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4화 (54/1,021)

#54

주변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은 채 막 밀어붙이면서 외부 소통과도 담을 쌓았던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제 한창 북미 수출 계약 건 때문에 정신이 없던 북미영업 팀에게는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KM 전자는 이 일로 다시 발칵 뒤집혔다.

심지어 STB 사업부 임직원조차 김현우 상무를 싸잡아서 공격했다.

본사 모든 임직원이 다 적이 되어서 공격받는 상황에 부딪친 김현우 상무는 전무실 집기를 다 뒤집어엎으면서 분노를 토했다.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천선구 과장과 같이 단골인 요정 집을 찾았다.

“최 실장 이 개새끼, 내가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만다!”

벌벌 떠는 천선구 과장은 그저 고개만 조아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벼랑 끝에 선 김현우 상무는 시간이 지나자 점점 안정을 찾았고,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서 계속 머리를 굴렸다.

김현우 상무는 천선구 과장을 보면서 소리쳤다.

“선구야, 지금 분위기 너도 알지? 방법을 빨리 연구해라. 안 그러면 너도 회사에서 버티지 못할 거다. 아니, 네가 데려온 애들도 마찬가지고.”

자기 인맥 15명을 데려왔던 천선구 과장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김현우 상무를 끌어내리면 자신들이 다음 차례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사장과 부사장마저 최 실장에게 붙은 마당에 힘으로는 무립니다. 차라리 김 상무님 아버님에게 부탁하는 것은…….”

“힘들어.”

그는 풀썩 소파에 앉은 채 담배를 베어 문 채 고민에 빠졌다.

최두진 사장에게서 너무도 많은 것을 지금까지 받았고, 심지어 그 와중에 사고도 많이 쳤다.

덕분에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이제 거의 무너진 상황에서 이런 일로 찾아갔다가는 정말 버림받을 수도 있었다.

심각한 천선구 과장도 고뇌를 거듭하다가 손뼉을 쳤다.

“설기식 박사 특허는 어떨까요?”

“그걸로 뭘 어쩌자는 거야?”

“그분이 고안한 Bit Rate Control 특허는 MPEG-2의 핵심 특허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오죽하면 상무님께 그 특허는 설기식 박사와 김 상무님 이름으로 올리자고 했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김현우 상무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게 그렇게 가치가 있어?”

천선구 과장은 침이 튈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표준화로 채택만 된다면 돈방석에 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으로 다른 회사, 아, 맞다, 오성 전자도 관심이 있으니, 협상하는 겁니다. 만약 그들의 도움을 빌릴 수만 있다면 최 실장을 쳐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을 찍어내자고 그보다 더 악독한 오성 전자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김현우 상무는 반박했다.

“인제 와서 오성 전자에 아는 인맥도 없잖아. 턱도 없는 소리 마.”

욕망 때문에 사내 정치를 잘 아는 천선구 과장이 소리쳤다.

“아, 황 과장, 아니, 기조실의 황광수 차장도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오성 전자 기획실에서 잘나간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황광수 차장이라면… 알아, 나에게도 전화가 왔으니까.”

실제로 황광수 차장을 몇 번 만났다. 간단한 이야기만 오갔지만, KM 전자 내부 정보에 관해서 관심을 보였다.

천선구 과장은 살기 위해서라도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오성 전자의 투자를 받아올 수 있다면, 즉 김 상무님이 원래 받기로 한 지분을 오성 전자에 매각할 수 있다면, 최 실장을 쳐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성은 영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어느 정도 대안을 찾았다고 생각한 천선구 과장은 계속 유혹했다.

“지금 당장은 방법이 있습니까. 일단 오성 전자를 끌어들여서 최 실장을 견제할 수만 있다면 일이 쉽게 풀릴 겁니다.”

아마 보통 때라면 거절하겠지만 지금 벼랑 끝에 선 김현우 상무는 이전과는 달랐다.

“후유, 그래. 혹시 썩은 동아줄이라도 내려 줄지 모르니, 한번 알아봐. 아니, 만나자고 따로 약속을 정해라. MPEG-2 관련 특허를 다 정리해서 가져오고, 다만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면 안 돼!”

“알겠습니다.”

* * *

최민혁도 대놓고 김현우 상무를 박살 내서 기분이 통쾌했던 터라 내심 웃기만 하지 않았고, 김명준 과장을 통해서 자세히 살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김명준 과장이 김현우 상무가 황광수 차장과 비밀리에 만났다는 정보를 들었다.

