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최민혁은 평소처럼 김명준 과장과 같이 나왔다.
가족끼리 서로 긴팔원숭이 우리 앞에서 흔한 광경을 연출했다. 누가 보더라도 딱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슬쩍 다른 일행과 떨어진 박두영 부장검사는 모른 척하면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민감한 시기라서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 간단한 질문인데, 아무래도 전화는 부담스러워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로 힘든 이야기라면…….”
“그 비자금 말입니다. 그건 수사에서 빼기로 한 것 아닌가요?”
“아, 뺐죠. 그런데 시민단체에서 따로 비자금 관련해서 수사해 달라고, 고발까지 했습니다.”
정확히는 불법 은행 대출 때문에 열받은 몇몇 시민단체에서 은행이 나서서 불법적으로 일 처리한 부분을 고발했다.
단순히 은행원 몇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고위층이 관련 있다고 봤다.
실제로 사실이었다.
그리고 몇몇 언론이 이 기사 가지고 재미를 꽤 보면서 살쾡이처럼 달려들었다.
최민혁도 최훈열 재판 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일단 고발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사를 진행했고, 결국 덮었습니다.”
“설마 박 부장검사님이 덮은 겁니까?”
“천만에요. 전 철저하게 수사해서 위에 보고를 올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사를 덮은 것은 바로 대쪽 검사인 김종도 차장검사였다. 그 역시 위의 지시를 받아서 이 사건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울고불고하는 그의 아내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평생 벌금 딱지 한 번 내보지 않은 평범한 그의 아내는 소송 사기로 말미암은 불안 때문에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장모가 직접 찾아와서 그의 얼굴 앞에서 하소연까지 했다. 대부분 다 적당히 잘사는데, 왜 사위 자신만 그러냐고 구박했다.
김종도 차장검사는 이미 최훈열 전무 구속 사태를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는데, 그 윗선에서 압력을 받자 깔끔하게 포기했다.
“설마 더 윗선에서 관여한 겁니까?”
“설마 몰랐습니까?”
“설마 한부…….”
“거기까지만 하시죠.”
“쯧쯧.”
최민혁은 X 리포트에서 주목한 한부철강 뒤에 있는 그 작자와 최훈열 전무 비자금이 관련이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데이콤도 이번 일과 연관됩니까?”
“데이콤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윗선하고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정부 정책에도 제동이 걸렸습니다. KM 그룹에 대한 정부 압력이 타당한 이유죠.”
“그랬군요.”
그랬다.
X 리포트와 최훈열 전무 비자금 문제는 겉으로 조용했지만 물밑에서는 이런저런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일이 최민혁이 아는 미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이었다.
박두영 부장검사도 왜 가족 나들이까지 가장해서 최민혁이 만나자고 한 것인지를 알고 나서는 비자금에 대해서 일축했다.
“그 일은 최 실장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죠. 그런데 몇 년 후에는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굳이 김현우 상무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번 일도 적당히 보험으로 만들 것이다.’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무슨 뜻입니까?”
진지한 박두영 부장검사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최민혁은 소리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고 있는 긴팔원숭이 커플을 보면서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 비자금을 얼마든지 저에게 덮어씌울 수도 있어요.”
“최 실장님, 아무런 검찰이 섞었다고 해도 없는 죄까지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제까지 그런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최민혁은 묘한 시선으로 박두영 부장검사를 보면서 일축했다.
“보통 그런 사건을 누명이라고도 하죠. 한국 권력자라면 그런 일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절 건드린다면…….”
그는 오른손을 달걀을 쥔 것처럼 만들었다가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쫙 펼쳤다.
“붐 하고 터지는 거죠.”
“…….”
할 말이 없는 박두영 부장검사는 이 말을 끝으로 일행과 같이 떠나는 최민혁 실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차고 말았다.
‘설마 또 무슨 짓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겠지?’
“아는 사람이야?”
“어.”
“정말 아니 그러면 왜 소개도 안 해주고 그냥 보내는 거야?”
“본인이 원치 않아서 그래.”
“설마 비밀 만남 그런 거야?”
“비슷해.”
“도대체 누군데?”
“비밀.”
