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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으로
“모두 잡아들여!”
그레칸을 향해서도 조인족 전사가 날아왔다.
기술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팔을 움켜쥐려던 전사는 기술자들과 다르게 여유로운 그레칸의 태도에 당황했다.
“너는 뭐…….”
분노하며 그레칸을 들여다본 전사는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구멍을 마주했다.
전사의 초점이 흐려졌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날개를 퍼덕거렸다.
결코 닿고 싶지 않다는 듯 필사적으로.
먹이 사슬에 속한 존재로서 최상단에 위치한 포식자를 만난 데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이 전사를 집어삼켰다.
“으, 으으으으.”
정신없는 날갯짓을 반복하던 전사는 결국 비행을 지속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엉금엉금 무릎으로 기며 그레칸에게서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썼다.
“켄타! 너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전사들의 책임자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레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를 찬찬히 살폈다.
처음에는 약간의 경계심과 의문만 떠올렸을 뿐이었다.
그레칸은 그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별다른 무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발짝, 한 발짝.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커질수록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짜부라지는 것 같았고,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드러난 무기는 없었다. 그러나 공격받는 것 같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기운만으로도.
‘이, 이 기운은…….’
책임자는 홀린 듯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레칸은 스무 발자국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무릎걸음으로 몇 걸음 기어간 책임자가 부복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머뭇거리던 전사들은 때를 틈탄 기술자들이 도망가자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책임자가 저러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쿵!
책임자가 땅에다 이마를 박았다.
“모든 수인의 주인이시여. 조인족의 루이타, 하이로드를 뵙습니다.”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책임자는 뻣뻣하게 굳은 수하들을 향해 일갈했다.
“너희들은 뭐 하는 거냐? 감히 하이로드의 머리 위에 있을 참이야!”
미처 그레칸을 인지하지 못했던 전사들의 귀가 탁 트였다.
‘하이로드’란 단어가 나오는 순간 모든 이들이 책임자의 뒤를 이어 땅에 내려와 몸을 낮추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
“하칸 님의 명령을 받잡고 있습니다. 이곳에 인간의 잔당이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하여.”
“…….”
황궁의 수인들 중 그레칸의 인간 증오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씩씩하게 고개를 든 그에게 그레칸은 턱을 살짝 저었다.
“예?”
그레칸이 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를 두 번 말하게 했다는 생각에 책임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알겠습니다.”
도망가던 인간들은 의외의 사태에 주춤했다. 하이로드가 여기 있다는 데 경악하여 발을 멈춘 사람들이었다.
“초, 총통이 여기에!”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 멈추지 마!”
스미스가 억지로 어깨를 밀치고 앞서자 남은 이들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책임자는 신경이 쓰이는 듯 그쪽에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그레칸이 반대편으로 걸어가자 곧 그의 뒤를 쫓아 움직였다.
닭 쫓던 개가 된 켄치만이 황망한 표정으로 휙휙 고개를 돌려 양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갈까?”
“어디로 말이냐.”
그레칸은 조금 느리게 대꾸했다.
“황궁.”
“…….”
“답답해하는 건 알지만, 한 번은 해결해야 하는 문제잖아. 스미스란 인간이 했던 말처럼.”
인간을 싫어하여 그들과 화해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게 분명한 황궁의 수인들.
“싫다면…….”
눈치를 보는 그레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돌아가 보자꾸나.”
그의 손을 잡았다.
안색이 밝아진 그레칸이 그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 * *
황궁으로 돌아오자 미리 소식을 전해 들었던 하칸이 황금색 대문보다 훨씬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만의 귀환이십니까. 이 하칸,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
자칫하다간 눈물이라도 흩뿌릴 기세인 하칸과 다르게 그레칸은 무뚝뚝했다.
하칸은 그레칸의 옆에 있는 밀라니아를 흘끗했다. 기이한 빛이 일렁였지만, 곧 사라진다.
“밀라니아 님도 오셨군요. 못 뵌 동안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안고 하칸을 지나쳐 황궁으로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혼자가 된 하칸은 황궁으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마도구를 이용해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으므로, 보고자에게 직접 보고를 들을 생각이었다.
그레칸이 도착하고도 한 시간이 흘렀다. 하칸의 얼굴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이것들이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멀리서부터 조인족 전사 몇이 기진맥진한 상태로 날아왔다. 그나마도 몇 명은 한참 뒤에 뒤처진 상태였다.
하칸의 성질을 알고 있는 책임자는 수하 둘을 끌고 죽기 살기로 그의 앞에 당도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하이로드께서 너무 빠르셔서, 헉, 따르기가 힘들었습니다. 헉, 죄송합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선 책임자를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본 하칸이 턱짓을 했다.
“그래. 다시 한번 말해 봐. 하이로드께서 어떤 상황에서 나타나셨다고?”
“그것이…….”
주변을 둘러본 책임자가 하칸의 귀에 바싹 다가와 속삭였다.
상황을 자세히 듣는 하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래? 인간을 그냥 놓아주셨다는 말이지. 그것도 반란 종자들을?”
* * *
황궁의 푹신한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었던 밀라니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궁은 수인들의 대표와도 같은 집단이 되어 버렸지. 황궁을 믿고 득세하는 자들은 힘없는 이들을 수탈하고 있고…….’
그녀의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은빛 머리칼을 만지작대고 있던 그레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장들을 한번 만나 봐야겠느니라.”
그러고서 밀라니아가 방 밖으로 걸음을 옮기니, 그레칸은 여느 때처럼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수장께서는 지금 욕실에서 휴식 중. 만나 뵙기 어렵습니다.”
동쪽 별궁의 입구. 문지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던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그레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안 들어가?”
“욕실에 있다지 않느냐. 볼일이 있다지만 기다리든가 해야지.”
밀라니아의 난감한 목소리에 그레칸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서는 밀라니아의 손에 깍지를 끼고 쳐들어갔다.
“앗, 이러시면 안 되는데……. 들어가시죠.”
밀라니아 때와 달리 문지기는 만류하는 기색 없이 그레칸의 걸음을 허용했다.
밀라니아는 잠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하?”
쾅!
