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임기석 부장은 제삼자인 입장이라서 공장을 오가면서 그 변화를 직접 체험했고, 최민혁 실장의 놀라운 용병술에 경탄하고, 부러워했다.
최민혁 실장과 마주해서 경험한 결과는 소문으로 접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야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김현우 상무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을 확신하자 새삼 최민혁이 무서웠다.
한편으로 최민혁 실장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가 있었다.
양쪽 테이블 앞에 조용히 서서 팔짱을 낀 최민혁은 그 어떤 결정에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사 자신들이 모두 오성 전자를 떠난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걸까?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것일까?’
저게 과연 대학교 1학년생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인지 놀랍기만 했다.
결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푸른 천이 깔린 테이블로 가다가 문득 자신 뒤에 서 있는 직원을 돌아보았다. 몇 마디 해줄까 하다가 그들 인생에 간섭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임기석 부장이 푸른 테이블에 앉자 곰곰이 생각하던 공채덕 과장이 바로 옆자리에 앉으면서 히죽 웃었다.
“전 언제나 부장님과 함께 갑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냐.”
“제가 왜 이 회사를 선택한 것인지 압니까? 면접 때 팀장님 인상이 아주 좋았어요. 안 그랬다면 다른 회사를 선택했을 겁니다.”
“그런가?”
답변한 것은 바로 옆자리에 앉은 김홍준 과장이었다.
“전 박사 진학도 포기했습니다. 김현우 상무랑 같이 있어 보니, 대학 연구소도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그냥 팀장님이랑 같이 갈 겁니다.”
뒤에 서 있던 나머지 임직원은 우르르 파란색 테이블에 가서 차례로 앉았다.
단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었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최민혁도 깜짝 놀라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최소한 한두 명 정도는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네!”
힘찬 함성.
그들이 희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이미 최훈열 전무의 구속 이후에 회사에서 일어난 일의 배후가 최민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지금 KM 전자는 김현우 상무 라인을 정리한다면 평생직장으로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급료는 오성 전자보다 작을지 모르지만, 인간적인 면모나 회사 근무 강도는 오성 전자를 비롯한 10대 그룹보다 훨씬 나았던 것이다.
최민혁은 예상을 벗어난 이들 행동에 내심 감탄했다.
‘TV 연구 팀에 이어서 믿을 만한 이들을 추가로 고른 셈이군. 특히 임기석 부장 리더십을 무시할 수는 없겠어. 이들이라면 MP3 플레이어 개발을 주도할 수 있겠지.’
“좋습니다. 다만 당분간은 여러 가지 일이 있을 테니, 묵묵히 자기 자리만 지켜주세요. 쓸데없는 소리에 선동당하지도 말고, 엉뚱한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게 설사 구조조정이 되었든, KM 그룹 분리가 되었든 말입니다.”
“…네.”
막상 임기석 부장을 믿고 선택을 했던 임직원은 다시 불안한 시선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최민혁이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인지 들었기 때문이다.
‘큰아버지도 감옥에 보낸 사람이니…….’
* * *
자산 매각을 한 기업과 자산을 인수한 기업 가치 증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대체로 보면 자산을 매각한 기업에 관한 연구가 우선이다.
자산을 사들인 기업에 관한 연구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은 그런 면에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STB 사업부를 매각한 후의 회사 가치를 평가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박상기 차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각 자산 평가에 대한 평가가 쉽지는 않지만, 이번 일만큼은 다른 것 같습니다. 멀티미디어 사업부나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에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특히 멀티미디어 사업부는 직간접적인 영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기존의 시너지가 사라지면서 기업 가치 마이너스는 불가피했다.
“간이 횡단면 분석 결과에서 수익률만 놓고 보면 플러스가 됩니다. 경영 효율 면에서 보면 오히려 훨씬 나아집니다. 일단 사업부 매각에 따른 이익을 더 볼 수도 있으니까요.”
회의에 참석한 정성근 대리가 바로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그런데 STB 사업부 매각 대금은 어느 정도로 잡힌 겁니까?”
박상기 차장은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이라고 해서 아직은 잘 몰랐지만 대략 짐작했다.