“장소 때문에 자세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주로 MPEG 특허와 관련된 사실을 가지고 협상했다고 합니다. 나온 이야기 중에는 오성 전자 투자 관련된 부분도 있습니다.”

원래 김현우 상무를 자극해서 사고 치기를 원했던 최민혁은 의외의 상황에 고민했다.

“우리 회사에서 고안한 MPEG-2 관련 특허는 의미가 없어요. 아마 그걸로 오성 전자 투자를 받는다든지 그런 방식을 고민한 것 같군요.”

“괜찮겠습니까?”

“좋은 일은 아니죠.”

안색이 굳은 최민혁은 설마 김현우 상무가 오성 전자를 끌어들이려 할지는 예상 못 했다.

‘늑대를 쫓기 위해서 호랑이를 끌어들인 것이나 진배없어. 그 위험성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할까요?”

그는 심각한 김명준 과장 얼굴을 보자 오히려 피식 웃고 말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김현우 상무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김명준 과장은 뜻밖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우 과장 이야기로는 이미 오성 전자가 KM 전자를 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TV 사업부가 그 목표인데, 필요하다면 KM 전자 전체를 노리고 있습니다. 가볍게 볼 일은 아닙니다.”

“그렇겠죠.”

그럴 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실제로 그렇다는 정보를 확인한 최민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최민혁은 문득 미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 이 시점에서는 구치소 갇혀서 재판만 받는 중이라 외부 일은 몰랐다.

최민수에게서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진 KM 전자 사정을 들었다.

‘특히 오성 전자를 비롯한 가전 3사 욕을 많이 했지. 어쩌면 지금 일어나는 일이 더 빨리 당겨져서 생긴 일일 수도 있어.’

실제로 최훈열 전무가 비록 여자를 밝히기는 하지만 사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이용한 김현우 상무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김현우 상무는 살기 위해서 발악을 했고, 결국 오성 전자 손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회사 혼란은 극에 달했고, 부정부패로 몰락해 갔다.

최민수가 비록 경영 수업이라는 명분으로 본사 기획 팀에 들어왔지만, 내막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자 당시 구치소에 있던 최민혁을 찾아가서 푸념을 털어놓았다.

‘단순히 드러난 기사나 이야기만으로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어. 앞으로는 미래 정보를 활용할 때도 조심해야겠어.’

“혹시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저녁에 다시 고려대 컴퓨터 공학과 교수인 설기식 박사를 만났습니다. 우 과장이 분석한 바로 이쪽에서 Bit Rate Control 관련 MPEG-2 특허를 출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지분이 김현우 상무, 설기식 박사 소유입니다. 이건 그 특허입니다.”

“……?”

고개를 갸웃한 최민혁은 특허 문건을 확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MPEG-2 표준화를 구성하는 다섯 핵심 기술 중의 하나인 Bit Rate Control은 MPEG-2 압축에서 영상 시퀀스 제어 방법과 관련된다.

설기식 박사가 발표한 특허 5가지는 바로 이와 관련이 있었다.

최민혁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이 MPEG-1이나 MPEG-2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이나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차분하게 MPEG에 대한 것을 돌이켜보았다.

MPEG이 매개체가 되자 자연스럽게 연관된 기억이 떠올랐다.

‘지수구나.’

이지수는 최민혁을 보기가 무섭게 몇 가지 훈련을 시켰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원천기술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MPEG이었는데, 특히 MPEG 관련 특허 풀을 직접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어쩐지.’

최민혁은 떠오른 MPEG-2 특허 다섯 가지 영역을 기준으로 해서 전체 특허 풀을 하나둘씩 떠올리며 설기식 박사 특허와 비교했다.

‘이건 꽤 그럴듯하네.’

MPEG-2 특허 두 가지만 고안한 오성 전자는 이 특허에 군침을 흘릴 것이다.

결과적으로 MPEG-2 표준화에 채택되지는 않는 특허였다.

‘하지만 오성 전자는 그 사실을 몰라. 어쩌면 미끼로는 딱 맞는데…….’

최민혁도 처음에는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을 좀 달리하기로 했다. 어차피 오성 전자에게 비싸게 TV 사업부를 팔아치우려면 호구가 아니라 동등한 상대로 좀 강력한 인상을 보여줄 필요성을 느껴 원점에서 다시 생각했다.

‘VCR은 그 시작일 뿐이고, 결국 눈독을 들이고 있는 TV 사업부 쪽을 노릴 거야. 자칫해서 비밀이 새나가면 더 큰 문제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최악도 고려해야 한다. 굳이 최문경 부회장과 장승일 실장과의 갈등을 부추긴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니까.