화려한 욕실의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어지간한 방보다 넓은 대리석 욕탕에 몸을 뉘고 있던 인어족 수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 하이로드?”
곧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무례하시군요! 아무리 하이로드라 해도 아녀자의 내밀한 공간에 무단 침입을……!”
퍽!
대리석 기둥이 부서졌다. 주먹을 쥔 그레칸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고?”
수장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 잘 오셨다고요.”
잠시 후, 욕탕의 대리석 난간에 얌전히 앉은 인어족의 수장이 난감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어, 그러니까 인간이랑요?”
밀라니아를 흘끗하고 다음으로는 그레칸을 흘끗하더니 움찔한다.
“물론 몇몇 일족들이 힘들게 살고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건 전에도 그랬는걸요. 2대륙이 수인의 세상이 되기 전에도 먹고 살기 힘든 일족은 여전히 힘들었어요.”
생각과 다른 안이한 대답에 밀라니아는 기가 막혔다.
“너는 그들을 돌봐야 하는 위치이지 않느냐.”
“그렇지만 요즘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요.”
금발을 쓸어 넘긴 수장이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변화를 원하지 않아요. 예전보다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고. 하칸이 저희에겐 잘 대해 주거든요. 지금이 좋습니다.”
그녀는 이미 안락한 생활에 찌든 얼굴이었다. 밀라니아는 옆을 턱짓했다.
“이쪽은 애인인 게냐? 인간이로구나.”
날씬한 몸매의 인간 남자가 흠칫했다.
“예에……. 하칸이 인간을 싫어하긴 하지만 제 애인은 못 본 척해 주거든요. 저희 인어족은 대대로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지라 아무래도 저도 그렇게 되었네요.”
웅얼거린 수장은 아무래도 민망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변화를 원하신다니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요. 하이로드께서 원하셔서 2대륙이 이렇게 된 게 아닌가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신지?”
은근히 떠보는 말에 그레칸은 무뚝뚝한 표정에 눈만 서슬 퍼렇게 빛냈다.
밀라니아가 있어 한번 안심했던 인어족 수장은 기겁하고 밀라니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수장들도 같은 생각이냐?”
“비슷할 거예요. 몸 움직이기 좋아하는 이들은 지루해하는 것도 같지만…….”
이쯤이면 방문의 소기 목적은 달성했다 싶은 밀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인어족 수장의 거처를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
“나태하구먼.”
물고기를 사냥하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무뎌졌고, 흥청망청하는 삶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밀라니아의 뒤로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저기, 잠깐만요!”
밀라니아가 멈춰 서자 갸름하고 예쁜 이목구비의 사내도 속도를 늦추었다.
하늘하늘한 옷을 여미고 다가오는 남자는 욕실에서 보았던 수장의 애인이다.
한쪽 눈을 치켜올리는 그의 눈동자에서 한기가 새어 나왔다.
우물쭈물하며 남자는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
“저도 수장님 덕분에 편히 살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편하지가 않아요. 제 가족들도 황궁 밖에 있거든요. 농사도 잘 안 되는 그 땅에…….”
한숨을 삼킨 사내는 무심코 속내를 실토했다.
“황궁 사람들의 편안한 생활은 황궁 밖의 인간과 수인을 착취해서 만들어지는 건데…….”
그러고 나서는 사색이 되었다. 그레칸은 황궁의 주인이었다.
그 앞에서 황궁을 욕했으니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실수했다는 표정이 뚜렷했다.
“황궁 수장들이 지금의 생활을 고집한다면 언젠가 무너지고 말 것이야.”
남자는 그레칸의 눈치를 보았지만 전보다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번 설득해 볼게요. 수장님은 그래도 제 말은 잘 들어주시니까. 조금만, 황궁 밖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만 도와 달라고요.”
남자는 밀라니아가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작정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밀라니아는 마음대로 한번 해 보라며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처소로 돌아가려던 밀라니아는 마음을 바꾸어 곰족의 수장이 지낸다는 근처의 별궁으로 들어갔다.
인어족의 수장보다는 만나 보기 쉬웠다.
그는 마당에 펑퍼짐한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있었는데, 주변에는 사람 하나도 들어갈 법한 거대한 바구니가 즐비했다.
어느 바구니에는 반쯤 파먹혀서 살짝 흘러나온 꿀이 담겨 있었고 어느 바구니에는 탐스러운 사과가, 또 어느 바구니에는 말린 훈제 물고기를 꿴 꼬챙이가 먹기 좋게 담겨 있었다.
뒤룩뒤룩 찐 살을 본 밀라니아는 ‘내가 곰족이 아니라 돼지족의 수장을 찾아왔나?’ 하고 별궁의 위치를 확인했다.
곰족 수장이 맞았다. 뭣보다 뒷덜미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억센 털은 돼지의 것이라기엔 너무 거칠다.
불행히도 곰족 수장 역시 인어족의 수장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무엇보다 귀찮단 말이오. 움직이는 것도 귀찮고 뭘 하기 위해 나서는 것도 귀찮아요. 다른 걸 할 필요가 있나 싶고.”
밀라니아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나태와 탐욕이 부패한 냄새가 질척하게 풍겨 오는 듯했다.
수인의 본능을 잃은 그들은 과거 욕심이 지나쳐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여 노예와 평민을 착취하던 귀족 관리와 엇비슷한 모습이었다.
“만족하느냐?”
습관적으로 먹을 걸 입에 가져다 댄 곰족의 수장은 물고기 대가리를 입에 문 채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입 밖에 튀어나온 물고기 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진 게 어쩐지 희극적이었다.
“뭐, 나쁘진 않지만…….”
“…….”
“그렇다고 만족하냐고 한다면 또 그렇지는 않지. 볼일을 볼 때마다 뱃살이 접혀서 이제는 예전만큼 나무도 잘 못 타고 빠르게 달리지도 못하니까. 그럴 땐 가끔 짜증이 나지. 예전에, 30년 전만 해도 이 덩치로도 늑대족의 전사를 따돌렸으니까.”
