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건 그 역시 익히 파악한 내용이었다. 그는 뒤늦게 최민혁 변화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KM 전자 인수보다는 DL 그룹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 데이콤 지분이 더 중요했다.
“일단 민혁이 옆에 계속 붙어서 데이콤 지분에 대해 알아봐.”
“알겠어요.”
불만을 토로하던 김기범 역시 돌아가는 사정을 알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여자로 최민혁을 유혹하려고 했던 계획마저 실패하자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이젠 자신이 알던 최민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옛날하고는 많이 다르네.’
* * *
미덥지 못한 아들의 모습에 머리가 아팠던 김용만은 김여정의 문제에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서 일단 알아보고 있다는 답만 계속 남겼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그룹이 정신이 없어. 나중에 연락 줄게.]
[오빠, 정말 이럴 거야?]
[어차피 신중하게 처리해야 해.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잘 알잖아.]
[하지만 우리 그이가 지금 실형을 받을 처지란 말이야.]
[걱정하지 마. 모든 일이 잘될 거야.]
김여정은 그나마 만만한 김용만마저 자꾸 연락이 잘되지 않자 머리가 아팠다. 그렇다고 그녀 혼자 최훈열도 없는 상황에서 김현우 상무랑 계속 연락할 수도 없었다.
김현우 상무는 어떻게 해서라도 김여정을 통해서 최민혁을 압박하려고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거듭 실패하자 애만 탔다.
데이콤 주식의 폭등은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면서 한국 코스피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한껏 띄웠다.
날개 없이 추락하는 코스피에는 한껏 좋은 재료였고, 덕분에 코스피 폭락은 진정세에 들어가서 조금씩 반등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기범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최민혁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그럼요. 저야 형에게 돈을 빌렸는데, 투자할 때 이야기해야죠. 이번 데이콤 건은 죄송했습니다. 데이콤 지분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입니다.]
다급한 김용만에게서 계속 전화를 받은 김기범은 거듭 최민혁을 설득했다.
[민혁아, 너랑 나랑 관계도 있잖아. 우리 그룹에서도 데이콤 지분에 관심이 많아. 만나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을까?]
[지금은 안 됩니다. 그리고 이미 지분 매각 가격은 말했을 텐데요?]
[야, 주당 20만 원은 좀 그렇잖아!]
[그렇게 주겠다는 업체도 있어요.]
김기범은 이죽거리는 최민혁 말투에도 화를 억지로 참았다.
[누가?]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수화기로도 질투에 미쳐서 벌벌 떠는 김기범 목소리에 만족한 최민혁은 희희낙락했다.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서 다음 작전주에 엮을 생각이었다.
‘뭐가 좋을까?’
이번 오성 전자 사태 때문에 외부 변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서 김기범의 배후에 있는 김용만 전무의 시선을 끈 것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김현우 상무가 우선.
그런데 예상 밖에도 장승일 실장이 최민혁을 직접 찾아왔다.
* * *
이번에 윗선이 다 빠지면서 재수 좋게 승진한 손명수 차장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시선으로 최민혁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조카보다 어린 최민혁의 모습을 아무리 높이 봐줘도 장승일 실장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결국 이들과 같이 밖으로 나가서 근처의 한 와인집을 찾았다.
“케이머스 와인은 스테이크와, 라구 소스를 곁들여서 먹는 것이 잘 어울립니다.”
“괜찮네요.”
진한 과실 향과 복합적인 풍미가 입안에서 완벽히 균형을 이루며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일단 이것부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가 내놓은 것은 뜻밖에도 X 리포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진짜 X 리포트였다.
최민혁도 내심 살짝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게 뭡니까?”
“역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저 진짜 놀랐습니다.”
뒤늦게 움찔한 최민혁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접하자 무안해서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꼭 그렇게 티내실 필요 없습니다. 그룹 차원에서 재검토한 것일 뿐이고,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룹 본사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도 아십니까?”
“이렇게 중요한 보고는 당연히 해야겠지요.”
“놀라시던가요?”
“충격을 꽤 받은 눈치였습니다. 오죽하면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라고 물으셨으니까요.”
최민혁은 곤혹스러운지 턱만 쓰다듬고 있었다. 딱히 자신이 아는 미래 일부를 외부에 알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녀사냥으로 오히려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굳이 번거롭게 일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은 그런 바보와는 좀 달랐다.
‘역시.’
“그룹 일은 저도 알지만 지금 제 코만 해도 석 자라서 관심이 없습니다.”
“김 상무 때문입니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지금도 여기 나와서 실장님이랑 만나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 고작 이런 X 리포트 때문에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구길모 차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이 일이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실장님이 이미 짐작하셨다면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도 조언을 해주셔야 합니다. 아,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하는 전 구길모 차장입니다.”
“흠.”
두 사람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일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과도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X 리포트에 나와 있는 디지털 시대의 변화 때문에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했다.
그 과정 자체가 최문경 부회장이 과거 부회장에 오르기 전에 KM 그룹 계열사에서 쌓아 놓은 실적을 다 덮는 것이었다.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한 예를 들면 휴대폰 같은 사업의 장래가 밝은 것은 사실입니다.”
몇 년 후에나 시작할 휴대폰 사업 이야기에 장승일 실장도 고민했다.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계열사 기획실도 아니고 본사 전략 기획실이라면 각 계열사 발전을 위해서 업무 분장을 하는 곳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알아서 해야지, 제가 뭘 더 어떻게 도와줍니까?”
“실장님, 다시 말하지만, 이 일은 이미 회장님도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아, 골치 아파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이나 말하세요.”