“일단 STB 사업부가 관리하는 공장이나 부지 쪽만 대략 90억 정도에 기존에 개발해 온 지적재산권을 합치면 대략… 120억 정도일 거야.”
박상기 차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120억이 들어온다면 회사 자금 사정도 넉넉해지겠군요.”
그 돈이면 당장 급한 차입금을 갚아서 재무구조를 개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오히려 한 가지를 더 지적했다.
“매각 후에 협력 업체 상대로 배상까지 받으면 회사 재무구조는 획기적으로 좋아질 것 같습니다.”
조성근 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기조실 통해서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회사 내부 문제 때문에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그제야 심각한 표정을 한 기획 팀은 다들 머릿속으로 열심히 주판을 두들기고서야 회사 재무 사정이 무조건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종대 과장은 뒤늦게 탄식하고 말았다.
“하, 우리 최 실장님이 그냥 막 밀어붙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제일 나은 선택이었네요. 현금 사정이 좋아지면 회사 가치는 안정을 찾을 거고, 결국에는 주주의 가치도 나아질 테니까요. 전 STB 사업부 매각하면 주주들이 난리를 칠 것이라 예상했는데, 아니었어요.”
“그렇지. 하지만 꼭 좋은 것도 아냐. 인원 감원은 불가피하니까.”
구조 조정을 부정적으로 봤던 이정원 과장도 뒤늦게 탄식했다.
“꼭 그렇게 보기도 힘듭니다. 김현우 상무가 자격 미달인 직원을 알게 모르게 STB 사업부에 많이 밀어 넣었습니다. 그들에게 나가는 인건비만 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기획 팀 몇 사람은 밥맛없는 천선우 과장과 같이 몰려다니는 이들을 떠올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자산 매각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사업부 매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박상기 차장이 슬그머니 조성돈 팀장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상대가 누굽니까?”
“오성 전자입니다.”
“네? 저도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그게 정말입니까?”
“실장님이 넌지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김현우 상무가 다 알아서 결정했다고 하시는데, 선뜻 믿지는 않습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말씀을 안 하시더군요.”
“그건 좀 이상합니다. 오성 전자가 TV 사업부에 흥미를 보이면 이해가 됩니다. 왜 돈도 안 되는 우리 STB 사업부를 인수한다는 겁니까?”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이죠.”
“네? 그러면 팀장님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네.”
겨우 STB 사업부 매각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한 기획 팀도 뒤늦게 상대가 오성 전자라는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오성 전자가 왜 굳이 상대로 나섰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 * *
기업 가치를 하락시키는 확장적 구조조정과는 달리 축소형 구조조정은 기업 가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졌다.
다만 이런 연구도 매각 기업의 특이성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KM 전자 STB 사업부는 이런 통계와는 맞지 않은 면이 있다.
오영근 사장이 그래서 STB 사업부 매각을 반대하는 것이고, 김현우 상무를 싫어하는 문형섭 부사장 역시 차라리 사업부를 줄이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미 기조실에서 어느 정도 결정이 난 사실이라서 이제는 그 흐름을 막지 못했다.
실제로 기획 팀에서는 STB 사업부 매각에 따른 구체적인 통계를 토대로 분석까지 진행했는데, 결과적으로 초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인원 감축과 매각에 따른 수익률 자체가 좋아지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새로운 대주주가 된 벨린 투자에서 이번 STB 사업부 매각을 찬성했다.
최용욱 회장, 최민혁, 벨린 투자가 모두 매각 쪽에 손을 든 상황이라서 임시 주주 총회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소액 주주도 당장 KM 전자 내부 현금 흐름이 좋아지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이 사업부 매각 진행을 담당한 이는 김현우 상무가 아니라 최민혁 실장이 나섰다. 그는 공정성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김현우 상무는 굳이 최민혁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
아니, 김현우 상무는 이번에 자신이 뒤로 물러나서 불구경만 했다.
조성돈 팀장도 분위기를 이미 파악한 터라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지금 보고 있는 보고서는 KM 전자와 오성 전자 그리고 STB 사업부 매각에 따라서 자산 가치 변화를 통계화한 것입니다.”
