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5 >
***
최민혁이 목표로 한 이들은 최훈열 전무만이 아니라 첫째 큰아버지 최문경 부회장과 셋째 큰아버지 최동영 상무를 염두에 뒀다.
사실 가장 만만한 최훈열 전무는 아직 지분도 받지 못해서 세 사람 중에 가장 힘이 없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두 사람은 경우가 달랐다.
그로서는 꿈에서 한 번 크게 당한 터라 그들의 움직임을 늘 경계했고, 자칫 일을 서두르다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가 있어서 조심했다.
그런데 조성돈 부장이 갑자기 가져온 간이 보고서 내용을 확인한 후에 고민에 빠졌다.
‘이런 일이 있었나?’
미래 꿈에서 마약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결국 구속되어 갇히는 바람에 기획팀 인원 중에 그나마 얼굴을 아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정 대리는 어떤 직원입니까?”
요즘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진 덕분에 유독 이마가 반짝이는 조성돈 팀장은 곤혹스럽게 말했다.
“으음, 의사소통이나 팀 협업 능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업무 처리 하나만큼은 탁월합니다. 그래서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배종대 과장조차 정성근 대리라면 한 수 접어둘 정도입니다. 박상기 차장은 아예 상급자 취급합니다. 팀 내에서는 대리부장이라고 부릅니다.”
“......능력이 그만큼 출중한 겁니까?”
“네. 지금 일도 작년 기획안을 확인하기 위해서 안산 공장에 직접 내려보내서 TV 사업부 분위기를 확인시켰습니다. 공장 사람 특징이 잘 아시겠지만, 조직(?)적인 성향이 강해서 외부인 참견을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까지 다 파헤쳤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대안이 없었던 겁니다.”
“뭐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겠군요.”
“만약 제대로 공장을 내사할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더 좋습니다. 그래서 그쪽에서도 아예 항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정 대리님 대단하네요.”
“네.”
잠깐 최민혁은 정성근 대리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멋쩍은 표정을 한 채 마주하고 있는 조성돈 팀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첫 만남에서 심하게 구박하고 했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힘이 없는 듯 보이지만 이 보고서가 증명하듯이 그의 능력이 딱히 무능해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성정을 지닌 정성근 대리를 절묘하게 잘 관리한 것이 그 증거이니까.
‘직장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튀지 않으려고 한 것일까?’
문득 그의 기억 속에 KM 그룹과 관련된 인재풀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회사가 공중 분해되는 와중에도 끝까지 한 이도 있었고, 후일 독립해서 명성을 떨친 이도 있었다.
‘이 회사에......인재가 많았구나. 생각을 좀 달리 해봐야겠어. 최소한 회사를 포기하더라도 인재만큼은 끌어온다면 나쁘지 않아. 하지만 그게 쉬울 것 같지도 않은데, 골치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전.”
기타 부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묻지도 않고 떠나는 조성돈 팀장 행동도 간단하지 않았다.
기묘한 표정을 한 최민혁 실장 모습을 본 김명준 과장이 넌지시 말했다.
“조성돈 팀장도 가볍게 볼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저도 공감입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사람 정말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TV 사업부 내부의 일을 안 최민혁은 생각을 좀 바꾸었다.
“이번에는 제가 답답해서 못 넘기겠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를 압박하죠. 박경진 재무팀장이 마음을 바꾸지 않았겠죠?”
“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마음을 비운 것 같습니다. 본인 자신도 초범이고, 검찰 수사에 도움을 준다면 최소한 실형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 물론 실장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신뢰를 준 행동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임직원의 평가는 다릅니다. 본사만 해도 요즘 최 실장님 인기가 제법 괜찮습니다.”
‘특히 비서실의 여직원이 모두 난리입니다.’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좋네요. 은밀하게 박 부장검사에게 증거를 보내도록 하세요. 아마 머리 좋은 박 부장검사라면 딱 그거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지시를 내리고 나서야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훌륭하다고 했던 장승일 실장이 말한 게 이거였구나. 설마 이 사태를 사전에 알고 있었나?’
