700원을 다시 찍었다.

이제는 오성 전자 사업부 인수 팀도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최민혁 실장에게 연락을 보내서 최종 협상 미팅을 하기로 했다.

“물론 비디오 특허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저희도 잘 압니다.”

길어지는 서론에 눈살을 찌푸린 최민혁은 잠깐 매각 금액을 더 부를까 고민하다가 자칫 이 협상이 길어져서 오성 전자가 특허 취약점을 발견할까 염려했다.

‘아마 손실이 700억 가까이 날 거야. 그 이상 올리면 더 커져.’

지금 당장 오성 전자와 원한 관계를 맺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쪽에서 그렇게 멋지게 나오니, 이 정도로 합시다.”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제 할아버지랑 안 회장님이 서로 잘 아는 사이 아닙니까. 굳이 이런 협상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기는 좀 그렇죠.”

“옳은 말씀입니다.”

그는 자신이 마치 큰 양보라도 하는 것처럼 장황하게 말했다.

듣기 불편한 내용에 권태성 실장도 내심 욕설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만만하게 볼 친구는 아냐.’

“최민혁 실장님과는 언제 따로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고 싶습니다.”

“글쎄요.”

시간이 지나서 진실을 알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하면서 굳이 따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날 죽이려 할지도.’

최민혁은 굳이 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서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이제 겨우 지분 매입에 이어서 STB 사업 정리까지 끝났구나. 다음 계획으로 빨리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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