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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7화 (57/1,021)

#57

* * *

겉으로 보면 사람 좋아 보이는 김여정도 재벌가답게 행동한다. 그녀는 결혼하고 나서도 최훈열 전무만 보지 않았고, 왕성한 사회 활동을 계속했다.

그런 그녀도 최훈열 전무 구속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정재계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면서 영향력을 발휘해도 이전처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김현우 상무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나서는 몇 번 거절했다가 최훈열 전무 관련 건이라는 말에 결국 약속 장소로 갔다.

일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기에 김현우 상무와의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김현우 상무는 첫마디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내놓았다.

“최 전무 구속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십니까?”

“배후라뇨?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녀도 이미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남편의 불법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김현우 상무는 좀 생각을 달리했다.

“저도 구체적인 방법은 모릅니다.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위협받고 있어서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친 목소리가 불편했지만, 꾹 참은 채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자꾸 애매한 소리 하면 그냥 일어나겠습니다.”

“제가 지금 회사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네? 김 상무님이 말인가요? 허, 참, 아니, 누가 대주주 대리인인 김 상무를 밀어낸다는 건가요? 우리 그이만 해도…….”

“최민혁 실장.”

“네?”

그녀도 최훈열 전무 구속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최민혁 실장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했다. 고작 대학교 1학년인 최민혁이 자기 남편을 곤경에 빠트렸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김현우 상무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믿을 수 없었을 터라 복잡한 얼굴로 천천히 자신이 당한 일을 설명했다.

“아마 잘 믿기지 않을 겁니다. 저만 해도 아직 꿈을 꾸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최 실장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대부분의 사실과 약간의 거짓을 섞은 이야기는 개연성이 높았다.

그녀도 처음에는 비웃다가 점점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정말인가요?”

“제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제가 진짜 놀란 것은 오성 전자조차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정말 알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그런 일을 꾸미고도 남습니다.”

그녀 역시 오성 전자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민혁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듣고 기가 찼다.

“…믿을 수가 없네요.”

“다시 한번 철저하게 조사해 보세요. 분명히 최 실장이 배후에서 작업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없다면 그게 진짜 더 무서운 거죠. 그만큼 최 실장 능력이 무서운 것이니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김여정은 관자놀이를 쿡쿡 누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연락드리죠.”

* * *

김여정은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나서 오빠인 김용만 DL 전자 전무에게 연락했다. 그도 처음에는 최민혁의 배후설에 배꼽을 잡고 웃었지만, 김현우 상무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따로 알아보겠다고 했다.

김용만 전무는 뒤늦게 최민혁에 대한 것을 조사해 보았고, 명확한 증거를 찾지는 못해도 KM 전자 내에 떠도는 소문을 확인했다.

특히 KM 전자 임직원은 최민혁 실장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였다.

‘우습게 볼 일은 아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지난 KM 전자 구속 때에 그의 라인 몇 사람도 같이 포함되어서 지금은 알아볼 창구가 없었다.

결국 급한 대로 흥신소에 의뢰를 맡겼지만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아서 김명준 과장에게 협박을 받고 나서는 이번 의뢰를 포기하겠다는 연락과 위약금만 받았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고민 끝에 결국 차선책으로 김기범을 불러 지시 내렸다.

다행히 김기범은 오히려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흔쾌히 허락했다.

“민혁이요? 저만 믿으세요.”

“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뭔가 있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고.”

“알았다니까요!”

‘조심은 개뿔. 이제 대학교 1학년이 세상 물정을 얼마나 안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 * *

끈질긴 김현우 상무를 어떻게 제거할지 고민하던 최민혁은 갑자기 파티에 초대하는 김기범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뚱맞게 무슨 파티야?’

영문을 몰라서 김명준 과장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DL 전자 측에서 흥신소 사람을 붙였습니다. 잡아서 간단하게 처리했지만 아마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오성 전자를 압박해서 여유를 가진 최민혁은 발끈했다.

“아니, 여기서 DL 전자가 갑자기 왜 튀어나옵니까?”

김명준 과장은 김현우 상무에게 붙여 놓은 이를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을 보고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혹시 지난주에 김현우 상무가 김여정 여사님을 만났던 일 때문이 아닐까요? 그분이라면 DL 전자 측에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큰어머니입니까?”

