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8화 (28/1,021)

< #028 >

하지만 모든 연구원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소형TV 연구 파트가 위치한 건물 휴게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윤선기 대리가 그랬다. 침울한 얼굴을 한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직해야 하나?’

회사를 옮기려고 결정했다면 몇 년 전에 했다. 그런데 마음에 맞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계속 결정을 미적거렸다.

작년에 과장 진급하지 못한 것도 회사에서 나가라는 암묵적인 의도였다.

‘최 전무, 이 개새끼.’

“어, 윤 대리님, 안녕하세요.”

“누구? 아, 정 대리네. 본사에는 잘 올라갔어?”

“네. 걱정해준 덕분에 보고서도 잘 끝냈습니다.”

첫인상이 별로라서 구박을 했지만 뒤늦게 정성근 대리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했던 윤선기 대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안 좋은 소리 같네. 기획팀장님은 별말 안 하는 거야? 혹시 우리 사정을 전부 다 떠버린 것은 아니겠지?”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하긴 오죽할까.”

그는 뒤늦게야 정성근 대리와 동행한 사람을 발견했다. 아직은 여전히 담배를 문 채 넌지시 눈짓으로 질문했다.

“본사 최민혁 실장님입니다.”

“커, 커컥, 코, 콜록.”

마치 폐렴에 걸린 환자처럼 기침하던 윤선기 대리는 잔뜩 긴장한 채로 최민혁과 뒤에 동행한 이들을 살폈다.

비록 나이가 어린 최민혁이었지만 본사에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거의 악마와 비견되는 이라서 잔뜩 긴장했다.

‘정말 그 지독한 최 전무와 싸운 인물이란 말인가?’

최민혁은 악수와 동시에 부드럽게 인사하면서도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공장 임직원과 아는 척을 했지만 유독 윤선기 대리만 특별 대우했기 때문이다.

“이 분은 주로 TV 안테나 설계를 전담합니다. 그런데 그쪽 분야에 경험이 많고, 요즘은 무선 안테나 쪽에도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소형팀으로 와서는 차세대 제품을 개발하면서 그쪽에 경험이 많습니다.”

“무선 안테나라......”

솔직히 정성근 대리가 뭘 알고 말하는지 의아스러웠지만,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안테나 쪽에 실력이 뛰어난 엔지니어란 말이구나. 하긴 무선 안테나 쪽 전문가도 필요하지. 저 까다로운 정 대리가 인정한 친구라면, 지켜볼 만하겠어.’

정성근 대리는 슬그머니 윤선기 대리를 쳐다보았다.

“김 부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게 좀 그래.”

“어차피 안 팀장님을 통해서 저도 프로젝트 현황 봤습니다. 실장님에게 전해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지시받았고, 이렇게 실장님과 같이 직접 찾아온 겁니다.”

“알았어.”

이미 안선종 팀장에게도 들었기 때문에 윤선기 대리는 그제야 이들을 소형 연구팀으로 안내했다. 그는 그들을 안내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쩌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콩가루도 울고 갈 TV 연구소 분위기를 떠올리자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잘 될까?’

***

다른 팀과는 달리 소형 연구팀은 TV 연구소 내에서도 왕따 취급을 받았다. 일단 이곳에 소속되면 무조건 퇴출당한다는 공식마저 생겼다.

그럼에도 최근 이 연구팀으로 옮긴 이들 중에 회사를 그만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악으로 깡으로 회사에서 버텼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이는 역시 대형팀에 있다가 이 팀으로 옮긴 김갑래 과장이다. 눈치가 빨라서 주변과 큰 불협화음을 만들지 않은 채 주변 팀에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챙겨서 연구를 계속했다.

김창호 부장이 생긴 것과는 달리 주변 외압을 그럭저럭 잘 막아 주었고, 안선종 팀장 같은 이의 도움을 은밀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퉁퉁 부어 있는 안선종 팀장 얼굴을 보자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안 팀장님, 얼굴이 왜 그럽니까?”

“어, 별일 아냐.”

업무에 지친 김창호 부장은 파김치가 되어서 툴툴거렸다.

“오늘 회사가 평소와는 달리 이상하게 시끄럽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연구소 한구석에 위치한 것도 있지만, 주변 연구원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는 선행 개발팀은 외부에서 일어난 소동을 알지 못했다.

“김 부장, 자네도 참 천하태평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는 안 부장님이야말로 괴짜 아닙니까. 전 조 소장에게 그렇게 간과 쓸개까지 빼주면서 연기할 자신 없습니다.”

커피를 홀짝이던 안선종 부장은 아픈 뺨을 쓰다듬으면서 피식 웃었다.

“피차일반이야. 김 부장 자네는 경력이 좋아서 오라는 곳이 많잖아. 최병연 팀장이 자네에게도 이야기해보라고 하던데, 오성 전자 인사팀에 추천해줄 수 있다고.”

