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6 >
***
최민혁은 재무팀에서 있었던 일을 김명준 과장 통해서 들으면서 상황이 계획한 것보다 좋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특히 최훈열 전무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늪 속에 빠트린 것에 만족했다.
다만 안산 공장으로 직접 내려갔다는 말에 고민에 빠졌다.
“최 전무가 직접 내려간다고 뾰쪽한 방법이 없을 텐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그게 유일한 방법일 겁니다.”
“그동안 뭘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어수룩하게 당한 것일까요?”
“박경진 재무팀장이 설마 자백할지는 몰랐을 겁니다. 지금도 혼이 나가서 박경진 재무팀장 찾다가 그냥 안산 공장으로 내려갔을 정도입니다.”
그랬다.
특히 KM 전자 본사 분위기가 너무 냉랭해서 최훈열 전무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니 법무팀장을 부르든지 해서 차근차근 대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뒤늦게 회사 법무팀에 연락을 청했지만, 그들도 아는 정보가 제한이 있어서 당황하기는 매 한 가지였다.
일단 안산 공장 협력업체에 먼저 손을 쓰려고 한 것인데, 전화조차 되지 않은 것 때문에 패닉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모르니, 최문경 부회장이나 기조실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이 일이 그쪽으로 새어나갈까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 내고 있었다.
최민혁은 허탈하게 웃었다.
“너무 쉽게 무너지니, 오히려 지금까지 제가 한 노력이 허무합니다.”
“하지만 그건 실장님의 움직임을 몰랐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어수룩하게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최 전무가 구속되면 기조실에서도 간섭할 겁니다.”
“그런가요?”
그는 최훈열 전무를 잡는 일에 집중해서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지만, KM 전자 공장 상황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에 조성돈 팀장을 불러서 은근슬쩍 한 번 떠보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안산 공장에 내려가서 직접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직접 말입니까?”
“원래는 실장님 취임 이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기획실장이 공장을 비롯한 KM 전자 내부를 살피는 것은 필수적임에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대다수가 이미 최민혁을 실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이 실장으로 자리 잡으면서 상황이 바뀐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실장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지적했다.
“이번은 저나 다른 기획팀 직원보다는 차라리 정성근 대리나 박광민 사원을 데리고 내려가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두 사람은 대리 직급 이하라서 공장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특히 정 대리는 이미 안면을 익힌 상황이고, 이미 문제가 될만한 상황까지 파악했습니다. 안산 공장 분위기를 봐서는 정 대리 때문에 실장님이 내려왔다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적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획실장 취임이후에 외부 활동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조성돈 팀장이 직접 안산 공장을 살펴봐야 한다는 제안을 뒤늦게 이해했다.
‘박두영 부장검사가 대규모 수사팀까지 동원했다고 하니, 괜찮은 인재를 파악할 겸 해서 이번 기회에 직접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없는 동안에 본사를 잘 부탁합니다.”
“네.”
***
[최 전무가 설사 안산 공장에 내려와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김대영 수사관님이 최해진 검사가 사고 치지 않도록 신경 좀 써 주세요. 다만 그렇다고 너무 막지만 마세요.]
KM 전자를 압수 수색을 하던 김대영 수사관에서 받은 전화를 끊은 박두영 부장검사는 묘한 눈으로 안산 공장 전경과 사무실을 살폈다.
주거, 교육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도시라고는 하지만 다른 곳에 비해서는 열악해 보였다.
압수수색 나오면서도 거친 공장 노동자의 반발을 좀 걱정했다.
‘하지만 증거 자료에는 안산 연구소 쪽하고도 관련이 있으니까.’
원래는 연구소 쪽만을 집중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좀 달라졌다.
안산 공장 TV 사업부 쪽의 담당자가 뜻밖에 묻지도 않는 서류까지 다 보여주었다.
그는 이미 자수를 작정한 이들을 많이 상대해봤기에 그들의 향기를 맡자 굳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연구소 내에 필요한 자료를 챙긴 후에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심지어 다른 팀에서 나온 검사나 수사관에게 오히려 부드럽게 압수수색을 진행하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굳이 서두를 이유는 없지. 어차피 최 실장이 원한 것은 다 이루어진 셈이니, 결과가 나쁘다고 해도 나쁘지 않아.’
생뚱맞은 압수수색 분위기에 검사나 수사관도 당황했지만, 차장검사의 지시라는 것을 알기에 순순히 다 따랐다.