“아무래도 DL 그룹이 우리 그룹에 호의적이지는 않았으니까요. 두 사람의 정략결혼도 그런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함이었습니다.”

“흠.”

최민혁은 화내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둘째 큰어머니의 외가에 대해서는 이미 경계했다. 차라리 이번 일을 통해서 얽힌 것이 잘되었다고 판단했다.

다만 김현우 상무의 끈질김에 혀를 내두르면서 탄복했다. 그냥 이제 물러나면 될 텐데, 이렇게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실장님이 두려워서가 아닐까요?”

“설마 제가 해코지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

김명준 과장은 뜻밖에도 긍정의 침묵 표시를 보여주었다.

“어이가 없습니다. 아,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으음,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는 알겠네요.”

최민혁도 어지간하면 김기범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딴짓을 할 것을 염려해서 결국 직접 그를 찾아갔다.

‘좀 짧게 가자.’

* * *

서울의 한 클럽은 오늘 김기범이 아예 통째로 빌려서 평소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연예인 지망생으로 보일 정도의 미인이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최민혁은 1회차에서 이미 비슷한 일을 경험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구경만 하다가 자신을 한껏 환대하는 김기범을 만났다.

벌써 술을 꽤 마신 김기범은 지나가는 여자에게 집적댔다.

“민혁아, 분위기 좋지?”

“괜찮네요.”

확실히 클럽 분위기는 괜찮았다.

이곳을 찾은 여자 대다수는 클럽 죽순이가 아니라 일반인이 많아 보였다. 친구끼리 몰려다니는 그녀들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이 모임은 30~50대 대기업에 들어가는 재벌 3세가 주류라서 일반인 여자에게는 쉽게 떨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물론 친구 따라서 이곳을 찾은 이들은 또 달랐다.

최민혁은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터라 우선 한 방 먹이기 위해서 슬쩍 투자 이야기부터 했다.

그저 아버지에게 부탁을 받고 최민혁에 대해서 살피던 김기범은 그의 말에 먹던 술까지 내려놓은 채 소리쳤다.

“내, 내가 빌려준 돈과 은행 대출금으로 만든 200억을 모두 데이콤 주식 매입에 다 퍼부었다고?”

“네.”

“으음.”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도 대화에 집중하던 김기범은 주식 매입서에 충격받았다.

지난 주가 조작 사건 때문에 최민수가 재판을 받았기에 설사 알았다고 해도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민혁과 안면이 있는 이들은 옆으로 왔다가 투자 결과를 보면서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한 채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들이 아마 사전에 이 정보를 알았다고 해도 할 말이 뻔했기 때문이다.

[데이콤이 괜찮은 종목이기는 하지만 코스피가 계속 박살 나고 있는데, 반등한 것만으로 운이 좋았지.]

[당분간은 코스피 반등이 어렵다고 하던데, 데이콤이 올라봐야 얼마나 오른다고.]

[차라리 다른 괜찮은 작전주 투자하는 것이 훨씬 났겠다.]

마치 그들의 불만을 이미 들은 사람처럼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채 오히려 그들을 더 자극했다.

“투자 받은 상황에서 사전에 말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민수 형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 깜빡했어요. 솔직히 대기업이 데이콤에 그렇게 탐욕을 부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른 재벌 3세 역시 집에만 가면 뜨거운 주제가 되는 데이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 뒤늦게 아는 채널을 통해서 주식을 알아보고는 있어도 구하지 못해서 발만 동동 굴렀다.

탐욕에 물든 김기범은 아버지 지시도 무시한 채 최민혁만 바라봤다.

“그렇지. 미래를 알지 않고서야 그런 짐작을 할 수는 없지.”

하지만 김기범은 말을 하면 할수록 질투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민혁이 이 새끼는 도대체 얼마나 번 거야?’

누구보다 작전주로 주가 조작에 많이 관여했기에 잘 안다.

작전주로 돈 벌기가 쉬울 것 같지만 투자할 수 있는 제한폭이 명확하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200억이라면 이걸 나누어서 여러 작전 종목에 투자해야 하는데, 이게 다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서 실제로 큰 이익을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불과 삼 주 만에 한 종목에만 투자해서 100억 넘는 이익을 봤다.