혼잣말로 중얼거린 곰족 수장이 얼굴을 구겼다. 살에 파묻힌 이목구비가 찌그러졌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그게 왜 궁금하시오. 어차피 달라질 건 없는데. 인간들이 설치는 예전보다야 지금이 낫지. 아무렴. 정력에 좋다고 일족의 쓸개를 싹쓸이하는 놈들이 지배하던 때보단 지금이 나아.”
“굳이 여기 이런 모습으로 있을 필요는 없지 않으냐.”
“무슨 말이오?”
“일족의 수장으로서 버려져 쓰레기를 파먹는 동족을 챙겨 산으로 들어가 살 곳을 일구면 되지 않겠어.”
멍해졌던 얼굴이 곧 일그러졌다.
“산은 대부분이 타 버려서 먹을 게 없다고, 하칸이 그랬는데. 이곳에 있으면 그가 모든 걸 챙겨 주니까, 모든 일족을 챙길 순 없지만 그건 예전에도 그랬으니…….”
인어족의 수장과 비슷한 말을 한다. 그들의 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건 ‘하칸’의 이름.
“…….”
“인간은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고 있느니. 그들이 과거에 수인을 억압하고 박해하고 착취했지만 인간이 몰락했다고 세상이 과거보다 나아진 것 같지는 않구먼.”
곰족 수장이 물고기의 꼬리까지 우적우적 씹으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그들의 모임엔 곰족 수인들도 포함되어 있느니라. 방법을 알려 주지. 뭔가 변화를 원한다면 네게 버림받은 일족을 찾아 그들의 삶을 살펴라.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뭘 원하는지 알아봐. 그게 네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습관적인 탐욕에 지배되어 음식에 먹힐 때까지 그냥 살아. 건강상의 문제든 외부의 변화이든, 그 삶은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터.”
황당한 것인지 당황한 것인지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는 곰족 수장을 뒤로하고 밀라니아는 걸음을 옮겼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칸은 어떤 자냐.”
거처로 돌아와 물으니 그녀를 침대에 눕힌 그레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처세술이 꽤 좋은 조인족의 수장. 인간을 싫어해. 황궁의 귀찮은 일은 모두 도맡아 했고. 방금 만나고 온 수장들의 불만이나 바라는 것도 들어주는 걸로 알고 있어. 덕분에 덜 귀찮았거든, 내가.”
“…….”
생각에 빠진 그녀를 바라보며 그레칸은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데 없이 매끈한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육체적 능력은 미약하니 머리가 발전한 타입이라고 할 수 있지. 보기보다 나이가 꽤 많고. 어릴 때는 인간들의 노예로 살아왔으니까. 날갯죽지도 찢어져 있었어. 지금은 인어족에게서 치료약을 얻어 어떻게 치료한 모양이지만.”
“……그래?”
“응. 혓바닥이 길어서 주변 이들을 이용하는 걸 좋아해. 수인 수장들도 마찬가지야. 원하는 걸 주고 그들의 협조를 얻고 있지. 별거 아닌 놈이야.”
밀라니아의 눈빛이 깊어지자 그레칸은 그녀의 눈매를 슬금슬금 진득하게 쓸었다.
“신경 쓰이면 내가 한번 만나 볼까?”
“네가?”
“머리가 뛰어나도 말이지. 강력한 힘을 이길 순 없어. 내 말 한마디면 모두 실토할 거야. 꿍꿍이가 있다면.”
밀라니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자를 너무 무시하는구나.”
“무시한다기보다는, 하칸이 뭘 할 수 있겠어.”
“네 방심도 그가 이끌어 낸 것일 수도 있다. 수장들도 밖에서 만난 인간들도 하칸을 언급하는 걸 들어보면, 쉬이 무시할 자는 아닌 것 같으니라.”
“…….”
“당분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굴거라. 황궁의 담장을 허물고 인간과 수인 사이 상생의 다리가 이어지려면 하칸이란 자의 협조가 중요할 것 같으니, 섣불리 행동하여 경계심을 심어 줄 필요는 없다.”
다소 불가해한 표정을 짓던 그레칸은 온순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니아는 그가 그녀의 손으로 그의 뺨을 만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슬쩍 손가락을 까딱했다.
탄탄하고 강인한 피부와 손끝이 마찰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레칸의 시선을 슥 피했다. 조금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그의 따뜻한 뺨을 찌른 손끝이 쫙 펴졌다.
맥박이 뛰었다.
* * *
특정한 입구를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는 모든 차원의 지하, 흑계.
말란도르는 탑에서의 오랜 은거를 깨고 검붉은 대지 위로 내려와 있었다.
밀라니아가 떠난 뒤 대부분의 시간을 맨발로 땅을 밟는 데 쓰는 말란도르의 이마에 붉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루에 디딜 수 있는 걸음 수는 백 걸음 남짓. 그리하여 밀라니아를 보낸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움직였음에도 목표한 바의 반도 이루지 못했다.
발을 내디뎠다. 발바닥에 밟힌 새카만 기운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난동을 부렸다.
말란도르는 무서운 눈으로 발에 힘을 주었다.
검붉은 흙이 움푹 들어갔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도망가려는 것처럼 이리저리 휘어지던 검은 기운이 마침내 말란도르의 두 눈으로 파고들었다.
말란도르의 빨간 눈이 순간적으로 새카맣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갔다.
그런 작업이 반복될수록 땅을 굴러다니며 애통한 비명을 질러 대던 흑계인과 마물들이 차분해지고 있었다.
“애초에 내게서 비롯된 것을 다시 회수하는 것뿐인데 빌어먹게도 힘드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친 말란도르는 습관적으로 그레칸을 욕했다.
그는 지금 그레칸이 흑계의 입구를 봉인하고자 찢어 낸 왕의 몸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찢겨질 때의 고통과 분노에 감화되고, 왕의 죽음에 슬퍼하던 흑계의 권속은 한층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말란도르가 지나갈 때마다 머리를 조아렸다.
“군주, 큰일 났습니다!”
머리가 뿔처럼 생긴 혹이 난 흑계인이 바람처럼 날아왔다.
말란도르를 닮아 구릿빛 피부에 붉은 눈을 한 그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무슨 일이야?”