ROA, 현금 흐름 비율, 부채율과 같은 다양한 지표를 토대로 해서 분석된 결과는 KM 전자의 가치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잘 나타냈다.
분석 모형도 단순한 수치만 아니라 초과수익률을 기준으로 해서 철저하게 분석되고, 수치로 드러났다.
최민혁은 어차피 임시 주주 총회에서 주주에게 알려야 하는 터라 그 근거로 괜찮다고 생각해서 보고서에 만족했다.
“좋네요. 이 정도라면 앞으로 언론에서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겠어요.”
“보고서만 놓고 보면 우리 회사로서 좋은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차는 늘 생기게 마련입니다.”
조성돈 팀장은 옆에서 계속 보고서를 설명하면서도 최민혁 눈치를 봤다. 그는 도대체 최민혁이 무슨 계획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실장님…….”
“말씀하세요.”
“혹시 이번 매각에 제가 모르는 사실이 또 있습니까?”
“글쎄요.”
‘…있구나.’
하지만 그는 이미 최민혁의 흉악한 술수를 지켜본 터라 초심자처럼 질문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하지 않을 것 같으면 말해주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저는 기획 팀을 이끄는 팀장으로서 매각과 같은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뿐입니다.”
“네?”
최민혁은 진짜 같은 가짜 특허를 가짜 특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가짜 특허가 미끼라는 점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최종적으로 가짜 특허를 엿 먹일 진짜 특허를 따로 만들 계획까지는 더 말하기 곤란했다.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어요. 다만 한 번 열심히 고민해 보세요.”
“…네.”
“힌트라기는 그렇지만 장 실장에게 연락해서 안현수 팀장을 보내 달라고 전해주세요.”
“본사 법무팀장 말입니까?”
“네. 으음, 궁금한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네요. 그러니 지금은 지켜만 봐주세요. 시간이 지나면 왜 제가 그래야 했는지 스스로 깨달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매사에 얼마나 치밀한지 잘 아는 조성돈 팀장은 침묵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일을 풀어가는 것일까? 보면 볼수록 정말 믿기지 않는 분이다.’
* * *
장승일 실장은 이번 STB 사업부 매각 때문에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조성근 팀장을 통해서 안현수 팀장까지 보내 달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미 김현우 상무의 행동을 지켜보면서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난감했다.
이런 상황에 최훈열 전무 때문에 마음이 상한 안현수 팀장을 호출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안현수 팀장은 갑작스러운 장승일 실장의 요청에도 어느 정도 짐작했다.
“STB 사업부 원천기술 가치 평가 때문인 것 같은데, 제가 알기에는 그렇게 중요한 특허를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원천 특허 말입니까?”
“네. 그쪽에서는 아날로그 STB 외에 디지털 STB과 관련이 있는 MPEG에 대해서 꽤 연구를 해왔습니다. 실제 지금까지 약 80여 건의 특허를 출원했으니까요.”
안현수 팀장은 그중에 몇 가지 흥미로운 특허에 관심을 두고 자료를 세세하게 살펴보았지만 거기서 더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
“동화상 압축 기록과 관련해서 인코더와 디코더에 관한 몇 가지 특허는 주시할 만합니다. 여러 개의 필드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처리하면서 동영상 압출 효율이 크게 저하되면서 화질이 떨어집니다. 그런 부분을 개선한 것입니다.”
“그래요?”
장승일 실장도 STB 사업부 내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전문 분야까지는 몰랐기에 안현수 팀장이 내놓은 자료를 일일이 살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일에 흥미를 느낀 안현수 팀장은 여전히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몰랐다면 자세히 봐야 할 겁니다. 아마 오성 전자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온 것은 그 이유도 한 원인일 겁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향후 멀티미디어 기기 표준이 확정된다면 내야 할 로열티만 해도 연간 수십억이 넘습니다. 오성 전자와 같은 가전 3사는 수백억, 아니 수천억이 넘을 겁니다. 그게 해가 더해갈수록 더 판매가 늘어나면, 그 규모는 짐작조차 불가능합니다.”
“…노, 놀랍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