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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을 심는 것처럼 시작해
빗자루가 없는 여행. 걷는 것을 귀찮아하는 밀라니아에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립 지역에 회의하러 갈 때도, 다른 이종족의 영역에 갈 때도, 2대륙으로 갈 때도 빗자루는 그녀의 여행길에 필수적인 동반자였다.
예전에 쓰던 질 좋은 빗자루가 폭풍에 망가지고, 스미스의 마법 공방에서 구했던 저품질의 빗자루는 1대륙의 마녀성에 두고 와 다른 빗자루를 구할 틈도 없이 1대륙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에게 빗자루는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나선, 그것도 난생처음 빗자루 없는 여행길은 밀라니아의 생각보다는 평탄했다.
다름 아닌 그레칸 덕분에.
‘빗자루보다 편하구먼.’
그레칸의 단단한 양팔에 몸을 뉜 밀라니아는 눈을 끔벅끔벅했다.
그의 품이 어찌나 안정감 있고 편안한지 비행하면서 자도 될 정도였다.
빗자루는 편한 아티팩트였지만 오래 타면 엉덩이가 배길 때가 있는데 그레칸은 그런 단점도 없었다.
“멈춰 보거라.”
그녀가 그레칸의 팔을 툭툭 치자 속도가 느려졌다.
“저기, 농사를 짓고 있는 거 같은데 가까이서 한번 보자꾸나.”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안은 채 농토 근처의 박달나무 가지 위에 올라섰다.
“인간 하나와, 저건 뭐야.”
“토끼네.”
밀라니아도 보았다.
쉰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허리를 쭈그리고 앉아 밭에 호미질을 하고 있었고, 하얀 귀가 뾰족 튀어나온 열댓 살가량 되어 보이는 토끼 수인이 호미로 팬 구멍에 씨를 집어넣고 있었다.
작업 방식은 잠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늙은 인간 남자가 호미로 땅에 고랑을 만들면 토끼 소녀가 씨를 뿌리고, 늙은 남자가 다시 땅을 메운다.
도구라고는 호미 하나뿐인 원시적인 방식이었고, 그나마도 잘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허허벌판인 밭을 둘러보았다. 농토는 불길한 까만색이었다.
“씨앗을 심어 봤자일 텐데.”
“그렇구나. 재가 쌓인 땅에선 뭣 하나 제대로 자라지 않을 테니.”
“풀은 좀 자라는군.”
그레칸이 턱짓을 했다. 그의 말대로 까만 땅이지만 군데군데 식물이 자라 있었다.
아무래도 깡치네가 있는 황도에 비해 땅의 오염도가 낮아서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저 땅에서 난 수확물이 몸에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오염된 작물이라 먹어 봤자 허기만 면할 것이다. 몸에 독소가 쌓이겠지.”
더 가까이 가자는 얘기를 하려는데, 그레칸이 먼저 발돋움을 해서 몸을 띄웠다.
밀라니아가 의외라는 듯 쳐다보자 그레칸이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밀라니아의 잇새에서 가벼운 웃음이 샜다.
“너희는 인간과 수인인데 어찌하여 농사를 같이 짓고 있는 것이냐?”
씨앗을 심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노인과 토끼 수인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하늘에 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어이구!”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노인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백내장 기미 있는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예전이라면 마법사구나 싶겠지만 마법이 사라진 지금의 세상에는 마법을 쓰면 귀신을 보는 듯 쳐다보곤 해서, 밀라니아는 놀라는데도 담담히 대꾸해 주었다.
“귀신은 아니니라.”
비실비실한 노인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 질문. 질문이라 하면…….”
노인이 어리벙벙하게 대꾸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보다 상황 파악이 빠른 토끼 소인이 소심하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혼자 하기에는 일이 많아 같이하고 있는 것인데요.”
“우문현답이로고.”
밀라니아는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한데 요즘 세상은 아무리 일손이 급하더라도 인간과 수인이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경우가 많이 없더구먼.”
황도만 해도 그랬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깡치네와 레지스탕스 일당은 대판 싸웠을 것이고, 어느 한쪽은 황도의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터였다.
