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9 >
물론 최용욱 회장이 이 신형 TV에 대해서 알면 지분 매각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최용욱 회장과 다른 대주주 지분을 사들인 후에 TV 사업부를 최대한 비싸게 팔아치우는 계획까지 잠깐 고민했다.
오디오 사업부와 시너지 효과가 큰 새로운 사업을 꾸리고, 지금 이 시기에 발전 가능성이 높은 MP3 플레이어와 같은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금 연구소 인력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한 후에 MP3 원천기술과 MP3 플레이어 특허까지 다 선점한다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사실 후일 수 조 가치가 넘는 특허가 핵심이지.’
선택지는 많았다.
최민혁은 단숨에 떠오른 새로운 마스터플랜에 대한 내심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제야 긴장한 채 서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여러분에게 실례했습니다. 환상적인 신형 TV에 정신이 나가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가 기획실장 최민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선종 팀장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한 이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눈동자만 굴렸다.
그들 역시 아직은 최민혁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
워낙에 나이가 어려서 드는 실망 따위를 가질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그저 눈으로 본 것만으로 최민혁을 판단했는데, 믿을만했다. 솔직히 최훈열 전무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가진 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마치 노숙자를 떠올리게 하는 최구만 과장, 절연 재료인 흑연을 뒤집어써서 꼭 광부같은 김갑래 과장, 눈동자만 굴리는 김창호 부장, 자포자기한 안선종 팀장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저 그렇게 앞뒤 콱 막힌 사람은 아니니까.”
정성근 대리 통해서 대충 간단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안선종 팀장이 대표로 나섰다.
“이게 정식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연구소 예산 일부를 일부 전용한 것도 있습니다. 물론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를 위해서 단 한 푼도 엄한 곳에 쓰지 않았습니다.”
“됐습니다. 회사 내부의 피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프로젝트 관련해서 비용을 썼다면 기존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굳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회사 내부 정리가 끝나면,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까지 한다고 고생한 실적에 대해서는 따로 충분한 보상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본사 분위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지금처럼 이 일은 여러분만이 아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나마 조상도 연구소장하고 싸우면서 눈치를 많이 쌓은 김창호 부장이 잽싸게 대답했다.
“누구도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혹시나 노파심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KM 전자를 노리는 승냥이가 달라붙을 겁니다. 그러면 저도 합리적인 보상을 해드릴 수가 없고, 회사를 위한 여러분의 노력이 사규에 위반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안선종 팀장은 뜻밖에 최민혁 실장이 나이답지 않게 지금 상황을 신중하게 순탄하게 풀어가자 드디어 쾌재를 불렀다.
“그것은 저희도 원치 않습니다.”
걱정하는 이들 안색도 한결 밝아졌다. 그들은 악명과는 달리 뛰어난 리더쉽과 통찰력을 보이는 최민혁 모습에 오히려 감탄하고, 또 경탄했다.
새로운 변화에도 굳이 자신에게 묻지 않을 정도로 해박한 안목과 연구소 내부의 문제를 신중하게 바라보는 태도 때문이다.
‘진짜 최 실장님을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가 없었을 거야.’
이제는 어린 나이가 오히려 거꾸로 장점이 되어 있었다.
최민혁은 불과 단 몇 10분 사이에 바뀐 연구원의 시선에 만족했다.
“저도 여러분과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 물건에 대한 후속 조치와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여기 계속 있을 수 없습니다.”
“저희만 믿어주십시오.”
최민혁은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양산에 앞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그 부분은 잘 처리를 해주세요.”
“아,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미 양산성은 병행해서 검토 중입니다.”
그리고 연구동 한쪽에 있는 신뢰성 테스트 실험장에서 시험 중인 신뢰 평가 항목을 직접 보여주었다.
“기능 구현과는 별개로 제품 신뢰성은 따로 작업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기능만 가능한 동일한 모델로 신뢰성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이것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다.
“......놀랍군요.”
