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9화 (59/1,021)

#59

탄탄한 기업이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계열사와는 달리 DL 전자는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오성 전자가 발로 툭 치면 그 자리에서 자빠질 회사였던 것이다.

실제로 지금 DL 그룹은 하농 인수 스캔들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회사 수표책을 가지고 잠적해서 고의로 회사를 부도낸 경리차장 이준광을 오성 전자 기획 팀에서 확보한 것이었다.

‘역시 무서운 놈들이야.’

발 빠른 오성 전자의 움직임에 감탄한 최민혁은 두 회사끼리 싸움을 붙여 놓은 후에 김현우 상무 주변을 살폈다. 두 가지 일이 실패한 탓에 김현우 상무도 패닉에 빠져서 반쯤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그는 김현우 상무 덕분에 무려 1,200억 넘게 한 큐에 벌고 난 후라 혹시라도 그에게 뽑을 것이 더 있을까 싶어서 검찰에 소환된 박경진 팀장을 호출했다.

‘김 상무에게 좀 더 나올 보물이 있나 모르겠어. 철저히 확인해 봐야겠어.’

* * *

업무상 횡령죄는 10년 이하 징역이나 3천만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되는 경제 범죄이다.

다만 상급자 지시에 위법 행위를 저질렀지만, 업무상 횡령을 구성하는 경우는 좀 다르다. 단적인 예로 출장비와 같은 장부를 따로 보관해서 수사 기관에 제출해서 그 내역이 명확히 일치하는 경우다.

박경진 팀장이 사실 이 경우에 속했다. 비록 최훈열 전무 라인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이런저런 사고를 쳤을 뿐이다.

그는 특히 최민혁의 지시에 따라서 박두영 부장검사의 검찰 조사에 최대한 협조했고, 심지어 수집한 음성 테이프를 비롯한 증거를 깔끔하게 제출했다.

최훈열 전무는 박경진 마음대로 횡령했다고 주장했지만 철저한 회계 장부에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거기에 박두영 부장검사가 알게 모르게 배려해 준 것도 컸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는 모범 답안까지 줬다.

박경진 팀장은 재수가 좋으면 무혐의를 받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 남편의 불구속 사실을 들은 그의 아내조차 그를 위로해 주었다.

“여보, 힘내!”

“그래.”

박경진 부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복했다. 회사 직원들의 눈이 있어서 휴직 신청을 했는데, 최민혁 실장의 호출을 받자 KM 전자 본사로 바로 출근해서 조정욱 인사 팀장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아, 박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재판 소식 저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아직 무혐의가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박 부장님이 회삿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이 경우에는 위법성 여부를 벗어난 경우라 잘될 겁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슬쩍 목소리를 낮추어서 질문했다.

“회사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다들 얼굴이 좋아 보이던데요?”

“아, 그거 데이콤 주식 때문입니다. 실장님이 기획 팀에 데이콤 주식을 사라고 권했는데, 그 소문이 다른 팀에도 퍼져서 다들 단단히 재미 봤으니까요.”

정확히는 회사에 라인이 제법 있는 박상기 차장이 인사 팀을 비롯한 아는 지인에 이 정보를 흘렸다.

이들 중에는 그냥 한 귀로 흘린 사람도 많았지만 범상치 않은 최민혁 실장의 조언을 받아서 제대로 투자한 이도 적지 않았다.

비서실 직원 대다수는 은행에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했다.

인사팀장 조정욱 역시 최민혁 실장을 옆에서 지켜본 터라 조언을 받아들여서 2억을 투자해서 재미를 단단히 봤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렇죠? 김창훈 회계 팀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해서 아예 투자를 안 했는데, 지금 땅을 치고 후회하는 중입니다.”

검찰에 불려가서 계속 조사를 받아서 팍 삭아 버린 박경진 팀장은 너무 부드럽기만 했다.

“실장님이 이번에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따로 챙겨준 셈이군요.”

“그래서 요즘 실장님에 대한 인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잘될 겁니다.”

하지만 겉으로 한 말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깐깐한지 잘 아는 조정욱 인사팀장은 그가 박경진 팀장에게 잘해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최 실장님이 박경진 팀장을 회사에서 자르지 않은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지.’