“어이가 없어서.”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박두영 부장검사도 차마 아내 시선을 피한 채 입을 다물었다. 최민혁 실장이 저렇게 비밀리에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짜 만만한 인물은 아냐.’
* * *
브라질에 있는 나비 날갯짓이 대기에 영향을 주어서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는 기상학에서 출발했지만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사용된다.
최민혁도 나비효과란 말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현상을 직접 체험하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물론 그것은 잠시.
최대한 이 변화를 이용하기 위해서 우선 기획 팀에게 데이콤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다.
뜻밖에 기획 팀은 이번 일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열심히 조사했고, 데이콤의 상장부터 시작해서 주가 변동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단 하루 만에 뽑아냈다.
“조 팀장님 능력에 제가 감복했습니다.”
하지만 무안한 조성돈 기획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주식에 관심이 많은 배종대 과장하고, 이번 사건을 사전에 조사했던 정성근 대리 덕분입니다. 두 사람은 데이콤을 비롯한 몇몇 종목에 대해서는 증권 전문가 못지않습니다. 안 그랬으면 단 하루 만에 이런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없나 봅니다?”
“혹시 차세대 아이템으로 통신사업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 그런 거 아닙니다.”
“네? 아니 그러면 왜 갑자기 데이콤에 대해서 검토하시는 겁니까?”
최민혁은 상대가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기획 팀을 통해서 회사 내에 소문이 도는 것이 진짜 자기 목표를 감추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제가 결론을 내면 말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순순히 물러난 조성돈 팀장은 굳이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통신사업은 그가 생각해도 괜찮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원하는 것은 필요한 자본이 꽤 많을 텐데, 도대체 그걸 어디서 끌어올지 궁금했을 뿐이다.
최민혁은 물론 조성돈 팀장이 나갈 때 넌지시 한 가지 힌트를 주었다.
“우리 회사 주식 사들이려던 기획 팀이 낙심한 것은 아는데, 혹시 재산 불리기에 관심이 있다면 데이콤 주식을 사들이라고 하세요.”
“…네.”
고개를 갸웃한 조성돈 팀장은 딱히 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그 자리에서 다시 데이콤 주식 매입과 관련된 몇 가지 조건을 따졌다. 통신업체는 3% 상한선이 있고, 동일 주체는 10% 제한선이 있었다.
물론 다른 명의 통해서 더 주식을 사들일 수 있겠지만, 앞으로 첫째 큰아버지와 싸움에서 괜히 전기통신사업법을 위반해서 꼬투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10% 상한선으로 결정했다.
“우영민 과장에게 전해서 최대한 빨리 데이콤 지분 10%를 매입하라고 하세요.”
“…10%라면, 천억이 넘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네.”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이 소심하게 나오자 피식 웃으면서 자신이 썼던 기획안의 중간을 펼쳐서 직접 그에게 읽게 했다.
“지금은 여론 때문에 정부에서 통신산업 구조조정을 보류했지만, 지금처럼 여론이 잠잠해졌을 때 곧 진행할 겁니다. 대기업의 데이콤 쟁탈전은 심화할 거고, 데이콤 주가는 오를 겁니다. 기획 팀 첨부 기사를 확인해 보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겁니다.”
“아.”
김명준 과장은 이번에는 진짜 놀란 얼굴로 최민혁을 쳐다보다가 넋을 잃은 채 실장실을 나갔다.
* * *
“으음, 이게 기획 팀 분석 결과를 토대로 우리 최 실장님이 만든 거라고요?”
“그래. 진짜 기가 막히더라.”
“그러게요.”
우영민 과장도 펀드 매니저 하면서 꽤 이런저런 많은 일을 경험해 봤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조성돈 팀장의 탁월한 기획안도 한몫했다.
데이콤 지분에 관심을 두는 동양, LC 전자, 대운 전자, HY 전자, 심지어 오성 전자의 지분도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족쇄에 묶여 오성 전자가 현금이 두둑한 오성 생명을 이용해서 데이콤 지분에 미쳐 있는 모습을 훤히 그릴 수가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손해를 볼 수 없는 장사였다.
“문제 될 것은 없겠어?”
“차명 지분을 이용해서 10% 상한선 규정을 지킨다면 크게 주목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물량이 130만 주나 되는데, 그게 좀 염려가 되네요. 너무 많습니다.”