“렛시 3대가 사라졌어요. 아무래도 흑계의 밖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입구의 봉인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잘못 알았겠지.”
말란도르의 대수롭잖은 반응에도 흑계인은 찝찝한 표정이었다.
“봉인된 입구가 아닙니다.”
“……그러면?”
막 검은 기운을 밟은 말란도르의 시선이 옮겨졌다. 흑계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군주의 비밀 문을 통한 것 같습니다.”
군주의 비밀 문이란 말란도르가 개구멍으로 부르는 그곳.
“렛시 3대는 200년 전 군주께 비밀 문을 허락받았습니다.”
그제야 말란도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갑자기 왜 나간 건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렛시 3대는 왕의 죽음을 가장 비통해한 권속 중의 하나입니다. 렛시 3대가 좋은 의도를 가졌다기에는…….”
굴복시킨 기운을 눈으로 빨아들인 말란도르가 억센 손길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이런 젠장! 밖으로 나가야겠다.”
“예?”
“그놈은 그레칸을 만나러 갔을 거야. 렛시 3대는 상대방의 약점이 무엇인지 기가 막히게 파악할 줄 알지.”
“예?”
“모르겠냐? 그레칸을 망가뜨리러 간 거라고.”
“그자를요? 그에게 약점이 있을 리 없을 테니 헛수고입니다. 렛시 3대를 구해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깜짝 놀란 수하에게 말란도르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까지는 헛수고였지. 근 백 년간의 그레칸에게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예?”
“그놈 곁엔 밀라니아가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말란도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칸은 그가 가장 아끼는 컬렉션 방에 있었다.
인간을 위해 노래하던 노예를 부모로 두고 태어난 그는 성년이 될 때까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뒤바뀌었고, 그는 악마 같다 경외받는 그레칸을 악착같이 따랐으며, 결국 조인족의 수장이 되어 황궁의 2인자가 되었다.
컬렉션 방은 그의 노력과 위치를 증명하는 공간이었다.
온갖 귀한 물건, 신비한 물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물건이 모여 있는 곳.
그의 컬렉션은 말을 듣지 않는 수장을 설득하고 회유하는 용도로 쓰였다.
짜증 나는 존재를 은밀히 제거하는 데에도 쓰였으며,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비열한 일을 도모할 때도 쓰였다.
‘인간은 교활하고 방심할 수 없는 족속들이니 상대하려면 나 또한 그렇게 되는 수밖에.’
요즘 하칸은 인간 황제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허수아비로 세운 황제는 안타깝게도 적의 수괴를 붙잡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는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요즘 무리 지어 다니는 인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지. 끈질긴 벌레 같은 놈들.’
그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써 보면 어떨까.
인간의 황제를 공개 처형 한다고 공표하면 기가 꺾일 것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화형을 시키는 것도 좋겠다.
비명이 멀리멀리 퍼질수록 두려움에 떠는 인간들은 감히 양지로 기어 나올 생각을 못 할 테니.
‘처형의 이유는 아무거나 붙이면 되지, 뭐. 가령 하이로드인 그레칸의 앞에서 넘어졌다든가?’
낄낄거린 하칸의 웃음이 뚝 멈추었다.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그중 대표로 보이는 인간과는 아는 사이신 듯싶었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거든.’
하칸은 반짝거리는 컬렉션에서 눈을 돌렸다. 생각에 잠길 때 예의 버릇하던 대로 뾰족한 입술을 매만졌다.
그는 이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인간은 물론이고 수인들의 수장까지 보잘것없었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거역하지 못하는 지금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 위험 요소가 있다면 그건 하이로드 그레칸이었다.
절대자에 가깝게 강력한 힘은 그의 머리로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니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한 가지였다.
‘하이로드께서, 인간에 긍정적인 감정을 품는 것이야말로 위험신호지. 친근감이든 동정이든, 마음 약해지는 어떤 감정이라도 품어선 안 돼.’
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조치를 취해야겠어.’
* * *
미리 명을 내려 둔 시종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은 하칸은 지체 않고 몸을 일으켰다.
“하이로드. 여기까지 나오셨네요?”
하칸은 좀 떨어진 곳에 서서 그의 동태를 살폈다.
‘뭘 하는 거지?’
정원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의아하긴 했지만 직접 보는데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꽃밭을 거닐던 그레칸이 불쑥 말했다.
“화분이 없군.”
“예?”
“찾고 있는데.”
“원예사에게 물어보면 있을 거예요. 제 컬렉션 방에도…… 괜찮은 게 있고요. 그건 왜 찾으시는 거예요?”
그레칸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하칸의 위치에서는 그의 측면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느슨하게 풀어진 입가의 미소에 심장이 쿵 했다.
그 정도의 충격이었다.
하칸은 눈을 의심했다. 이런 얼굴을 하는 그레칸은 처음 보았다.
“화, 분 말이죠. 갖다드릴까요?”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목소리에서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면 어쩌지 낭패스러웠다.
심장은 계속해서 쿵쿵 뛰고 있었다. 불안함이 날뛰고 있다.
그레칸. 하이로드이자 늑대족의 수장인 그레칸. 그에게 부드러움이라니.
통제가 힘들어서 가끔 곤혹스럽긴 했지만 그럼에도, 증오와 미움, 분노밖에 없는 그레칸이 아니라면 안 되었다.
‘위험해.’
그레칸은 손가락으로 뺨을 툭툭 치며 길쭉하게 자란 보라색 꽃잎을 매만졌다.
“꽃을 꺾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하지만 크리스털 방은 높아서 꽃을 보기 힘드니까. 화분에 심어서 주면 좋아하겠지?”
아이처럼 설레하며,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전전긍긍하는 저런 모습.
사랑에 빠진 청년 같은 모습 따위…….
‘볼품없고 나약해.’
‘아직은 아니야. 그 마녀를 좋아하는 건 원래 알고 있었잖아. 100년 전의 그 여자라면, 이런 반응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아. 섣불리 판단하면 일을 그르친다, 하칸.’
속내를 숨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살랑거렸다.
“그러세요. 그러면 시종을 시켜 질 좋은 화분을 방으로 올려 보내도록 할게요.”