아니, 한 가지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거슬려.’

최민혁은 결국 TV 사업부를 노리는 오성 전자가 김현우 상무일에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오성 전자 대응책에 대해서 또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이 시기에 오성 전자가 관심을 둘 만한 아이템 하나를 떠올렸다.

‘아, 데이콤이 있었구나.’

그는 조성돈 팀장을 불러 오성 전자와 데이콤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라고 지시 내렸다.

“오늘 저녁 중으로 봤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몇 번 이런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조성돈 팀장은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새로운 아이템에 관한 조사일까?’

* * *

최민혁은 기획 팀 보고를 기다리면서 데이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데이콤 미래를 잘 아는 터라 굳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도 별다른 보고를 받지 못하자 일단 확인차원에서 직접 기획 팀을 찾아갔다.

저녁 먹고 난 기획 팀은 한창 데이콤에 관한 이야기로 뜨거웠다.

“정 대리, 내 말은 KM 전자 주식이 어려우면, 데이콤도 괜찮다는 소리잖아. 요즘 코스피가 계속 하락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어차피 KM 전자 사들이려고 마련한 돈을 그냥 둘 바에는 데이콤이 확실히 괜찮습니다.”

하락장에도 역시 주목받는 주식은 있게 마련이고, 정성근 대리는 그 점을 주목했다.

특히 데이콤 조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1,700원을 찍은 KM 전자 주식보다는 현재 데이콤 주가에 관심을 뒀다.

눈치 빠른 배종대 과장이 정성근 대리에게 잔소리하는 중에 최민혁 실장을 발견하자 화들짝 놀라서 정자세를 취했다.

다른 기획 팀 역시 마찬가지다.

건너편에서 귀를 쫑긋한 채 듣고 있던 박상기 차장이 슬쩍 일어나서 최민혁 실장에게 다가가서 다른 화제를 꺼냈다.

“실장님, 법인 카드 잘 사용했습니다.”

“팀 화합을 위해서 늘 회식을 해야죠.”

업무 시간 중에 주식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한 것 때문에 당황한 조성돈 팀장이 후다닥 뛰어와서 최민혁 눈치를 봤다.

“…저기 실장님, 딱히 큰 의미를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우리 회사 주식은 떨어져도 손대기 어렵고, 틈틈이 재산 불리기로 주식 투자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데이콤은 가격이 너무 올라서 매력이 없을 텐데요?”

정성근 대리가 바로 소리쳤다.

“오늘 종가가 8만 원입니다.”

“그럴 리가…….”

다른 종목과는 달리 데이콤처럼 영향력이 큰 종목 주가는 어느 정도 기억하는 최민혁은 기획 팀 회의 테이블에 놓인 오늘자 신문의 데이콤 주가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어, 정말이잖아?’

* * *

오성 전자가 그렇게 공을 들인 데이콤 종목의 미래를 아는 최민혁은 바뀐 미래를 철저하게 살폈다.

바뀐 분기점이 있었다.

통신산업 구조조정의 일환 중의 하나가 이 소유 지분 3% 상한선을 10%로 변경하는 것이다.

기존 대기업에서 들고 있는 물량 3%에서 무려 10%까지 더 사들일 기회를 잡은 대기업이 미친 듯이 데이콤에 달려들고, 데이콤 주가는 다시 무섭게 오른다.

‘통신사업자 지분소유상한선이 변경되지 않았잖아?’

이유는 뜻밖에도 최훈열 전무 재판 기사 중에 나온 비자금 뉴스 때문이다.

대형 언론은 다들 이 비자금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지만 작은 언론사는 그렇지가 않았다.

계속 이 비자금이 터져 나오면서 비난을 받은 주체는 역시 금융권 고위층을 비롯한 이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다.

최훈열 전무 재판이 지속하는 과정에서도 이 여론은 더욱더 나빠졌다.

분위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대기업에 특혜를 주는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일방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은 나비효과의 과정을 이해한 후에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했다. 잘만하면 데이콤 지분 이용해서 오성 전자를 엿 먹여서 김현우 상무 일에 끼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정말 최훈열 전무 재판이 데이콤의 변화에도 영향을 준 것일까?’

최민혁도 김현우 상무를 처리하는 것에 앞서서 데이콤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 분기점에 대해서 먼저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결국 구체적인 내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최훈열 재판에 정신없는 박두영 부장검사를 서울대공원에서 만났다.

오늘은 박두영 부장검사도 가족과 같이 오붓하게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