“명색이 이쪽 TV 밥만 먹은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자잘한 것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최민혁은 깔끔한 일 처리에 새삼 그들의 경륜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능력을 봤으니, 여기에 대한 일차적인 보상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조상돈 연구소장과 최훈열 전무에 대해서는 앞으로 신경 안 쓰셔도 될 겁니다. 아마 이 안산 공장에 내려와서 여러분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제까지 최훈열 전무에게 가장 많이 당한 최구만 과장은 깜짝 놀랐다.
“그게 가능합니까?”
“아마 그렇게 되겠지만, 확실히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무덤덤한 말이지만 이미 안산 공장을 뒤집어엎은 중앙지검 수사팀의 위용을 경험한 안선종 팀장은 그 어떤 의지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최민혁 말에 오히려 전율로 몸을 떨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만감이 교차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을 한 사람씩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들은 뒤늦게야 양손으로 만세를 부르고, 서로 포옹까지 하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특히 이제까지 모진 고초를 경험하면서 프로젝트 마무리를 한 최구만 과장은 결국 감정에 복받쳐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연구소 동료가 하나둘씩 떠날 갈 때도 마지막까지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한 일을 하나 둘씩 떠올렸다.
하루하루가 갈등의 순간이었다.
주변의 온갖 비웃음과 모욕에 견디면서 한때는 죽고 싶었다.
왜 자신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무려 3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고통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났다.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최민혁 손을 잡은 채 ‘감사합니다.’만 계속 반복했다. 그의 두 눈은 어느덧 최민혁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했다.
김창호 부장과 안선종 팀장이 교대로 최구만 과장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연구실을 나서는 최민혁 실장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정말 대단하구나. 한 마디 한 마디가 범상치가 않아. 회장님 밑에 저렇게 뛰어난 손자가 있다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야.’
***
최민혁은 연구실을 나서다가 멈칫 뒤를 돌아서 소형팀이 위치한 연구소 건물을 돌아보았다. 뒤늦게야 최구만 과장 양손은 흑연이 배여서 꼭 석탄 광부와 같은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는 정성근 대리 모습도 뒤늦게 확인했다.
“정 대리도 수고했어.”
표정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황당하기도 하고, 얼떨떨했다. 기분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아는 꿈과는 다른 미래가 펼쳐져서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했다.
본사로 올라가는 차량 안에서 눈을 감은 채 공장에서 본 광경을 하나 둘씩 떠올리면서 복기했다.
‘만약 최훈열 전무가 그렇게 악독하게 압박하지 않았다면 저런 결과가 나왔을까. 특히 최구만 과장같은 경우는 외골수 타입이야. 외압에 대해서 반발 심리로 저 연구를 끝까지 밀어붙였을 거야.’
그랬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최훈열 전무가 없었다면 저 연구는 실패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자신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최훈열 전무는 최민혁에 대응한다고 TV 사업부는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
소형팀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시간을 벌었고,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끝까지 달려들어서 결국 대안을 찾았다.
오성 전자가 오성 전기와 계열사들과 같이 매년 수백 억을 처발라도 하지 못한 일을 결국 해낸 것이었다.
그 노력과 신념이 그들의 미래를 다 바꾸었다.
미래 꿈을 꾸어서 미래를 안다고 확신한 최민혁은 강인한 인간의 의지와 신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이켜보다가 문득 미래 일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나도 어영부영할 수만은 없어. 확실하게 KM 전자 일을 마무리해야겠어. 문제는 기조실에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첫째 큰아버지도 이제 두고만 보지 않을 거야. 선수를 쳐야겠어.’
***
KM 그룹 부회장실에서 권재홍 비서실장에게서 보고를 받던 최문경 부회장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일에 한숨을 내쉬었다.
“Advanced MOS는 왜 갑자기 15%를 더 투자해달라는 거야?”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것에 당황한 권재홍 비서실장도 머뭇거렸다. 밑에 직원에게는 매사 냉혹했지만, 그 윗선에는 오히려 제대로 항변조차 못했다.
“권 실장, 이미 뻔히 아는 사실이잖아.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말이나 해봐.”