“그걸 어떻게 직접 하시려고요. 솜씨가 괜찮은 원예사를 시킬게요.”
“아니. 내가 할 거야. 밀라니아가 보고 만질 건데 다른 사람 손을 타게 할 수는 없지.”
하칸은 입을 다물었다. 못마땅했다. 너무 못마땅해서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분기가 치밀었다.
“근데 하칸.”
“예, 하이로드.”
“심장이 왜 이렇게 뛰지?”
그레칸이 스윽, 고개를 돌려 하칸을 바라보았다. 하칸은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 이런 하이로드의 모습은 처음이라 놀랐나 봐요.”
“그래?”
심드렁한 눈빛을 보며 하칸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그나저나 하이로드, 요즘 인간들 상황이 이상해요. 열 명 이상 모여 다니는 걸 금지했는데 대여섯 명이 몰려다니는 게 자주 보이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놈들의 기어오르려는 성질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는 것 같은데…….”
흐지부지 말을 끌며 그레칸의 눈치를 살핀 하칸은 그레칸이 ‘이 꽃이 더 좋을까, 저 꽃이 더 좋을까’ 가늠하는 걸 보고 떠보기를 포기했다.
“군대를 보내서 한바탕 쓸어 보려고요. 물고기도 한 마리, 한 마리 감질나게 잡는 것보다 그물을 쳐서 한꺼번에 잡아 올리는 게 재밌기도 하고 더 맛있기도 하잖아요?”
“…….”
“밖에 계시는 동안 이상한 건 보지 않으셨어요?”
은근한 말투. 그레칸이 그를 힐끗했다.
하칸은 과장되게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별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물론 하이로드께서 하찮은 인간을 그냥 두고 보셨을 리 없겠지만! 이놈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요. 아시잖아요?”
“모르겠는데.”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하칸이 실실 웃었다.
“저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들이니 이번에는 실수 않고 확실히 하고 싶거든요. 혹시 하이로드께서 아는 게 있으시나 하고.”
“없어.”
그레칸이 짤막하게 대꾸하자 하칸은 ‘저 말이 정말일까’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려 댔다.
“그럼 준비하고 출정하시겠어요?”
“…….”
“레지스탕스 놈들이에요! 기분 전환 삼아 움직이곤 하셨잖아요? 이번에도요.”
그레칸이 고개를 젓자 의외라는 얼굴로 눈을 번뜩인다.
하칸의 관찰하는 시선에 그레칸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네가 알아서 해. 난 이제 관심 없으니.”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칸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이 마뜩잖았다.
“네가, 알아서, 하라고.”
“아, 예에. 알, 겠습니다.”
“화분은 내게로 보내라.”
몸을 돌려 궁으로 돌아가는 그의 뒤에서 하칸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목소리를 높였다.
“하이로드! 듣기로는 황도의 골목에서 반란 종자들의 수괴가 출몰했다고 하는데요! 그자는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 저울질.
“알아서 해.”
‘이런 빌어먹을!’
돌연 그레칸이 걸음을 멈추었다. 하칸이 얼굴을 활짝 폈다.
‘그래. 역시 반란 종자의 수괴 놈은 직접 처리를 해야지 성에 차시겠죠!’
“하이로드?”
“예?”
“그냥 내버려 두라고.”
“…….”
“그럼 알아서들 살아가겠지.”
“그게, 무슨…….”
“나는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너른 등이 멀어져 간다.
하칸의 표정이 절망스러워졌다.
‘미쳤어. 미친 거야. 이, 이건 큰일이야. 정말로 큰일이야. 정상적인 하이로드라면 저렇게 말할 리 없어. 일반 반란 종자도 아니고 그들의 수괴가 있다는데도. 아니야. 이건 아니야.’
그냥 내버려 두라고? 알아서 살아가라고?
인간들은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놈들이다! 절대 방심할 수 없는 놈들!
명령에 고분고분 순정했던 하칸이었지만 이번 명령만큼은 속에서부터 격렬히 거부했다.
고개를 거칠게 저은 하칸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통제 불능의 상황에 처했을 때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모든 소중하고 귀한 것들을 모아둔 자신만의 공간에 갇힌 하칸은 그러고도 진정이 안 되어 방을 초조히 돌아다녔다.
[악! 아빠, 얘가 날 쪼았어!]
[이게 미쳤나, 감히 내 귀한 아들을. 부리 끝을 잘라라. 새끼 때 날개랑 같이 잘라 둘 걸 그랬네.]
하칸은 귀를 틀어막았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극심한 혼란이 그를 뒤흔들었다.
다른 수인 수장들이 배신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이로드가 인간 편으로 돌아선다는 건, 그들을 온화하게 대한다는 건 자신이 밟고 있는 이 기반이 완전히 흔들릴 수 있음과 일맥상통.
하칸의 시선이 작은 함들을 겹겹이 쌓아 놓은 구석으로 향했다.
하나하나가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진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함들.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간 하칸이 맨 위 칸의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절대 인간들이 양지로 올라와서는 안 돼.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건 막아야 해.’
그때였다.
[학살자가 너희를 죽이려고 할 때 써라.]
하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마 전에 하칸은 수상한 사내의 방문을 받았다.
흑계. 흑계인. 죽음의 일족. 다양한 이종족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 특이한 종족.
들어보기만 했지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그 종족의 일원은 천박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줄줄 풍겨 댔다.
인상 깊었던 점은 눈. 눈물을 잔뜩 흘린 사람처럼 퉁퉁 붓고 벌겋게 짓누른 눈을 하고서는 시익거리는 그가 얼마나 꺼림칙했던가.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받지 않을 거야. 불쾌하니 나가 줬으면 좋겠어. 모르나 본데, 그분은 우리를 해하지 않아. 그분이 싫어하는 건 인간, 박쥐족, 그리고 너희 흑계인들이다. 이제 보니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아. 그렇게 음침하니 누군들 싫어하지 않겠어?]
흑계인은 우는 듯 웃었다. 흐으, 흐으. 귀곡성 같은 소리에 오싹 올라왔던 소름.
[왜 그렇게 확신하지?]