입맛을 다신 장승일 실장은 어쩔 수 없이 오늘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제가 듣기로 데이콤 지분 21만 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어?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김용만 전무는 계속 독촉하는 김여정 때문에 데이콤 지분 이야기를 해버렸다.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김여정은 펄쩍 뛰었고, 다시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알아보았다.
장승일 실장도 김여정의 호들갑 때문에 데이콤 지분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최민혁을 찾아온 것이었다.
“김여정 사모님에게 들었습니다.”
최민혁은 부산한 집안 분위기를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쯧.”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회장님도 데이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한국통신과 94년에 최초로 상용 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한 후에 저궤도 위성통신 사업에도 참여했다. 내년 시외전화사업에 관한 이야기로 데이콤은 한창 뜨거운 감자였다.
최민혁은 정색했다.
“회장님이 절 찾기라도 합니까?”
“네. 사실 데이콤 지분 때문에 제가 직접 실장님을 찾은 겁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냉큼 거절했다.
“지금은 김 상무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가서 인사드리겠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데이콤에 관해서는 관심을 끄는 것이 좋을 겁니다.”
“네?”
무려 21만 주나 지분을 취득한 최민혁 실장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장승일 실장은 깜짝 놀랐다.
최민혁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간단하게만 언급했다.
“전 데이콤을 둘러싼 분쟁 때문에 지분을 사들인 것에 불과하고, 비싸게 팔아치울 겁니다. 데이콤의 미래가치가 좋아서 주식을 사들인 게 아닙니다.”
“하, 하지만 실장님도 PC 통신 인기가 어떤지 잘 아실 것 아닙니까. 한국통신은 분당 70원이던 요금을 100원으로 올리고, 그다음 해는 130원으로 마음대로 올려서 이익을 취할 정도로 미래 발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몇 년 정도는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과연 그런 독점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
최민혁은 몇 가지 화두만 던져놓고는 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데이콤 미래가치는 불과 몇 년에 불과합니다. 거품이 낀 지분 인수했다가는 오히려 큰 손실만 보게 될 겁니다.”
“…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겠지만,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의 조언을 금방 알아들었다.
더욱이 그는 최민혁이 얼마나 까칠한지 잘 알기에 더 이상 별다른 말도 없이 조용히 일어났다.
“하지만 회장님이 김현우 상무와 관련해서 계속 실장님 이야기를 자주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일이니, 가능하면 빨리 찾아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알겠어요.”
‘역시 할아버지 귀에도 들어갔나 보군. 그렇다면 할아버지 KM 전자 지분 때문이겠어.’
* * *
최민혁도 김현우 상무를 공격하면 최두진 사장을 통해서 할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라 예상했다.
다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예민한 후계 구도 문제 때문에 최두진 사장과 최용욱 회장이 직접 최민혁을 견제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판이 차려진 밥상이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데이콤 지분에 대한 주변의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이쪽저쪽에서 계속 데이콤 지분에 대한 전화가 걸려왔다.
우영민 과장도 죽겠다고 하소연했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오성 전자와 대립을 각오했다면 차라리 지금 정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데이콤 주식의 가치는 올해나 내년에도 크게 오르지 않는다. 최민혁도 처음에는 길게 끌고 갈까 하다가 이미 자기 힘을 보여준 상황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딱 현찰로 투자 이익의 두 배가 될 금액에 지분을 팔라고 지시했다.
우영민 과장도 이제 겨우 17만 원에 맴도는 상황에서 좀 무리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경쟁 입찰을 비롯한 밀고당기기 수법을 최대한 동원해서 오성 생명에 우선 4.5% 지분을 넘겼다.
[오성 생명은 벨린 투자 회사에서 데이콤 지분 4.5%를 사들였고, 이를 기반으로 데이콤 지분 인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나머지 지분은 오성 그룹 계열사의 관련사를 통해서 다 넘어갔다.
가격은 딱 투자 금액의 두 배였는데, 세금과 관련 모든 비용은 물론 오성 측에서 다 지급했다.
뉴스가 나가자 데이콤의 지분을 노리는 이들은 다들 폭탄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통해서 벨린 투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하지만 벨린 투자 회사는 이미 꽤 오래전부터 활동을 해왔지만, 최근에는 사업을 접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국내에서 영업하는 건물이 있지만, 유령 건물처럼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본사 위치도 유럽에 있다고만 알려졌을 뿐이고, 자세한 내역은 밝혀지지 않았다.
몇 년 전에 국내 주식에 투자를 했던 적은 있지만, 지금은 그 지분도 다 팔아 치웠다.
심지어 회사가 넘어갔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니 외부에서 아무리 파도 비밀에 싸인 회사일 뿐이었다.
최민혁은 우영민 과장의 대리인 통해서 오성 생명 뉴스가 나간 후에 반쯤 정신이 나간 김용만 DL 전무에게 데이콤 지분을 430억에 팔아 치웠다.
김기범에게 하소연에 가까운 전화를 받았지만 간단하게 무시했다.
[정말 내가 형 생각해서 DL 전자에 데이콤 지분을 넘긴 거야. 나도 오성 그룹 계열사를 통해서 계속 전화를 받았어.]
그는 실상 ‘이 개새끼, 진짜 너무하네. 네가 정말 인간이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돈의 반은 내 돈이잖아. 내 돈으로 그렇게 대박 쳐놓고, 날 상대로 그렇게 뜯어가다니, 민혁이 너 정말 섭섭하다.]
[싫으면 그냥 다시 넘겨. 요즘 동양이나 LC 전자도 관심 많던데, 그쪽에 넘길 테니까.]
최민혁이 굳이 오성 전자에 지분을 다 넘기지 않고 DL 전자에 지분 일부를 넘긴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오성 전자는 당분간 DL 전자를 계속 괴롭혀서 지분을 강탈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