***
“심부름센터를 통해서 왔다고?”
최해진 검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부름센터 직원까지 가볍게 조사해서 보낸 이를 확인해보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는 못했다.
“검은 모자, 검은 선글라스, 검은 마스크를 쓴 어떤 남자가 십만 원 주고, 이 CD를 보낸 것이 다입니다. 혹시나 싶어서 근처 CCTV를 다 확인해봤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많이 오버스러운 행동에 한마디 할까 하다가 최해진 검사의 유난한 성격을 잘 아는 박두영 부장검사는 그냥 파일철을 다시 확인했다.
CD에서 출력한 KM 전자 내부 문건은 이번 수사의 핵심 증거로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그래서 더 골치가 아팠다.
‘최 실장 솜씨일까? 최 실장이 그냥 있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이네.’
“설마 이 증거를 보고도 이대로 시간을 질질 끌 겁니까?”
목소리가 올라간 최해진 검사도 단단히 흥분한 눈치였다.
그도 한마디 할까 하다가 피식 웃으면서 상의를 주섬주섬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차장검사님을 보고 올 테니, 미리 인원을 준비해 놔.”
괜히 피의자 최훈열에게 의도적으로 시간을 주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최해진 검사는 양손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한 채 쾌재를 불렀다.
“예쓰!”
“예쓰?”
“아, 죄송합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염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수사하자는 건지, 아니면 범인에게 증거 인멸할 시간을 주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
‘둘 다야. 거기에 플러스알파가 더 있고.’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
“이상하군.”
“네?”
김종도 차장검사는 파일철을 책상 위에 그냥 던져 놓은 물끄러미 박두영 부장검사를 쳐다보았다. 원칙대로 수사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유독 느린 수사 때문에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핵심 증거를 가지고 올라온 것 때문이다.
‘능력 하나는 정말 좋다니까. 이런 증거를 어떻게 구했을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전 검사로 법과 원칙에 따라서 수사를 진행할 뿐입니다. 옆에서 보면 좀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국민의 기본권은 지켜져야 합니다.”
“개소리 마!”
“차장검사님이 절 부정적으로 보는 것 압니다만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유, 그래, 뭐 이런 증거까지 챙겨왔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이왕이면 좀 서둘러서 빠르게 움직이면 좀 좋아?”
솔직히 그도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꽤 놀랐다. 설사 KM 전자를 압수 수색을 한다고 해도 이런 핵심 증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증거를 회사 내부에 남겨둘 리가 없지. 어딘가에 숨겨 둘 테니까.’
“지금 인원으로 되겠어?”
“부족합니다.”
“다른 강력부 인원 중에 남는 인원은 모두 데려가서 제대로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소식 들었습니까. 차장님에 대해서 내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놈의 내사라면 지겹게 받아 왔어. 아무리 해봐라. 난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겁니다.”
“이봐, 박 부장, 자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아뇨. 걱정되어서 그런 겁니다.”
“내가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여?”
“김 차장검사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차장검사님의 다른 인척은 이야기가 좀 다르니까요. 특히 특혜 의혹이라면 문제가 될 겁니다. 아니 문제를 만들겠죠.”
“......인척?”
이제까지 당당하던 김종도 차장검사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설마 처남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번 내사는 아예 작정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KM 그룹 수사는 대놓고 그들의 후원자를 공격하는 거라서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정말이야?”
“확실합니다. 지금 대검에 있는 연수원 동기 통해서 들은 겁니다. 혹시라도 절 걱정해서 말한 것인데, 저로서는 차장님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창백한 표정을 한 김종도 차장검사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입술만 달싹였다. 처남 문제에는 자신의 아내 역시 관련되어 있다. 결국, 수사가 진행되면 아내 역시 소환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최악의 상황에 처가로 수사가 확장될 것이다.
그의 내적 갈등은 도저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은 김종도 차장검사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니 상관없다. 더 철저하게 이번 수사를 진행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마. 내가 모든 것을 다 책임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도 내심 비장한 김종도 차장검사 태도에 감탄했지만 차가운 눈빛을 한 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기획한 그림대로 나온 결과에 만족했다.