“명의를 나눠서 하면 되지 않아?”
“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래도 만약 지분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언론이나 대기업의 주목을 받을 텐데, 그게 좀 걱정되네요.”
“딱히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잖아?”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 지분을 노리는 기업인 LC 전자, 오성 전자, 대운 전자와 같은 기업이 호락호락 넘어가겠습니까? 다른 수단을 마련하겠죠.”
최근 최민혁의 움직임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은 김명준 과장은 오히려 반문했다.
“그 이상하네. 왜 우리가 당할 거라고만 생각하는 거야? 칼자루를 쥔 우리가 주도권을 잡아서 마음대로 할 수도 있잖아. 내가 보기에 실장님이 의도한 것도 그거야.”
“…아, 그것도 그러네요. 실장님은 데이콤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으니, 그놈들에게 주식을 비싸게 팔아먹을 수도 있겠습니다.”
“실장님이 노린 게 그거 아닐까?”
“와우, 우리 보스, 진짜 많이 변했습니다.”
“이 자식이!”
“아아, 알았습니다.”
그는 슬쩍 뒤로 물러나서 일이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는 김명준 과장을 쫓아냈다.
* * *
코스피 단가 조정장이 오성 전자 폭락과 같이 일어나면서 생각보다는 낙폭이 컸다. 모든 증권회사에서는 숨김없이 그대로 정부 주식 부양 정책을 비난했다.
정부가 뒤늦게 여러 가지 추가 정책을 내놓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는 형국에 불과했다.
데이콤 주가 하락은 이 코스피 내림세를 그대로 따라갔다.
통신 제조 업체로 지분 매입 제한이 있는 대기업은 데이콤 주식을 사들이고 싶어도 손쓸 방법이 없었고, 괜히 관련 회사 통해서 주식을 사들이다가 주가 조작 때문에 눈이 벌게 있는 검찰이 무서워서 몸을 사렸다.
팔려는 사람은 많고, 사는 사람은 없는 상황에서 우영민 과장의 데이콤 주식 매입은 순탄했다.
심지어 받아주는 세력이 나서자 코스피 조정장에 부담을 느낀 장기신용은행도 대거 시장에 주식을 계속 매각했다.
하지만 2주에 걸쳐서 거래된 물량이 무려 130만주나 되자 데이콤 주가는 코스피 대형주가 모두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반등에 성공해서 결국 95,000원에 안착했다.
평균 매입가 92,000원에 무려 130만 주를 사들였는데, 정상적인 코스피 시장이었다면 가격제한폭까지 올랐을 것이다.
‘1,200억이라.’
최민혁은 데이콤의 미래를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이 데이콤 주식을 가지고 어떻게 이용할까 궁리를 거듭했다.
‘LC 전자나 HY 전자도 이 시기에는 데이콤이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테지.’
하지만 그는 이보다는 데이콤 지분 매입 결과를 돌아보면서 고민했다.
‘따지고 보면 KM 전자 구조조정하면서 얻은 정보잖아. 만약 내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이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거야. 김 상무가 참 고맙네. 너무 서둘러서 김 상무를 쳐내는 것보다 더 챙길 것은 챙겨야겠어.’
그랬다.
KM 전자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최훈열 전무를 제거하고, 김현우 상무를 압박했으며, 최문경 부회장을 누르기 위하는 과정에서 얻은 소소한 결과였다.
만약 은퇴해서 낚시나 하고 있었다면 이런 정보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조성돈 기획 팀장을 다시 호출해서 데이콤 주식 매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친절하게 권유해 줬다.
뜬금없는 데이콤 주식 매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조성돈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실장님, 외람된 말이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역시 의심 많은 조성돈 기획 팀장의 태도에 피식 웃고 말았다.
“선택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전 강요할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빚을 내서라도 데이콤 매입해도 괜찮은 적기입니다. 이런 시기는 흔치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 * *
조성돈 기획 팀장은 기획 팀 미팅 시간에 간단하게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말해 주었다.
놀랍게도 기획 팀원 중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의혹을 드러낼 직원조차 오히려 데이콤 주식 가치를 다시 생각했다.
배종대 과장과 정성근 대리는 이미 데이콤 투자에 관해서 일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