“마, 됐습니다.”

“이곳 분위기 잘 알잖아. 진짜 미래가 없어.”

“다른 곳이면 아닐 것 같습니까. 오성 전자가 얼마나 살벌한 지는 제 친구 통해서 다 듣습니다. 거긴 저랑 안 맞아요.”

“그래도 이젠 좀 생각을 달리해야 할 거야.”

“무슨 일이 있군요.”

“내가 오래 못 버틸 것 같아.”

“설마 최 전무가 그만두라고 합니까?”

“아니 내가 먼저 최 전무에게 선전포고했어. 부품 부풀리기 통해서 회사 공금을 빼돌린 것부터 시작해서 이제까지 한 모든 불법행위에 대한 증거를 검찰에 다 넘겼어.”

김창호 부장의 좀비 같았던 얼굴이 더 기괴하게 변했다.

“진짜입니까?!”

“어.”

“아니, 쌍, 그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이제까지 잘 지내시던 분이 인제 와서 대형사고(?)를 치면 어떻게 합니까.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최 과장이 하는 연구 말하나 본데, 포기해. 가능성이 없어. CRT 화면이 크고, 평평해질수록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가. 거기에 얇게까지 만들려면 지금 기술로는 어림도 없어.”

“그건 모르는 소리입니다. 지난주에 기술 개선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안 부장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연구실 한쪽 실험실에서 고함이 울렸다.

[서, 성공이다. 진짜 성공했어!!]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그쪽으로 달려갔는데, 최구만 과장과 김갑래 과장이 서로 끌어 앉은 채 호들갑을 떨었다.

원래 감정 표현을 잘 안하는 최구만 과장이 두 사람을 보기가 무섭게 후다닥 달려와서는 와락 끌어 앉으면서 유레카를 외쳤다.

“서, 성공입니다. 이게 모두 두 분 덕분입니다. 두 분 도움이 없었다면 그 개 같은 최 전무나 조 소장 눈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무조건 실패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연구 때문에 힘들었던 이들도 최훈열 전무나 조상도 연구소장의 압력 때문에 수십 차례나 포기하려고 했었다.

최훈열 전무의 사장 취임 소문 때문에 실제로 포기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완벽히 달라진 것이었다.

그들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필사의 각오로 또다시 매달렸고, 결국 3년간의 프로젝트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맙소사 정말 성공했어?”

“네!”

김창호 부장도 격정적으로 말했다.

“저, 정말이야? 볼 수 있어?”

“따라오십시오.”

***

실험실 한 쪽에 놓인 것은 TV 뒷면 덮개가 분리된 37인치 대형 TV였는데, 기존 모델과는 달리 두께가 현저히 얇았다.

전자총 주변에 달라붙어 있는 부품 역시 근처에 분해된 다른 대형 TV와는 달랐다.

결과적으로 일반적인 브라운관 TV보다는 35% 가까이 얇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안선종 팀장이 중얼거렸다.

“편향각이 커지면 전자가 그만큼 많이 휘어줘야 해서 난이도가 많이 올라가. 다른 어떤 것보다 고압 변성기 안정성이 중요해. 그런데 기존에 납품받는 것으로는 어려웠을 텐데......”

“그래서 새로 개발했다고 했지 않습니까. 최병연 팀장님이 얼마나 생고생했는지 제가 몇 번이나 설명해도 안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여길 보세요!”

일반적인 고압 변성기 구조는 고압권선과 저압권선을 분리해서 철심을 중심으로 동심 배치한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태생적으로 여러 가지 한계가 존재한다.

TV 내부에 절연재료로 떡칠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테스트 중인 고압 변성기는 얇은 형태의 몰드형 타입이었다. 두께가 대폭 얇아지고, 안정성마저 좋아진 것이다.

편향 코일 디자인도 특이한 형태였는데, 편향각 조절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너절하게 붙어 있는 다른 부품 역시 마찬가지다.

“......이게 정말 동작하는 거야?”

“정말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답은 이 고성 변압기와 평향 코일에 있었습니다. 특히 고성 변압기 전압 안정화가 핵심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 자잘한 수정 작업 역시 보는 것과는 달리 많았다.

TV 브라운관에 전원을 넣자 화면에 시원한 바다가 나왔다.

고질적인 문제인 색감 저하 현상부터 시작해서 다른 어떤 문제도 없었다.

놀라운 것은 화질이 기존 모델 대비해서 대폭 좋아졌다.

TV 두께는 얇아졌고, 부품은 단순화되면서, 화질은 대폭 개선된 것이었다. 기존 TV 브라운관 한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걸작이었다.

“마, 맙소사 진짜 성공했구나.”

“이게 모두 안 팀장님이 배려해준 것 때문입니다.”

그는 뒤늦게 이 연구를 3년 동안이나 묵묵히 진행했던 옛 동료를 떠올렸다. 그들이 하나둘씩 그만두면서 얼마나 갈등했는가.

