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7 >
오히려 말리는 김종도 차장검사 말에 박두영 부장검사도 피식 웃으면서 멱살을 잡고 시끄러운 공장 분위기를 구경했다.
이번 수사에 합류한 검사와 수사관은 다들 뜬금없는 안산 공장 임직원끼리 싸움을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불구경하듯이 쳐다보기만 했다.
팩스 내용을 확인한 김종도 차장검사 말이 주춤했다.
[.....이거 정말 사실이야? 설마 KM 전자 협력 업체까지 다 건드릴 거야?]
[그렇게 되었습니다.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안 이상 규모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여기서 덮을 수는 없습니다. 압수수색 영장은 언제까지 되겠습니까?]
[......저녁까지는 될 거야.]
[그러면 인력을 더 할당해주십시오. 제가 먼저 그들을 나눠서 각 업체로 보내겠습니다.]
[......이봐, 박 부장, 자네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하는 거지?]
[네, 김종도 차장검사님의 소신처럼 법과 원칙에 따라서 철저하게 조사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희는 영장에 명시된 대로 압수 수색을 하면서 그 어떤 횡포나 강압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임직원분이 알아서 증거를 내놓은 겁니다.]
[......알았네. 영장은 내가 영장 실질판사에게 전화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는 히죽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몇 대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부은 안선종 팀장이 마치 해맑은 미소를 한 채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자신도 기회주의 부패 검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환대는 익숙지가 않았다.
‘기분이 좀 묘하군.’
하지만 그는 누군가 기획이라도 한 것처럼 앞뒤 일이 착착 맞아 들어갔기에 문득 기묘한 표정의 최민혁 실장 얼굴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설마 최 실장은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뭐, 상관없지. 난 내 일을 하면 될 테니까. 여기 일도 끝났으니, 굳이 이 자리에서 최 전무를 볼 이유도 없어. 빨리 움직여야겠어.’
***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압수수색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3시 무렵에 다 끝났다. 고작 6시간 만에 일이 끝난 것은 이미 박두영 부장검사가 압수 수색할 항목을 구체적으로 다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안선종 팀장이 내놓은 서류 덕분에 기존 검찰이 하듯이 굳이 억지를 써가면서 불필요한 자료를 챙길 필요가 없었다.
본사, 안산 공장, 연구소, 그리고 서울 은행 자료만 서로 일치하면 되기 때문이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이제까지 검사 생활하면서 이렇게 깔끔하게 압수 수색을 해 본 경우는 또 처음이라서 유쾌하게 안산 공장을 떠났다.
“수사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수사 진행에 따라서 협조 요청하는 때도 있겠지만, 안산 공장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에 제대로 수사하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마치 정의의 검사라도 된 것처럼 환영을 받으면서 박두영 부장검사 수사팀은 안산 공장을 떠났다.
그리고 불과 30분 정도가 채 지나지 않아서 최훈열 전무가 나타났다.
분노한 신연식 과장은 압수수색 동안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최훈열 전무에게 폭로했다.
살기를 물씬 풍기는 최훈열 전무는 얼굴이 다소 부어 있는 안선종 팀장을 마주했다.
“안 팀장.”
“별소리 마슈.”
너무 분노한 나머지 거꾸로 이성을 차린 최훈열 전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삐딱한 눈으로 쳐다본 안선종 팀장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지난 일이 새삼 떠올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서 온갖 인간적인 모욕을 받은 일이었다.
대놓고 욕설과 폭언을 일삼으면서 간과 쓸개도 없는 병신이라고 놀렸다.
밑에 팀원이 있는 자리에서 어떤 경우는 담배 심부름을 시켰고, 숨김없이 그대로 대머리라고 놀렸으며, 팀장 업무 능력이 신입보다 더 못하다고 초등학생 취급했다.
그게 또 좋다고 낄낄거리면서 노골적으로 병신취급했다.
최훈열 전무가 인간적인 모욕을 남발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기를 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최훈열 전무에게 충성한 척하면서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게 3년을 견뎠고, 이제는 굳이 노예로 살 이유가 없었다.
“최 전무 당신 대가리는 초등학생 지능보다 못한 것 아냐?”
“뭐야?”
“이 병신아, 사팔뜨기 병신 눈으로 세상에 제대로 보이겠냐?”
“이......”