‘당신은 확실히 존경받을 만 합니다. 하지만 검찰 조직은 그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번 결과에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저는 그 과실만큼은 챙길 거고,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
[중앙지검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압수수색 영장입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 쪽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느닷없는 사태에 재무팀은 패닉에 빠져서 멍하니 있다가 수사관 지시에 따라서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들도 최근 회사 내에서 최민혁 실장과 최훈열 전무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설마 중앙지검에서 압수수색을 하러 나올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최훈열 전무 검찰 소환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실감했지만 이미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과장급 직원은 오히려 속이 편한 얼굴을 한 채 구경했다.
다만 그들도 압수 수색하러 온 인력이 고작 검사 한 명, 수사관 두 명이라는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적은 것은 아니지만, KM 전자 규모를 생각하면 과연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느꼈다.
‘요식 행위인가?’
그런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검사와 수사관은 자료를 살피면서 딱 필요한 것만 챙겼고, 컴퓨터도 달랑 두 대만 압류했다.
물론 실무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덜컥했다.
‘어, 저건 안 되는데......’
뒤늦게 검찰 소환을 대비하던 최훈열 전무가 소식 듣고 나타나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야, 이게 다 뭐야? 너희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함부로 들어온 거야?!”
하지만 최훈열 전무에 대해서 반감을 단단히 가진 최해진 검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채 압수수색 영장을 직접 보여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최해진 검사입니다.”
“평검사야? 하, 세상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너 내가 누구인지 알아. 나 최훈열이야. KM 그룹 후계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감히 평검사 나부랭이가 지금 나에게 들이대는 거야. 너 말고 박 부장검사 불러와!”
“곤란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검사는 헌법에서 보장한 권력 기관입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압수수색 행위를 방해해서 체포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얼굴마저 들이댄 채 따박따박 따지는 최해진 검사 행동에 최훈열 전무는 분노해서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다행히 기겁한 이재상 비서가 최훈열 전무 손을 막았다.
“저, 전무님,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최해진 검사는 오히려 얼굴을 들이민 채 최훈열 전무를 자극했다.
“자, 어디 여기 때려보세요.”
“이 새끼가!”
꼭지가 돌아버린 최훈열 전무는 최해진 검사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재상 비서가 나서고, 다른 재무팀원이 끼어들었다.
자칫하면 압수수색 나온 검사를 폭행하는 초유의 사태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흥분한 최해진 검사는 그냥 있지 않았다.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너는 책임지고 내가 반드시 콩밥 먹여 줄 테니, 각오해라!”
“와아, 뭐 이런 꼴통 새끼가 다 있냐. 이 비서 당장 박 검사에게 전화해. 절대로 이번 일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해!”
어벙한 김대영 수사관도 당황해서 다급하게 최해진 검사를 떼놓았다.
하지만 뒤로 질질 끌러가면서도 최해진 검사는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소리쳤다.
“최훈열씨, 아직도 분위기 파악 못했냐. 박 부장검사님이 지금 대규모 수사팀을 이끌고, 안산 공장으로 직접 내려갔다는 것을 알면 그런 소리 못할 거다!”
“뭐야?!”
충격을 받은 최훈열 전무는 심장이 멎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그는 다급하게 전화를 하다가 고개를 내젓는 이재상 비서에 크게 당황한 채 허겁지겁 재무팀을 벗어났다. 그 과정에서 재무팀뿐만 아니라 통로에서 멍하니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임직원의 차가운 시선을 접하자 안색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뒤늦게야 검찰 소환 시간 연기로 회사 평판이 완전히 망가졌고, 자신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죽음의 늪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차라리 검찰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따로 처리를 해야 했어!’
이재상 비서 역시 이곳저곳에 전화를 계속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비릿한 미소를 짓는 최해진 검사는 겨우 막힌 가슴이 풀리는 것 같았다.
‘너는 감방 확정이야!’
< #02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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