이것을 믿으란 말인가.

최민혁은 자신에 관한 관심을 완전히 잊은 채 탐욕에 절어 있는 김기범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나중에는 꼭 알려줄게요.”

“그, 그래. 그런데 혹시 20만 주가 넘는 데이콤 주식을 어떻게 할 거야?”

“적당히 물주가 나오면 팔아야죠.”

“나도 좀 사들일 수 없을까?”

“주당 20만 원에 팔 건데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8만 원에 불과했던 주식을 2배 이상에 팔겠다니.

“…그건 좀 너무하잖아.”

“하지만 데이콤 경영권을 노리는 대기업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겁니다.”

“너랑 나랑 보통 사이가 아니잖아. 특혜를 좀 줄 수 없을까?”

“하는 것 봐서요.”

“민혁아, 부탁 좀 하자.”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한 겁니까?”

김기범은 이미 주도권을 빼앗긴 터라 원래 하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 그렇지. 너를 부른 것은… 으음, 그러니까, 휴학도 하고 궁금해서 그래. 요즘 뭐 하는지 알고 싶기도 해. 이왕이면 소개팅도 해주려고.”

“괜찮아요.”

그는 더 부추기지 않았다.

‘데이콤 결과 보면 배가 많이 아플 거다. 이 정도면 주식에 미쳐서 당분간은 딴생각은 못 하겠지?’

* * *

DL 그룹은 KM 그룹보다 후계자 내부 분쟁이 더 심했는데, 최근 하농인수와 관련해서 불협화음이 계속 터져 나왔다.

국내 최대의 농약 제조업체인 하농은 DL 그룹에서 의도적으로 부도를 내서 현재의 경영진을 몰아냈다고 기자회견을 요청했다.

일찍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김용만 전무는 DL 그룹의 일이 혼란에 빠지자 DL 전자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KM 전자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가 굳이 최민혁 주변을 계속 감시한 것도 KM 전자 지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김기범에게서 21만 주의 데이콤 지분 이야기를 듣자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넋을 잃은 김용만 모습에 김기범도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한 그대로입니다. 제 돈으로 오성 전자에 투자해서 200억으로 불렸고, 그 돈으로 다시 데이콤 지분 21만 주를 매입했습니다.”

그의 두 눈은 최민혁의 데이콤 지분 매입 소식에 광기로 번쩍였다.

“아니, 넌 지금 내가 뭘 알고 싶은지 모르겠냐?”

불편한 시선을 의식한 김기범은 차마 아버지의 눈을 보지 못했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만 들었습니다.”

“야!”

찔끔 놀란 김기범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른 것을 겨우 참은 김용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막내에게도 밀린 자신의 처지를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기범아, 너도 지금 우리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 것 아냐. DL 전자는 말이 좋아서 계열사이지, 중견 전자 회사를 인수해서 이제 자리 잡은 것에 불과해. 경영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네 꼴도 우습게 될 거다.”

“하, 하지만 제가 알기로 DL 전자로 계열사를 확장하는 일은 장기적인 그룹 전략에 따른 것으로 아는데요?”

“그야 그렇지. 그런데 회사 이익이 안 나면 이야기가 달라. 그래서 KM 전자를 계속 지켜봐 왔던 거야. 너도 그 정도는 알 것 아냐?”

“…네.”

“자, 생각을 해봐. 이제 민혁은 두둑한 현금 주머니를 챙겼어. 너라면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가졌고, 덩치도 적당한 KM 전자 지분을 내놓겠냐?”

이미 최민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김기범은 반박했다.

“제가 알기로 민혁은 애초에 KM 전자에 관심 없던 것으로 알아요. 그 녀석이 고작 바지 실장에 불과해서 얼마 버티지도 못해요.”

“내가 알아본 바로는 직원에게 이미 실장으로 대우받고 있던데?”

“저랑 만날 때면 늘 회사 욕만 했던 놈인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변화 이전의 최민혁은 최민수를 통해서 늘 회사 경영에는 관심이 없다고 토로했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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