“아, 그거는…… 황궁이 있는 황도와는 거리가 멀어서요, 이곳이. 같이하는 경우도 있어요. 특히 저는 가족을 잃어버려서 할아버지밖에 거둬 주는 사람이 없었고요.”
“저는 자식들이 황도로 떠나 버려서 적적하기도 하고…….”
“저희만 그런 건 아니에요. 저쪽 땅에서 양족 아저씨랑 할머니가 밀 농사를 짓고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외면된 자들끼리 합심하였다는 게로군.’
턱을 두어 번 더 쓰다듬은 밀라니아는 손을 내리고, 저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는 노인과 토끼 소녀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보기 좋으니 내가 도와주겠다.”
“……예?”
귀신이 아니라고 했건만 그래도 불안했는지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보름달처럼 동그래졌다.
그레칸이 그녀를 고쳐 안았다.
한 손을 그녀의 허벅지 아래를 받치고 끌어안았는데 밀라니아는 이 자세가 몹시도 민망하여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안지 않누.’
그레칸이 그녀를 안지 않은 다른 손을 농토로 뻗자 불만을 속으로 삼켰다.
그레칸이 농토의 끝과 끝을 향해 손바닥으로 쓰는 시늉을 했다.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까만 흙이 공처럼 굴려지고, 그레칸의 손짓에 따라 소멸되었다.
그 광경이 가히 기적 같은지라 노인은 입이 떡하니 벌어졌고, 토끼 소녀는 두 손으로 쫑긋 선 귀를 부여잡았다.
“지금까지 농사는 잘됐느냐?”
“예? 아, 예에. 그럭저럭.”
“이것저것 심었던 것 같은데 먹을 만큼은 수확되는 것이야?”
“먹을 만큼은 간신히…….”
“그러나 먹어도 헛배가 불렀을 테지?”
정확한 듯 토끼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인을 힐끗했다.
벌어진 입을 슬그머니 닫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토끼 소녀가 자그맣게 대꾸했다.
“마, 맞아요. 저는 일반 잡초도 먹는데, 먹어도 살이 찌지 않고 머리가 아파요. 그래도 먹을 게 없으니 농사를 짓지 않을 수가 없어서요.”
깡마른 노인과 그에 못지않게 마른 토끼 소녀를 번갈아 보고 밀라니아는 주먹을 쓱, 내밀었다.
“예?”
의미를 모르겠다는 눈으로 토끼 소녀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땅은 정화되었느니라. 새로 씨앗을 심거라. 잘 키워 낸다면 이 씨앗이 너희들을 배부르게 할 것이야.”
주먹을 뒤집은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엔 하얀 밀알이 수북했다.
“내 선물이니라. 내 기운이 담긴 이 씨앗은 일반 씨앗보다 빠르고 튼튼하게 자라지. 정성으로 키운다면 며칠 내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거다.”
토끼 소녀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서 밀알을 가져갔다.
조그마한 두 손으로 소중한 듯이 밀알을 쥐는 소녀를 향해 밀라니아는 빙그레 웃었다.
“가자.”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단단히 끌어안고 자리를 떴다.
토끼 소녀의 말대로 그들처럼 살고 있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밀라니아와 그레칸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오염된 땅의 독소를 몰아내고 새로운 씨앗을 나누어 주었다.
수인과 인간이 씨앗을 소중히 심고 정성을 들여 키우자 일주일도 되지 않아 싹이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검붉은 토양은 어느새 푸릇한 새싹으로 가득해졌다.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졌고, 땅을 개간하고 파종하는 손길엔 열의가 넘쳤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밀라니아와 그레칸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간 소문은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밀그렘의 이름을 기억하거라. 곧 모든 이들이 밀그렘의 이름하에 싸우지 않고 단결하게 되리라.]
신이 힘을 쓰지 못하는 세상. 그러나 힘든 시대에서 희망을 얻기 위해서라도 절대자에게 의지하고픈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은 밀라니아의 말을 마치 예언처럼 여기고, 주문이라도 외듯이 밀그렘을 중얼거리고 다녔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입에서 번져 나가는 밀그렘은 황도를 벗어나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레지스탕스 요원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험지를 굴러다녔음에도 소문에 의지해 쉬지 않고 방랑하던 요원들. 초췌하기 짝이 없는 얼굴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마주치는 눈빛. 고개를 끄덕. 혼혈 둘과 인간 셋, 총 다섯 명의 요원들은 검붉은 땅을 내달렸다.