화기애애한 압수수색 현장은 KM 그룹 본사 수사팀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회사의 감사팀처럼.
아니 고객에 대응하는 백화점 직원처럼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반응을 보인 사람이 나왔다.
심적인 고민을 하던 안선종 팀장이 대규모 수사팀을 살피면서 슬그머니 자신에게 말했다.
“이번 압수수색 목적은 무엇입니까?”
원칙적으로 수사와 관련된 내용이라서 말할 수가 없지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다른 검사와는 달리 융통성을 쉽게 발휘했다.
“불법 대출, 자금 횡령, 배임에 대한 수사입니다.”
구체적인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하는 겁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안산지검에서도 몇 번이나 댁 같은 분들이 나왔고, 혐의없음으로 끝났습니다. 황당한 것은 중간에 내부 고발한 직원만 다쳤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는 단순히 말만 하지 않은 채 옆에서 눈치만 보던 한 부부장검사를 불렀다.
“안산지검에 대해서 한 번 알아봐 주세요. 특히 안산 공장과 관련해서 수사한 내용을 따로 취합해서 정리하세요.”
“네? 안산지검은 저희 관할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가 문제가 복잡해질 겁니다.”
그는 김종도 차장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산지검 상황에 대해서 말했다.
평소와는 달리 김종도 차장검사는 망설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은근히 갈등하는 김종도 차장검사 자존심을 툭 건드렸다.
[법과 원칙에 따라서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하신 분이 김종도 차장검사님입니다. 설마 고작 여기까지였습니까?]
[......기다려 봐.]
안산지검장은 김종도 차장검사하고는 연수원 선후배지간이었다. 둘 다 서로 마음이 맞아서 자주 연락하는 편이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김종도 차장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요청하면 그쪽에서 도와줄 거야.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야. 안산지검 내부도 마냥 좋은 상황은 아니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눈만 동그랗게 뜬 부부장검사에게 입을 열었다.
“들었습니까?”
“후유,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윗선에서 합의를 봤다고 해도 실무진에서 말들이 많을 겁니다.”
“압니다. 그래서 유도리가 좀 필요한 법입니다. 요령껏 자료를 확인해서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만 파악하세요. 필요한 자료는 꼭 모아두세요.”
“네.”
박두영 부장검사는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있는 안선종 팀장을 쳐다보았다.
심한 스트레스 탈모로 이미 앞머리가 다 벗겨진 안선종 팀장은 한동안 박두영 부장검사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도 기획실 정성근 대리라고 밝힌 꼴통(?)이 내려온 후에 뭔가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다.
‘내가 살면서 그렇게 앞뒤 꽉 막힌 벽창호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은근히 기대했어. 그놈이라면 대형 사고를 칠 거라고.’
처음에는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일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최민혁 실장 지시라는 말을 듣자 생각을 좀 바꾸어서 도와주었다.
그 역시 본사 내에 아는 인맥이 있어서 최민혁 실장 악명이 어떤지는 잘 알았다. 특히 최훈열 전무와 붙어서 밀어붙이는 소식을 확인할 때면 통쾌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의 움직임은 이제까지 KM 전자에서는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중앙지검에서 무려 현직 부장검사가 검사 4명, 수사관 8명을 데리고 이곳에 나타났다. 이곳이 무슨 10대 그룹 본사도 아니고, 대형 조직 폭력배 집단도 아닌 것을 고려하면 황당한 일이었다.
‘아주 작정했어. 그런데 그게 가능하나. 회장님이 이런 일을 용납할 분이 아닌데, 내가 모르는 다른 상황이 있는 건가?’
하지만 조상도 연구소장 때문에 고민했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결정에 확신을 준 것은 역시 돈키호테도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렇지. 최 실장이 있었어. 그 양반이 실장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본사 분위기가 초토화되었으니까. 어쩌면 이 일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쉽게 결정 내릴 수는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오욕을 참은 채 묵묵히 기다렸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한 노력을 수포로 만들 수는 없었다.
‘최병연 팀장같은 피해자를 또 만들 수는 없잖아. 하지만 이제는 한계야. 최 전무가 만약 사장으로 승진한다면 더 버틸 수도 없어.’
번민은 번민을 낳았다.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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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영 부장검사는 다른 팀에서 차출된 검사와 수사관이 번민에 빠진 안선종 팀장을 막아서는 것을 손짓으로 물러나게 한 채 묵묵히 기다렸다.