* * *

이제는 최민혁을 단단히 믿게 된 박경진 팀장은 김현우 상무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란 지시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눈치가 있는 그는 최민혁 실장이 최훈열 다음으로 김현우 상무를 노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최훈열 전무의 불법 외에 김현우 상무의 출장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김현우 상무가 법인카드를 남발한 금액을 따로 정리해서 모아두었다.

유럽 최고급 호텔, 수천만을 호가하는 최고급 양주, 심지어 수백만 원이 넘는 사치품까지 있었다.

자신이 만약을 위해서 마련해 둔 모든 자료를 모아서 최민혁 실장에게 내놓았다.

“흠.”

최민혁은 마치 다른 사람 같은 박경진 팀장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질문하지 않았다. 이번 재판을 겪은 후 사람이 좀 변했나 생각했다.

이보다는 가져온 자료를 살피고 나서는 절로 한숨만 내쉬었다.

영업 명목으로 회사 법인카드를 마구잡이로 긁은 지출 내역서를 확인하다가 문득 과다한 여행 경비 중에 한 항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6,000달러 백은 뭡니까?”

“그게…….”

“설마 유럽 출장 갈 때 따로 여자 선물까지 구입한 겁니까?”

“…….”

김현우 상무 덕분에 재미를 단단히 본 최민혁조차 욕설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 씨발.”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알뜰하게도 법인카드를 마구잡이로 사용해서 탕진한 내역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누구 한 사람 터치하지 않는 것은 더 황당했다.

“또 최훈열 전무입니까?”

“그게 사실은…….”

“설마 오 사장님도 알고 묵인한 것은 아니겠죠?”

슬쩍 시선을 피한 박경진 팀장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 너무하네요. 아무리 지분이 없는 사장이라고 하지만…….”

“오 사장님은 나름의 노력을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님과 박두진 사장 지분을 다 합친 것에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눈치를 보던 그는 뜻밖의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었다.

“지금도 김현우 상무의 능력에 대해서 말이 많은 것은 압니다. 하지만 조정욱 인사 팀장 이야기로는 그 밑에 있는 사람까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특히 STB 사업부를 이끌어가는 임기석 부장은 오성 전자 출신으로, 실력만큼은 알아줍니다.”

이미 MPEG 특허를 확인한 최민혁 눈빛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비록 결과적으로 표준화에 실패하지만, 그 결과만큼 높이 평가했다.

‘사실 방향만 잘 잡았다면 충분히 표준화 가능성이 높았지.’

“혹시 MPEG 표준화 참여도 임 부장이 한 거라는 말입니까?”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저는 조정욱 인사 팀장에게 그렇게 들었습니다.”

최민혁은 다시 임기석 부장의 프로필을 물끄러미 확인했다.

‘TV 사업부 같은 결과가 없다는 것은 아쉽네. 하긴 그런 운이 계속될 리가 없지. 능력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아.’

실제로 임기석 부장을 비롯한 STB 사업부 연구원이 등록한 특허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비록 아직은 돈을 까먹고 있었지만 나름 기본적인 밥값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MPEG 미래를 아는 최민혁은 굳이 다국적 기업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MPEG-2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럴듯한 MPEG 특허를 이용해서 비싸게 팔아먹는 거라면 몰라도.’

더욱이 자신의 능력을 잘 아는 터라 MPEG-2 특허 분쟁에 낄 생각조차 안 했다.

오히려 MP3에만 집중한다면 괜찮은 그림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마 김현무 상무 성격이라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고 결국 임기석 부장을 타깃으로 삼을 확률이 높아.’

최민혁은 다소 침울한 박경진 팀장이 사무실을 나서자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했고, 오영근 사장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김 과장님, STB 사업부 회계 검사와 이 결과에 따라 구조조정 방안에 대해서 검토 중이라고 소문 좀 내세요. 이미 기조실에도 보고가 올라갔다고 해도 됩니다. 벼랑 끝에 몰린 김 상무가 과연 무슨 짓을 할지 한번 지켜보죠.”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발악할 김현우 상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를 내린 후에 임기석 부장이 만들어놓은 특허를 살폈다.

그는 처음에는 그 과정에서 비디오 관련 특허를 발견했지만 크게 욕심내려고 하지 않았다.