“이 땅은 독소가 꽤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느니라. 지금은 씨앗을 심어도 효과가 없으니, 삼 일은 기다렸다가 파종하는 게 좋을 것이야.”
“마녀님?”
먹을 게 없어 빌빌대던 가족들에게 씨앗을 나눠 주던 밀라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요원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었다. 밀라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지 얼굴이 눈에 익는구먼?”
“저는 도두릿이고요.”
“호루스 교수님께 사사한 레이입니다.”
밀라니아의 얼굴이 풀어지자 그녀가 자신들을 알아봤음을 깨달은 레지스탕스 일행이 얼굴을 활짝 폈다.
소문 자자한 귀인을 만났다는 생각에 그간 한 고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소문의 귀인.
생명의 마법사. 그리고…….
그레칸에게도 인사하려는 순간, 무심하게 번뜩이는 눈을 보고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저분이 바로 지옥의 개보다 지독하다는 마녀의 미친 수호자…….’
밀라니아가 생명의 마법사로 불릴 시점, 세트로 붙어 다니는 그레칸에게도 칭호가 붙었다.
범인은 미넬라였다.
* * *
일행은 강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쉬는 시간을 틈타 건량을 먹으며 레이가 말했다.
“전에는 밀그렘의 두건을 쓰고 움직이고 있었어요.”
밀라니아는 텅 빈 그들의 이마를 흘끗했다. 레이가 멋쩍은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쓰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조인족 하늘 군대와 마주쳐서 쫓기는 바람에요. 그놈들, 밀그렘이란 이름을 보는 대로 족족 잡아들이고 있어요. 잡혀갈까 봐 빼놓긴 했는데, 여기요.”
그가 품에서 주섬주섬 두건을 꺼내었다. 다른 이들도 품에서 기다란 천을 꺼냈다.
여행길이 험난했는지 낡고 바래긴 했어도 위제니아가 수놓은 밀그렘의 글자는 분명했다.
“학교에서 나가셨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인어족 쏘가리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레칸만 없었더라면 손을 잡고 흔들었을 기세였다.
땅에 내려왔는데도 밀라니아를 놓지 않고 그녀의 푹신한 의자가 되어 주고 있던 그레칸은 날씬한 허리를 감은 팔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대단하시고 말고요. 벌써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시고…….”
인어족 쏘가리가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가 어두워진 낯빛으로 흐지부지 말끝을 흐렸다.
밀라니아는 영 힘이 없는 그들의 면면을 슬쩍 훑어보았다.
“하지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세상은 넓고 수인들과 인간들은 여전히 서로를 싫어하는데.”
바위 위에 앉아 그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는 그레칸이 그녀보다 뒤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기분이라 레이의 어깨가 슬며시 좁아 들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시는 걸까?’
한 손으로 땅을 뒤집는다는 소문의 위대한 영웅이 어린애 같은 질투로 저러고 있다는 것을, 레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레이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제가 너무 약한 말을 했죠. 신경 쓰지 마세요. 학교를 떠나기 전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조인족 군대에 쫓기다 보니까 자신감이 좀 꺾였거든요. 조인족 군대는 정말 강해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훈련도 많이 하고 해서…….”
쫓겨 다녔던 때가 생각이 났는지 레이는 얼굴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이걸 보거라.”
밀라니아는 두 손가락으로 작은 밀알을 집었다.
레이와 다른 일행, 그리고 그레칸까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집힌 밀알을 응시했다.
밀라니아는 천천한 움직임으로 발밑의 맨땅에 구멍을 내고, 밀알을 심었다.
토닥토닥, 발로 땅을 메우는 움직임이 나뭇잎에 튕기는 빗방울처럼 경쾌했다.
“수년 이내에 이 땅은 풍요로운 밀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바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허공에서 물방울이 생겨나고, 밀알이 심어진 땅 위로 조르륵 흘러내렸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먹고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되고 있느니라.”
방금까지 시무룩했던 이들이 멍하게 쳐다보자 밀라니아는 다소 무덤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는 곳마다 씨앗을 심어 보거라. 밀알을 심는 것처럼 시작해.”