[그야 우리는 유용한 존재니까. 그분이 이 드넓은 대륙을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존재.]
[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흑계인은 그렇게 말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봐야 퉁퉁 부은 눈이 꿈틀거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자가 정말 그래서 너희를 가만 보고 있다고 생각해? 그 증오로 똘똘 뭉친 괴물이?]
[…….]
[정말 우습고 믿어지지 않는 이유야.]
신랄하게 비웃는 흑계인에게 발끈했지만 바로 부정하지 못한 이유는 망설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바로 반박하지 못한 이유. 그 말에 아주 약간, 동의했기 때문에.
증오로 똘똘 뭉친 괴물.
빠르게 움직이는 입술 사이, 나직하지만 귀에 틀어박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광기가 머리까지 치솟은 자다. 그 지독한 광기가 너희들이라고 집어삼키지 않을까?]
이윽고 그는 새카맣고 반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하칸이 그 불길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음산하게 낄낄대며 말했다.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너희의 숨통이 조인다 싶을 때 써.]
[…….]
낮춰진 목소리가 음험하게 속살거렸다.
[그 여자에게 써 보아.]
[그 여자?]
[왜 이래? 이미 알고 있으면서. 학살자의 약점이자 심장. 견디지 못한 학살자의 심장은 터져 버릴 것이니.]
* * *
갑작스럽게 찾아온 하칸을 맞이하는 곰족 수장은 별궁의 중앙홀에 철퍼덕 앉은 채였다.
간밤에 비가 온 탓에 마당의 풀이 다 젖어 있어서, 온갖 간식거리를 홀로 옮긴 참이었다.
양손을 꿀 독에 푹 담가 손가락을 빨아 대는 곰족 수장의 옆엔 꿀을 푸던 국자가 나뒹굴고 있었다.
국자가 불편하여 손을 쓰고 있는 곰족 수장.
긍지를 잃은 맹수.
‘추잡하군.’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지만, 경멸은 또 다른 문제였다.
속내를 숨긴 하칸은 친근한 미소를 띠었다.
“어, 하칸.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우, 일어날 필요 없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칸이 한쪽 눈을 찡그리자 곰족 수장이 머쓱하게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려면 한참 걸린다고.”
“살이, 좀 더 찐 것 같긴 하네.”
황궁에 들어오기 전, 탄탄했던 근육은 죄다 살로 변해 있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왔어?”
“밀라니아 님이 자네를 찾았다고 들었어.”
“어어, 그랬었지.”
손바닥을 핥으며 곰족 수장이 굼뜨게 긍정했다. 하칸의 눈이 반짝였다.
“궁금한 게 있어서 온 거야. 그분에게 특이 사항이랄 만한 게 있는지.”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우리 황궁의 방향성과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우리 황궁은 인간을 감시하고 수인의 권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잖아.”
“수인의 권익이라고?”
곰족 수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
하칸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일단은 화를 내리눌렀다.
이 무례에 대한 처벌은 일이 마무리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런데 그분은 아무래도 인간들에게 친화적이신 것 같단 말이지. 그러면 아무래도 우리와 갈등이 있지 않겠어? 하이로드의 연인이신데 혹여나 불상사가 있으면 안 되잖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기 전에, 내가 오해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자네를 찾아온 거야. 오해라니!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
유들유들한 하칸의 말에 곰족 수장은 꿀을 쭉 빨아 먹으며 중얼거렸다.
“관심이 많은 것 같기는 했어…….”
하칸이 고개를 쭉 내밀자 곰족 수인이 눈알을 왼쪽으로 굴렸다.
“어, 아니.”
하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군. 감히.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게 누구 덕인데.’
크리스털 방의 그 여자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무슨 얘기를 했을까.
뭐라고 했기에 이 식탐에 미친 곰탱이가 미적지근하게 굴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래? 아는 게 없다는 거지? 확실해?”
하칸은 팔짱을 끼었다.
곰족 수장은 모든 수장들 중에서 음식 지원을 가장 많이 받는 자.
‘만약 황궁에서 쫓겨나기라도 한다면 둔한 몸으로 사냥도 못 할 테고, 먹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터.’
약간의 위협이 담긴 시선에 곰족 수인은 갈등이 어린 눈으로 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인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잘 몰라.”
“알겠어.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믿지. 그렇지. 설마 자네가 내게 거짓말을 할까. 믿어야겠지. 일단, 당분간은 말이야.”
혹여 거짓이란 게 들통난다면 재미없을 거라는 시선에 곰족 수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짜증스럽게 몸을 돌린 하칸의 귀로 곰족 수인의 두꺼운 목소리가 흘러들어갔다.
“왜?”
하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럼 그렇지. 자기가 말 안 하고 배겨?’
“황궁 밖에 나다니는 조인족은 뭘 하고 있는 거지?”
하칸의 얼굴이 구겨졌다.
“뭘 하고 있긴. 몰라서 하는 소리야? 조인족들은 모두 황궁의 군대에서 전사와 시종으로 일하고 있잖아. 내 일족이 너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갑자기 왜 그래?”
“흐응. 알았어. 물어볼 건 다 물어봤어. 그만 가 봐.”
‘할 말이 이게 다라고?’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 하칸은 꿀 독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곰족 수장을 보고 만면에 주름을 잡았다.
짜증이 나서 얼굴을 곱게 펼 수가 없었다.
곰족 수장의 별궁에서 나온 하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날개를 펼쳤다.
다음으로 그가 향한 곳은 인어족 수장의 별궁이었다.
“하칸이 왔다고?!”
인어족 수장은 처음부터 하칸의 시선을 피하고 물속으로 잠수했다.
‘지금 내가 너랑 장난하려고 왔냐고.’
부아가 치민 하칸이 욕탕 위로 날아가 인어족 수장의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 올렸다.
“뭐 하는 거예요!”
수장의 애인이 기겁하여 수장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하칸은 욕탕 위에 둥둥 뜬 채 팔짱을 끼었다.
“꼴에 남자라고 감싸는 거야?”
비웃음 섞인 말에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 하칸을 쏘아보았다.
“안 그래도 성질나 죽겠는데 미천한 인간 따위가 깃털 빠지게 하네.”