너무 황당한 충격에 말을 더듬거리는 최훈열 전무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재상 비서조차 눈이 동그랗게 변해 있었다.
“야아, 최 전무, 이제 귀도 잘 안 들리냐? 너 치매 온 거야?”
“이 새끼가.”
“병신 육갑 떠는소리 마. 여기 공장 분위기보고도 느끼는 것 없냐. 너 같은 상등신을 이미 다들 진작부터 알아봤어.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개같이 수그리고 산 거야. 너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나 아냐, 이 저능아 새끼야!”
“이거야 원.”
말투부터가 평소와는 다른 것을 느낀 최훈열 전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압수수색 나온 검찰이 더 급해서 일단 참다가 뒤늦게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반문했다.
“설마 나에게 붙은 것도 진심이 아니었던 건가?”
“어, 그때는 방법이 없었어. 난 최병연 팀장 같은 꼴을 당하기 싫었어. 토사구팽이라니. 너무 구태의연하지 않아. 공장 돈을 빼돌리기 위해서 남건식 팀장같은 아첨꾼을 승진시켜서 대형TV 팀장으로 앉혔잖아. 아무래도 내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병신 취급한 거잖아. 덕분에 회사 꼴은 완전히 개판 됐지.”
회사 내부 갈등 문제가 나오자 최훈열 전무는 힐끗 주변을 돌아보았다. 몰려온 임직원 중에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보다 반감을 품은 이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그들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험악하게 바뀌었다.
‘안 팀장 저 새끼가 이런 분위기를 의도한 건가?’
긴장한 최훈열 전무는 이 자리에서 안선종 팀장을 더 자극할 수는 없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 팀장,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박 부장검사는 어디 있어?”
아연 질색을 한 신연식 과장이 겨우 숨을 돌린 채 나섰다.
“30분 전에 이곳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간 거야?”
“그게......”
그도 안선종 팀장이 준 서류를 봤지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재상 비서가 전화를 받더니 사색한 채 외쳤다.
“저, 전무님, 큰일 났습니다. 대림전자에도 중앙지검에서 나온 수사팀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쪽 회계 장부까지 다 뒤지는데, 어떻게 하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곧이어서 다른 업체에서도 하나둘씩 연락이 왔다.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에 몸을 비틀거리고 말았다.
이재상 비서가 다급하게 그를 부축하면서 같이 따라온 이들에게 소리쳤다.
“뭐해? 당장 전무님 부축해서 대림 전자로 가야 할 것 아냐!”
“알겠습니다.”
너무 큰 충격에 걸음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최훈열 전무 모습에 통쾌하게 쳐다보던 안선종 팀장은 잔뜩 굳은 채 눈동자만 굴리는 신연식 과장을 쳐다보았다.
“야아, 신 과장,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서류에 네가 빼돌린 증거 자료는 충분하다. 지금 대림전자 회계 서류를 들춰보면 빼박이야. 못해도 징역 4~5년은 나올 거다.”
“!”
큰 충격을 받은 신연식 과장은 몸을 가누지 못했고, 그를 옹호하는 이들 역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선종 팀장은 마치 명판관이라도 된 것인 집게손가락으로 일일이 그들을 가리켰다.
“너희 새끼들도 마찬가지야. 아까 박 부장검사란 양반이 하는 것을 봐서는 너희를 노리는 거야. 최 전무야 그룹 법무팀에서 도와줘서 어떻게 든지 검찰 수사에서 빠져나가겠지만 너희는 달라. 처신 잘해야 할 거다. 괜히 입 다물거나, 허위 진술하다가는 죄질이 나빠져서 형량이 더 나올 테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난 사실을 말해준 거다.”
충격에 몸을 떨던 신연식 과장은 크게 소리쳤다.
“안 팀장 당신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무사할 거로 생각합니까?!”
“난 그만둘 거다. 최 전무 그 새끼보다 더 악랄한 것이 너희 죽일 놈들이야. 각오 단단히 해라. 너희 개잡놈은 모조리 내가 감옥에 보내 버릴 테니까!”
그는 당당한 걸음을 한 채 자기 사무실 방향으로 걸어갔고, 눈치를 보던 다른 임직원 역시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돌아버리겠네.”
신연식 과장은 자신 옆에 달라붙는 동료가 한마디 할 때마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상황이 생각보다는 더 심각했다.
‘아, 아니겠지. 아닐 거야.’