“아무래도 KM 전자에서 준비 중인 차입금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자 우리 회사 능력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봐도 무능한 둘째 최훈열 전무라면 차입금 작업이 늦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문제를 걸고 넘어갔다.
“설마 약속대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거 우리 회장님의 꿈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래?”
“그쪽 사람은 한국인과는 정서가 달라서 결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돌겠군. 좋아. 어차피 우리도 아쉬운 것은 없잖아. 필리핀 반도체 조립 공장 신설은 어떻게 되어가. 필리핀 정부에서 간접 자본 건설에 대한 반응은 어때?”
“그게 이왕이면 우리가 나서서 그일까지 해주기를 원합니다.”
“우리 KM 건설은......안 되겠군. 그렇다고 남 줄 수도 없잖아. 짜증 나네.”
뒤늦게야 KM 건설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여전히 후계 구도를 노리고 있는 셋째 최동영을 떠올렸다. 당연히 그룹 이익을 위해서 KM 건설과 협상을 해야 하는데, 도로를 비롯한 공사 규모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셋째 이놈이 정말 엉큼하다니까.’
“최 상무는 어때?”
“늘 변함없습니다. 정시 출근해서 자정까지 일하고, 딱히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회식해도 딱 자기 주량만큼만 마십니다.”
“그놈은 인간미가 없다니까.”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르는 소리 마. 셋째 그놈은 가슴 속에 칼을 품고 사는 놈이야.”
“......네.”
권재홍 비서실장도 딱히 아는 바가 없어서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동영 상무는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동영을 고민하다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만만해서 제거하기 쉬운 최훈열을 떠올렸다.
최훈열은 대학 시절부터 여자에 미쳐서 사고만 쳤는데, 이미 그때부터 최용욱 회장에게 신뢰를 다 잃어버렸다.
넷째마저 지분을 다 받은 마당에 아직도 빈털터리인 이유다.
‘결혼하고 나서 나아졌다고 해도 도는 소문으로는 여전히 바뀐 것은 없으니까. 하긴 아버지도 답답할 거야.’
회사 경험이 쌓이면 그래도 변할 거로 기다려봤지만 최훈열 전무는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특히 KM 전자가 지속해서 망가진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가 다른 이유도 있지만, 굳이 이제 대학교 1학년 최민혁을 실장에 앉힌 후에 둘의 갈등을 키워 빌미를 만들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둘 다 한 번에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했다.
본인 딴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아니면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해서 남의 눈에 뜨이지나 말든지. KM 전자 사장이 된다고 이곳저곳에 떠벌리고 다니니, 협박하는 놈도 생기잖아.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혹시 그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일어난 일 마무리는 잘 끝났겠지?”
“대회에서 돈이 오가는 것을 아는 이들은 입을 다 다물었고, 설사 본인이 폭로하고 싶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 자신이 더 잘 겁니다. 당사자인 오혜정 비서는 자세한 내막조차 모릅니다.”
“여자 하나 얻자고 공을 참 많이 들였어. 둘째 그 녀석이 회사 일도 그렇게 열심히 했다면 벌써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았을 텐데, 아, 혹시 모르니까, 확인한 내용은 잘 정리해 놔.”
만약에 둘째 최훈열 전무를 한 방에 보내기 위한 비장의 무기라는 것을 알아챈 권재홍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때 마침 비서가 안으로 들어와서 장승일 기획조정실 실장이 왔다고 말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장승일 실장이 갑자기 찾아올 일이 뭐가 있을까 떠올리면서 부회장실 안으로 들어와서 인사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겉으로 봐서는 얌전한 모범생 타입으로 별반 티를 내지 않는 장승일 실장을 가볍게 보지 않은 채 말없이 쳐다보았다.
“최훈열 전무 때문에 할 말이 있습니다.”
“최 전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최문경 부회장은 혀를 찼다.
“설마 그놈이 또 사고 쳤어?”
“비슷합니다.”
“이번에는 한참 TV에 뜨고 있던 그 지수인가 하는 신인을 임신시킨 거야?”
그는 지레짐작해서 소리쳤다가 장 실장 표정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02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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