스트레스를 받은 조인족은 가장 먼저 날개의 깃털이 빠지곤 했다. 하칸은 깃털이 촘촘히 난 날개를 쓰다듬었다.
인어족 수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밀라니아 그 여자가 여기 왔지? 왜 온 건지 얘기해 봐.”
인어족 수장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니까 그 별 얘기가 뭐냐고.”
“그냥…….”
눈알을 굴린 인어족 수장이 물에 들어갔다. 입이 물에 잠기자 보글거리는 거품이 올라온다.
하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인어족 수장은 슬쩍 입을 물 밖으로 내놓았다.
물 밖에 동동 뜬 입술이 달싹였다.
“요즘 잘 지내냐고 물어봤을 뿐이야.”
“뭐? 그 여자랑 아는 사이야?”
인어족 수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봐. 너어,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해?”
“거짓말 아니야. 정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황궁에 갇혀 흥청망청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인간과 어울릴 생각은 없냐는 말이었으나 인어족 수장은 교묘히 말을 꾸며냈다.
그녀가 외면한, 또는 버려 둔 일족들이 인간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의 일.
‘날개 군대’라는 하칸의 조인족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거짓말한 하칸에게 화가 나서 머리카락이 삐죽 솟았다.
모든 걸 알게 된 지금 인어족 수장은 심란해졌다. 특히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눈물의 호소를 받고 나니 더욱더.
[저희만 잘 지내선 안 되잖아요. 이래서는 매일 밤 꾸는 악몽만 심해질 거예요.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산해진미를 먹어도 행복하지 않아요.]
‘하아.’
마음의 결정이 나지 않은 상황에 하칸의 무례한 다그침을 받고 있으려니 마음이 급격하게 한쪽으로 쏠렸다.
뚝 시침을 떼는 인어족 수장의 얼굴은 불안해 보이긴 했지만 그것조차 하칸의 강압적인 모습 때문으로 보일 만큼 천연덕스러웠다.
결국 수상한 점을 발견 못 한 하칸은 씩씩거리며 인어족 수장의 별궁을 빠져나왔다.
‘분명히 뭔가 있기는 있는데.’
그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사람은 의외로 하칸의 저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응접실에 앉아 있는 이는 호족의 심부름꾼 켄치였다.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앉은 하칸의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켄치는 눈치를 보았다.
“일은…… 있는 거 같은데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하칸은 목덜미를 따라 난 깃털을 만지작거리다 켄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켄치의 지저분한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하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쫓겨나기라도 했냐?”
움찔.
그냥 해 본 말이었던 하칸이 눈을 치떴다.
“예…….”
켄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긍정했다.
하칸이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 눈에서 한심함을 읽은 켄치는 죽고 싶었다.
그러나 곧 억울한 마음이 올라왔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기댈 곳은 여기뿐이야.’
눈 딱 감고 켄치는 냅다 질렀다.
“성주의 군대가 한 건 아니옵고요. 성주에겐 군대라고 할 만큼 강한 놈들도 없어요. 호족들은 몇몇 놈들을 빼고 다 제 편을 들었습죠.”
“그런데.”
“웬 이상한 놈들이 찾아와서 절 이렇게 만들었습죠. 특히나 남자 쪽은 어찌나 무서운지, 손도 못 쓰고 도망갔습죠. 인간은 아니에요. 분명히 수인……. 그것도 굉장히 강한 맹수류의 일족이 분명합죠.”
켄치가 벌벌 떨었다. 그제야 하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수인이라고? 강한 수인? 호랑이나 사자가 내려오기라도 했나?”
호랑이. 사자. 명실상부 이종족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한 자들이지만 워낙 그 수가 희귀하고 대부분이 1대륙에 위치하여 만날 일은 많지 않았다.
“그, 그럴 수도 있습니다.”
“네가 손도 못 댈 남자라……. 남은 인물은 누구야? 그자도 맹수과 수인이었냐?”
만약 사실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생각에 잠긴 하칸의 귀로 켄치의 자신 없는 목소리가 꽂혔다.
“수인인지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겉모습이 상당히 아름다웠고, 그……, 색이 특이했던 걸 보면 인간은 아닌 게 틀림없습죠. 은색 머리칼에 황금색 눈동자. 수인이라면 제가 모르는 종족일 것이…….”
귀가 번쩍 뜨였다.
“방금 뭐라고 했어?”
“예?”
하칸은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이글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놀란 켄치가 되묻자 하칸이 역정을 냈다.
“방금 뭐라고 했냐고!”
“으, 은색 머리칼에 황금색 눈동자요. 상당히 아름다웠습죠.”
겁에 질린 켄치가 허둥지둥 말하니 하칸은 주먹을 꽉 쥐고 책상을 내리쳤다.
쾅!
“밀라니아!”
“그, 그 이름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 여자가 거기 있었군! 너를 내쫓고 성주의 손을 들어줬단 말이야? 인간의 편을 들었다?”
미친 것처럼 느껴지는 하칸의 집요한 질문에 켄치는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예, 예. 맞습니다. 저를 쫓아내고 인간들의 편을 들었어요. 그들의 지위를 되찾아 주고……. 아! 레지스탕스들을 발견하기도 했었는데, 그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죠.”
“남자 쪽의 명령으로 조인족 군대가 멈추고, 나머지 인간들은 도망갔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켄치가 눈을 크게 뜨자 하칸은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그 여자가 문제다. 문제는 그 여자였어.”
“예? 무슨 말씀이신지…….”
켄치를 무시하며 하칸은 완전히 몸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피부의 깃털을 떼어 낼 듯이 거칠게 문질렀다.
절망과 흥분과 후련함이 섞이어 온몸의 깃털이 파르르 곤두섰다.
‘찾았다. 나의 수장에게 쓸데없는 생각을 심어 준 범인.’
그 여자가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간다고 생각했던 이 불쾌한 변화의 원인.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잡힐 듯 말 듯 했던 실마리를 하칸은 망설임 없이 잡아챘다.
‘인간을 돕고 있다는 거지. 어림없는 일. 인간은 우리와 공존할 수 없는 족속들인데.’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칸은 부리처럼 툭 튀어나온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거세게 깨물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강하게 문질러지던 깃털의 깃대가 뚝 부러졌다.