***
안산 공장 입구에 주차된 차량 안에서 물끄러미 최훈열 전무와 안선종 팀장이 갈등하는 광경을 쳐다보던 최민혁도 안산 공장 사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단지 공장이 본사 수준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정성근 대리는 최민혁 실장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어서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같이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안정을 찾았다.
“본사 내에도 최 전무 라인이 있지만, 안산 공장도 비슷합니다. 조상도 연구소장, 대형 TV 개발1팀 남건식 팀장, 중형TV 개발2팀 신연식 과장 같은 이들입니다. 안 팀장님 말로는 협력 업체 부품 가격 부풀리기에 관여한 이들입니다.”
“그러면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또 뭐고?”
“중형TV 개발1팀 안선종 팀장입니다. 이분은 저도 처음에 조상도 연구소장을 지지하는 최 전무 라인인 줄 알았는데, 본인 스스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건 이상한데.”
정성근 대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뒤늦게 저랑 있을 때 실장님에게 꼭 전해달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안 팀장님도 살아남기 위해서 최 전무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훗날을 위해서 계속 불법에 대한 증거를 모아 왔고요. 특히 소형 TV 선행개발팀이 자리 잡을 수도 있도록 많이 배려해줬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막바지에 몰린 안선종 팀장도 최민혁이 최훈열 전무와 갈등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사실을 토로한 것이었다.
“소형 TV 개발팀?”
“잘 아시겠지만, TV 사업부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주로 대형이고, 그다음이 중형입니다. 소형 쪽은 거의 매출이 없다시피 합니다.”
최민혁은 정성근 대리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혹시 소형 개발팀이 찍힌 이들이 자발적으로 나가게 할 목적으로 만든 팀이야?”
“......네.”
“그러면 그쪽 팀 사람은 대다수가 최 전무 반대편이겠군.”
“특히 최구만 과장은 원래 대형팀이 있다가 쫓겨난 경우입니다. 최병연 팀장이 다른 연구팀원을 데리고, 오성 전자로 이직할 때도 끝까지 버틴 분입니다.”
“그랬구나.”
최민혁은 TV 사업부 소속 연구원이 너무 많이 그만둬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떤 배경이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정성근 대리는 여전히 맹한 표정을 한 채 침묵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안 팀장님이 저러는 이유도 있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 저 사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몇 년 걸친 적자도 적자지만 그나마 돌아가는 사업부도 개판 오 분 전이야.”
“그래도 실장님 때문에 많이 나아진 겁니다. 워낙에 협력업체에 개판을 쳐놔서 최근에는 최훈열 전무 반대편에 선 사람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런다고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 당장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는데,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잖아. 저런 모습 어디에 회사 비전이 있어?”
합리적인 지적이었지만 정성근 대리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니 그도 솔직히 어처구니없는 연구소 내막을 몰랐다면 최민혁 반응이랑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난 지금 보는 것만으로도 암울해 보여.”
“으음, 그러면 제가 보여 드릴 곳이 있습니다.”
“?”
최민혁은 차에서 내린 후에 고개를 갸웃한 채 정성근 대리 뒤를 따르면서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김명준 과장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도대체 저런 상황을 보고도 정 대리가 저렇게 담담한 표정을 짓는 이유가 뭘까?’
***
TV 사업부 연구소는 크게 대형TV 개발팀, 중형TV 개발팀, 소형TV 개발팀으로 나누어진다.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형과 중형은 KM 전자에서도 중점적으로 지원을 받지만, 소형 TV 개발팀은 선행 개발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제대로 투자받지 못했다.
소형 TV 개발팀은 미래 먹거리를 위해서 일단 형식적으로 이것저것 만들기는 했지만, 제품 개발에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있는 몇몇 모델은 기술 과시를 위한 전시용일 뿐이다.
소형 개발팀은 엔지니어로서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면서 퇴출하기 직전에 임시로 거쳐 가는 조직이 되었다.
두꺼운 안경, 살이 푸짐한 체격, 짧은 키 덕분에 체격이 둥글둥글한 김창호 부장은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도 이 소형 개발 TV를 잘 이끌어갔다.
그는 좋은 성격 탓에 몇 년 전에 들어온 최구만 과장이나 김갑래 과장이 원하는 것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다 들어주었다.
< #027 > 끝
ⓒ SSDHD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