‘H.261과 MPEG-1 표준이 게시된 이후에 특허가 급격히 증가해서 세계 기업의 연구 개발 활동도 무지막지하게 늘어나.’

문득 자신이 알고 있는 비디오 코딩 핵심 특허가 아직 출원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기석 부장이 특허출원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서버 자료를 일일이 다 열람해서 확인해 보았다.

“…없네. 왜 없지?”

최민혁은 뒤늦게 심각하게 고민했고, 관련된 핵심 세 가지 특허를 하나씩 떠올렸다.

텔레비전 이미지의 움직임 벡터 추정, 이미지 및 비디오 코딩을 위한 블록 변환 및 양자화, 데이터값의 이진화 및 산술 코딩을 위한 방법과 장치였다.

후일 특허 분쟁에서도 큰 역할을 하는 중요한 특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이 특허보다는 이 특허에 묻혀서 사장된 사이드 특허 세 가지를 하나씩 떠올리면서 메모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게 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는 술술 잘 풀렸다.

“이게 회귀자의 특전인가?”

아니면 이지수가 최민혁을 달달 볶아서 영혼에 새길 정도로 고문했기 때문일까 고민했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최민혁은 한쪽에는 후일 소니가 먹는 비디오 특허 세 가지와 다른 한쪽에는 이 특허에 밀려서 사장되는 세 가지 특허와 관련되는 일곱 가지 특허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모두 열 가지 특허는 나름 표준화 과정에서 제법 맹위를 떨쳤지만 결국 표준화로 채택되지 못한 비운의 특허였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 중요하지.’

최민혁은 히죽 웃으면서 이 가짜 특허를 잘만 이용한다면 오성 전자에게 또 왕창 뜯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좋았어. 우리 김 상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나. 역할을 잘해 줘야 하는데. 그래야 오성에서 또 떡밥을 물 것 아냐.’

* * *

최훈열 사건 이후에 KM 전자 내부적으로 뜻밖에 크게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최훈열 전무 라인이 사라지면서 좋아하는 이가 더 많았다.

다만 KM 전자 주가 폭락 이후에도 계속 주가가 늘어지면서 1,700원대를 유지하자 불안을 느끼는 이들도 늘어났다.

결국 회사 내에 이런저런 악소문이 계속 떠돌기 시작했다.

바로 구조조정이다.

이미 최민혁에게서 STB 사업부 임직원 정리해고 소식을 들은 오영근 사장은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차에 기획 팀에서 갑자기 STB 사업부를 매각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안 그래도 최근 모든 인력을 다 동원해서 최민혁보다 먼저 선수 치려고 발악해도 대안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김현우 상무는 분노했다.

“최 실장, 이 새끼가 이제 숨김없이 그대로 나오네!”

그는 오영근 사장을 직접 찾아갔지만 해외 출장 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하지만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단단히 겁먹은 김현우 상무는 실장실을 직접 쳐들어가지 못했고, 피 말리는 하루를 보냈다.

평소에도 개같은 성격을 참지 못해서 오수연 비서를 상대로 온갖 패악질을 하던 김현우 상무가 그 짓을 하지 못하자 견디지 못했다.

결국 만만한 임기석 부장을 호출했다.

“임 부장, 정말 이력서에 써낸 경력이 맞아? 솔직히 초등학생도 임 부장보다는 잘할 것 같아. 차라리 회사 밥 축내지 말고, 집에 가서 애나 보는 것이 어때?!”

“…네?”

갑작스러운 폭언에 임기석 부장은 영문을 몰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자존심이 있다면 내 말뜻이 뭔지 알 텐데, 정말 모르는 거야? 임 부장이 출장 가서 쓴 돈이 많다는 소리가 있어.”

“…….”

이미 STB 사업부 구조조정 이야기 때문에 심란한 임기석 부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표준화 명분으로 펑펑 돈을 쓴 일에 대해서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실제로 돈을 썼다.

그런데 그 경우는 김현우 상무가 뒤에서 부추겨서 그랬던 거다.

-임 부장, 왜 그렇게 좁쌀처럼 굴어? 여기 법인 카드로 마음껏 써.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다 책임을 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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