결국 결정을 내린 안선종 팀장이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허겁지겁 달려온 중형TV 개발 1팀 신연식 과장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안 팀장님, 검사랑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시면 안 됩니다. 곧 본사에서 법무팀 변호사가 내려올 테니, 기다리셔야 합니다. 최 전무님이 직접 전화해서 지시를 내린 겁니다!”
하지만 안선종 팀장은 목이 찢어지라 외치는 그를 무시한 채 불쑥 서류를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단호하게 내밀었다.
“그, 그게 뭡니까?!”
당황한 신연식 과장이 숨을 헐떡이면서 서류를 가로채려고 했다.
박두영 부장검사 신호를 받은 수사관이 끼어든 덕분에 무사히 서류를 받은 박두영 부장검사는 서류를 확인하고서야 안산 공장과 협력 업체 사이에 오간 특이한 거래 흔적을 발견했다.
지난 몇 해에 걸쳐서 분석된 부품 자료만 봐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의사 결정이었다. 경쟁 업체와 비교된 내용도 명확했다.
심지어 대량의 부품 거래 계약에 따른 손실 역시 구체적인 수치로 잘 나와 있었다.
분식 회계는 덤이고, 그중에 사라진 돈의 행방도 문제였다.
‘이건 아무래도 전문가가 살펴봐야겠는걸?’
똑똑한 박두영 부장검사조차 당황해서 안선종 부장을 쳐다보았다.
신연식 과장이 어깨너머로 확인한 서류 내용에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쳤다.
“안 팀장님,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회사 내부 기밀 서류를 멋대로 검찰에 넘기다니. 조 소장님과 최 전무님이 절대로 그냥 안 둘 겁니다. 도대체 이제까지 잘해오던 분이 왜 이러는 겁니까?!”
“이제 이 짓 그만하련다.”
“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미 조 소장님과 다 이야기를 하신 것 아닙니까. 최 전무님이 알면 그냥 있을 거로 생각합니까?”
“어,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내가 어쩔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제는 못 참겠다. 최 전무가 사장되고 나면, 더 대책도 없어. 너 같은 최훈열 전무의 개랑 말하는 것도 구역질 난다.”
“거, 아, 도, 그게 무슨......”
당황한 신연식 과장은 패닉에 빠졌고, 뒤늦게 소식 듣고 나타난 다른 임직원 역시 큰 충격에 빠진 채 멍하니 안선종 팀장을 보다가 싸우기 시작했다.
[안 팀장님, 이게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너희가 자재를 빼돌려 착복한 돈 때문에 그러는 거다.]
[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우리가 무슨 돈을 빼돌렸다고 근거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안 팀장님, 미친 것 아닙니까?]
[저기 검사님에게 넘긴 서류가 그 증거다. 협력업체도 압수 수색을 하면, 완벽한 증거가 나오지. 너희 개새끼들이 회사 공금으로 단란 가서 질퍽하고 놀고 있을 때, 우리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불량을 처리한다고 뺑이 쳤다. 그런데 정작 생고생한 최병연 팀장을 잘라버려서 자기 실적으로 훔치기까지 했지? 너희와 이 일을 부추긴 최 전무는 반드시 감방에 가야 해!]
몇 년간 마음에 묵혀둔 말을 하고서야 안선종 팀장은 통쾌하다 못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이 기회를 준 최민혁 실장에게 깊이 감사했다.
‘최 실장, 고맙수다.’
[으악!]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들은 안선종 팀장에게 달려들었다. 안선종 팀장 파벌이 끼어들면서 싸움은 격화되었다.
“......”
박두영 부장검사도 상상을 초월한 전개에 머리가 지끈했다. 그도 그렇지만 최민혁이 의도적으로 최훈열 전무 검찰 소환 일정을 내버려둔 것도 최훈열 전무의 불안을 더 키우기 위함이었다.
최훈열 전무의 불안이 커질수록 사고를 칠 확률이 높았다.
내사 중이 검찰은 그 점을 최대한 노렸다.
그런데 정작 최훈열 전무 쪽이 아니라 불만을 품은 다른 이들이 먼저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이건 예상에 없는 건데......’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황이다.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마음먹은 이상 이번 수사에 합류한 다른 검사에게 서류를 넘기면서 신호를 보낸 채 김종도 차장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서류를 팩스로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인력이 더 필요합니다.]
[거기서 더? 설마 KM 전자를 뒤집어엎을 생각이야? 잠깐 기다려 봐.]
< #02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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