“…….”
“그렇다면 언젠가 온 세상이 풍요로운 밀과 사과로 가득할 것이다.”
밀라니아의 금색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났다. 보고 있으면 꼭, 그렇게 될 것 같은 희망을 주는 눈빛이었다.
그레칸은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떴다.
* * *
밀그렘 일행과 헤어지고 그레칸은 지낼 곳을 찾기 위해 밀라니아를 안고 날기 시작했다.
밀그렘의 단원들은 좀 더 같이 있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그레칸의 서늘한 시선에 입 한 번 떼지 못했다.
저 멀리 하늘을 향해 뾰족한 지붕을 자랑하는 성이 보였다.
성을 향해 날아가면서, 그레칸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면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던 밀라니아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안긴 자세가 자세이다 보니 요 근래 그의 측면을 자주 보게 되었는데 이 각도에서도 그리 흉하지 않았다. 아니, 썩 보기 좋다.
“밀라니아.”
갑작스러운 부름에 밀라니아는 헛숨을 들이켰다.
딱히 훔쳐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이 왠지 민망했다.
“난 밀라니아가 좋아.”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밀라니아는 멈칫했다.
크지 않은 소리라 바람 소리에 묻힐 만한데도 귀에 콕콕 박혔다.
“정말 많이 좋아해.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나보다, 다른 어떤 걸로도 비교하지 못할 만큼.”
예고 없이 그레칸의 속내를 여과 없이 듣게 된 밀라니아는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레칸의 품에 안긴 터라 옴짝달싹도 할 수 없어 피하는 것도 힘들었다.
“당신의 모든 것이 내 가슴을 뛰게 해. 아무도 나처럼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그의 턱이 힘이 들어간 듯 불거졌다.
“아까도 그래. 그놈들이 당신을 보는데 내가 어떻게 하고 싶었냐면……. 밀라니아가 알았으면 틀림없이 날 혼냈겠지.”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레칸은 예사로운 말을 하는 것처럼 담백했다.
새카만 눈동자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 그레칸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좋아하는 이들을 없애는 짓은 이제 안 해. 받아 달라고 떼쓰는 짓도 안 해.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지금은 아니까.”
그레칸이 고개를 숙였다. 눈이 마주쳤다.
밀라니아는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저 당신이 날 받아들이게, 날 좋아할 수 있게…… 노력할 거야.”
그레칸이 밀라니아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감정으로 일렁이는 눈을 반쯤 접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미소라는 건 반쯤 드러난 눈동자를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밀라니아는 그의 감정을 가늠하기에는 자신이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그 경위를 완벽히 설명할 수 있는 자는 없느니라. 그래서 모르겠다. 네가 어째서 나를 그리도 애정하는지.’
밀라니아의 눈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더는 그레칸의 마음을 착각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이, 폭력적으로 거칠어질 때도 있었던 마음이 지금은 따스한 빛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으므로.
밀라니아는 한숨처럼 속삭였다.
“나도 널 좋아한다.”
눈을 크게 뜬 그레칸의 눈빛이 흐려졌다.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밀라니아는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성애적인 의미로라면, 나는 네가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느니라.”
“다행이야. 만약 그랬다면 그 누군가는, 밀라니아가 말려도 죽였을 거야. 그것만은 참을 수 없으니까.”
밀라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두어 번 눈을 끔벅이고 인상을 찌푸렸다.
“몹쓸 놈이로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거라.”
“나 때문에 당신이 고민하는 게 좋은 걸 어떡해.”
체념한 밀라니아가 비뚜름하게 중얼거렸다.
“불통이로고.”
그레칸은 맞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도 지금의 난 당신을 지킬 수 있어. 지금의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야.”
“…….”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유일한 사람. 예전부터 난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애정. 밀라니아는 왠지 힘이 빠졌다.
“나는 잘 모르겠으이.”
“괜찮아. 자신 있어, 난. 당신도 모르는 당신이 좋아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레칸을 애정하되 사랑하진 않는다. 애초에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레칸이 보여 주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면, 자신은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결국 실망한 그레칸이 좌절할까 봐, 그 점이 걱정이었지만 그레칸이 자신만만하게 구니 슬쩍 마음이 동했다.