그래도 이 프로젝트를 버릴 수가 없어서 끝까지 매달렸고, 그 결실을 3년 만에 본 것이었다.

그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안선종 팀장이 기쁨에 차서 소리쳤다.

“이 친구야,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내가 해준 것이라고 필요한 금형만 해준 것뿐이야. 설계 변경은 자네가 다 한 거잖아.”

“제가 다했다고 하기 힘들죠. 최 팀장님이 큰 그림을 다 만들었고, 가장 문제가 되는 고압변성기과 편향 코일을 다 설계했으니까요.”

정확히는 3년 전부터 최병연 연구팀이 이 개발을 진행했는데, 그 와중에 최훈열 전무의 외압을 받으면서 결국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최훈열 전무와 싸우는 와중에 산산 조각난 팀의 미래를 걱정한 최병연 부장은 결국 팀원을 데리고 오성 전자로 이직했다.

윤선기 대리를 포함한 남은 세 사람은 최병연 팀의 연구 성과를 포기하지 않은 채 끝까지 밀어붙였고, 3년 만에 결국 이 연구 프로젝트를 완성한 것이었다.

“그래도 개요만 나온 거잖아. 그걸 상품화한 것은 자네가 다 한 거야. 참 특허는 어떻게 되었어?”

“예전에 낸 특허는 이미 지난주에 등록되었다고 통보받았습니다. 최근 특허는 한국, 미국, 일본은 자비로 처리했습니다. 나머지가 문제입니다.”

“자비라니. 그건 내가 회사에 보고 해서......아, 이런 젠장맞을.”

뒤늦게 자기가 벌인 일을 떠올린 안선종 팀장은 침울했다.

그는 기쁨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을 보면서 머뭇거리다가 막 공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할 때 연구실 문이 열렸다.

윤선기 뒤를 따른 정성근 대리가 먼저 나섰다.

“안 팀장님, 여기 계셨군요. 잘 지내셨죠?”

“어, 정 대리?”

“네, 또 내려왔습니다.”

눈치 빠른 정성근 대리는 연구실 내부를 잽싸게 살피다가 돌아가고 있는 신형 TV를 보자 깜짝 놀라서 눈을 반짝였다.

그가 지난번에 이곳에 와서 봤을 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테스트 중이 이 모델은 여전히 실험 중이었다.

역시 기획팀답게 무섭게 주변 인물을 아예 무시한 TV 앞에 다가서 확인했다.

“아, 이거 설마 성공한 겁니까?”

“그게 말이야.”

그는 머뭇거리다가 힐끗 아직도 연구실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특히 제일 앞에 서 있는 자기 막내아들보다 더 어린 사람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행히 분위기 파악도 귀신같은 정성근 대리가 귓속말로 최민혁을 소개해주었다.

물론 최민혁은 완전히 TV에 빠져 있어서 다들 침묵한 채 지켜보기만 했다.

***

주변 상황을 완전히 잊은 최민혁은 자기소개보다는 눈앞에 놓인 물건에 정신이 나갔고, 천천히 걸어가서 테스트용 TV 화질을 확인한 채 넋을 잃고 말았다.

콩가루 집안을 넘어서는 막장 연구소에서 이런 물건이 나오다니.

‘정 대리 말처럼 진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어.’

브라운관 TV는 전자총과 전자빔의 이동 거리 때문에 두꺼울 수밖에 없는데, 평균적으로 400mm 정도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 두께가 대폭 줄어 있었다.

‘놀랍구나. 비록 LCD TV에 비해서는 두껍다고 해도 무시할 정도는 아냐.’

지금 시대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 간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브라운관 TV, LCD TV를 거쳐서 OLED TV로 바뀌는 TV 역사가 있지만, 브라운관 TV 고유의 장점을 감안하면 이 실험용 TV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최민혁은 조심스럽게 브라운관 TV 안쪽을 살펴보고서야 그 내부가 주먹구구식으로 전부 다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편향 코일부터 시작해서 고압 변성기까지 중요한 부품을 일일이 다 만들었다. 이게 하루 이틀에 걸려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브라운관 TV 전성기는 앞으로 3년 정도이니, 지금 이 물건은 시장에서 대박이야.’

전혀 예상에도 없는 일이라서 잠깐 고민을 계속해야 했다.

‘꿈속에서는 이런 시제품은 없었어. 아, 둘째 큰아버지가 사장이 되면, 결국 저들부터 다 잘라내겠구나. 아니 취임 전에 말이 나올 테니, 자발적으로 그만들 수도 있어. 둘째 큰아버지 성격이라면 아예 저들 주장을 듣지를 않을 거고, 결국 이 연구 결과는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한 채 사장되겠네.’

최민혁은 뒤늦게 이 제품을 이용하면 TV 사업부 가치를 최대한 키워서 몇 배의 가격으로 가진 지분을 팔아 치울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 #02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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