하칸의 마음에, 손톱처럼 남아 있던 망설임도 사라졌다.
남은 건 비열하고 은밀한 계획뿐.
* * *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이고 그레칸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스해 줘.”
조명이 어둡기 때문인가.
‘뭐가 이렇게 뻔뻔한지.’
내심 당황한 그녀는 입을 딱 붙이고 있었다.
‘설마 뭔가 알아채기라도 한 겐가.’
그녀보다 더 그녀를 잘 안다고 단언하는 그레칸이니,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밀라니아는 조바심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레칸의 당당한 요구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가.
“흠흠,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인간들이 잘하고 있나 보려고 여기저기 많이 만나고 다녔잖아. 속이 안 좋아. 힘내라고 해 줘.”
“……이리 와 보거라.”
그레칸은 잠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얼굴을 기울였다. 모양 좋게 잘생긴 분홍빛 입술이 가까워진다.
입술이 겹쳐졌다.
그레칸의 입술은 보기 좋은 색과 달리 건조한 편이었다. 대신 부드럽고 따뜻하다.
밀라니아의 것은 촉촉하고 말랑말랑했다.
의외인지 아닌지, 둘의 입술 상성은 꽤 잘 맞는 편이다.
먼저 그레칸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레칸은 그 스스로 키스를 재촉했음에도 결코 무작정 혀를 집어넣지 않았다.
입술을 마주치는 이 행위의 작은 순간까지도 음미하고 싶다는 듯 천천히 움직인다.
아랫입술을 충분하게 적시듯 빨고는 혀를 내밀어 밀라니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 안을 탐방하기 시작한다.
탐방이라는 말이 딱 맞다고, 밀라니아는 볼 안쪽을 느릿하게 쓸어 올리는 혀의 움직임에 목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원래 키스란 게 타고나는 것인가?’
잘한다는 게 상대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들고 머릿속을 뜨겁게 만드는 행위라면, 그레칸은 꽤 키스를 잘하는 편일 것이다.
입술이 떨어지고 숨결이 맞닿는 거리에서 밀라니아는 탄식했다.
중얼거리자 그레칸이 눈을 깜박였다.
근사한 웃음이 번졌다.
“잘한다니 다행이다. 당신이 좋아서, 내내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는데.”
그녀를 가만 지켜보던 그레칸이 툭 뱉었다.
“얼굴이 빨개, 밀라니아.”
“뭐라?”
화들짝 놀란 밀라니아가 손을 뺨으로 가져다 댔다. 그레칸을 쏘아보니, 그의 얼굴이 뒤늦게 빨개지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빨갛다.’라고 하려는데 그가 풀썩, 밀라니아의 옆에 쓰러졌다.
흰 시트에 얼굴을 묻은 그에게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
“또야.”
“…….”
“행복한 느낌.”
홱, 고개를 굴린 그레칸이 그녀에게 발갛게 달아오른 시선을 맞춰 왔다.
“입, 맞춰 줄 줄 몰랐어.”
“…….”
“그냥 장난쳐 본 건데.”
“장난이었느냐?”
밀라니아가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그레칸은 황급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이 조용한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린다.
“반쯤만.”
“…….”
“당황했어?”
그레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길 바랐어.”
“…….”
“당황해 줘서 기뻐. 장난이라고 밀어내지 않아서.”
연거푸 카운터펀치를 맞은 밀라니아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그레칸의 낯빛은 쉬이 진정할 기색이 아니었다.
“후우,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실은 이 말을 하려고 왔는데.”
눈 한쪽을 찡그린 그레칸이 낮게 웃더니, 아주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일은 밀라니아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어.”
“…….”
“인간들이 빠르게 수인들의 마음을 돌리고 있더라고. 이거, 궁금했었지?”
밀라니아는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로 그레칸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소식을 전해 온다. 그녀가 바라기 때문에.
험, 헛기침을 한 밀라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인간이 싫지 않으냐?”
인간을 향해 때때로 치솟는 증오.
그레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밀라니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서로의 체온이 비슷해졌을 무렵에.
“괜찮아.”
그는 그녀의 손끝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이제는 괜찮아졌어. 걱정하지 않을 만큼은. 때때로 누구든 죽이고 싶었던 마음, 이제 없거든. 밀라니아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이 증오에 정신을 놓으면 얼마든지 날 처리하면 되니까.”
“…….”
“그러니 내가 이 땅을 엉망으로 만들까 봐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신이 해야 할 건, 스스로의 몸을 보전하는 거야. 그렇지 못한다면 날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벌써 세 번째였다. 자신을 죽이라는 말.
태연한 그레칸이 어딘지 못마땅해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듣기 싫으니 그만하거라. 이 땅이 망가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나, 너 또한 걱정된다는 걸 왜 몰라.”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리 약해진 내가 널 제지할 수나 있겠느냐.”
‘그러니까 죽이니 살리니 하는 말은 그만하고 증오심을 희석시켜 보라.’ 하려던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칸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응.”
“…….”
“당신만이 할 수 있어.”
그냥 넘기기에는 묘하게 확신 어린 말투였다. 거슬린다.
“어떻게?”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윽고 그레칸은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을 꺼냈다.
“…….”
“죽을 만큼 행복해.”
만면에 그가 느끼고 있는 행복감이 느껴졌다. 그레칸이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 불쑥 감탄이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입을 맞추었기 때문인가. 가슴에 꽃잎이 살랑거리는구나.’
한층 친밀해진 분위기와 밀도 높은 공기가 담요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괜히 팔을 쓸고 싶어지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어졌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이래서 인간들이 줄기차게 키스를 하나 보구나.’
그레칸이 속삭였다.
“무슨 생각해?”
“응?”
밀라니아가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자 그레칸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상한 눈?”
긴장한 밀라니아의 몸이 가볍게 굳어졌다.
그레칸은 매끈한 긴 눈을 반쯤 접어 가늘게 뜬 눈으로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그가 한참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손을 제 가슴으로 가져간다.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다부진 가슴팍에 닿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