“허어. 그게 무엇인데.”
“일단은.”
그레칸이 생각을 하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다소 뻔뻔해 보일 정도로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빗자루 대용인 나. 편해서 좋아하잖아.”
은근히 기분 좋아하는 그레칸에게 툭 뱉었다.
“하나 그레칸, 빗자루와는 성애를 나누지 않는다.”
그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 모습이 어린애 같아서 밀라니아는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 *
“이곳에서 쉬시면 됩니다. 저희 성에서 가장 좋은 곳이에요.”
“고맙다.”
“고맙기는요. 그런 말씀 마세요. 못된 켄치를 쫓아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더 해 드리고 싶은데, 일단 저희 안사람이 꿩 요리를 기가 막히게 합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극진한 성주의 태도를 뒤로하고 밀라니아와 그레칸은 성주가 내어 준 방으로 들어갔다.
“가장 좋은 방이라더니, 성주의 방이라도 내준 모양이로고.”
“살구씨 기름 냄새…….”
주전자의 주둥이에 코를 대고 킁, 냄새를 맡은 그레칸이 살구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성주가 아니라 그 호족 놈의 방인 것 같은데. 그놈이 성주보다 좋은 방에서 살았나 봐.”
“누구의 방이든, 성의가 고맙구나.”
밀라니아는 침대에 풀썩 쓰러져서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웬 호족 사내와 푸닥거리를 했더니 적잖이 피곤했다.
잠깐 밤을 지내고자 했던 뾰족한 붉은 지붕의 성은 성주가 있었지만 황궁과 비슷한 상태였다.
‘그레칸도 유명무실한 황제를 세워 놓고 제멋대로 했으니.’
누운 채로 그레칸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시선을 느낀 그레칸이 그녀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팍시무테라는 이름의 성은 대대로 호족을 가신으로 둔 인간이 성주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인간과 수인의 지배 계급이 뒤바뀌고 나서, 성내 질서도 엉망이 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호족의 일족 하나가 인간과 협력하는 호족들을 감옥에 가두고 떵떵거리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놈은 저희 일족에서도 성정이 포악하고 화가 많은 망나니 같은 놈이었습니다.]
왕처럼 행세하던 호족의 망나니는 그레칸이 앞으로 나서자마자 깨앵 비명을 지르며 제 부하들과 도망갔다.
그 대가로 편안히 쉴 곳을 받은 밀라니아는 일이 묘하게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도망간 호족은 망나니였지만, 성주의 말에 따르면 황궁과 밀접한 선이 있다고 했다.
“슬슬 황궁에서도 이쪽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겠구먼.”
“그렇겠지.”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을 슬슬 만지고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황궁의 일은 관심이 없는 듯 대꾸엔 열의가 없었다.
아무리 그레칸 덕분에 편히 이동한다 하더라도 밖에서 나돌아 다닌 시간이 너무 길었다.
본래 하루 반나절을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기를 좋아하는 밀라니아는 피곤한 얼굴로 눈만 끔벅거렸다.
“피로감, 풀어 줄까?”
“응?”
밀라니아가 그레칸을 향해 고개를 더 비틀었다. 반쯤 감겨 게슴츠레한 눈으로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레칸은 그녀에게서 손을 느릿하게 떼고 다섯 손가락을 까딱였다.
“기분 좋게 해 줄게.”
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곤란한 일을 겪어 왔던 밀라니아의 얼굴에 불신이 어렸다.
삼십 분 후.
밀라니아는 어색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자신만만한 그레칸의 기세에 못 이겨 두고 보긴 했지만 밀라니아는 지금이 못 견디게 민망했다.
나무로 된 족욕탕을 가져온 그레칸은 뜨거운 물을 담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고, 그 자신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 족욕탕 안에 들여놓았다.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물 온도는 약간 뜨거운 정도로, 적절했지만 다른 게 문제였다.
그레칸은 신중한 얼굴로 물에 감싸인 발을 꾹꾹 잡아 눌렀다.
밀라니아는 시원한 한편, 어색해서 발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두 손을 뒤로 넘겨 침대를 받치고 그녀는 물속에 잠긴 발을 까딱였다.
물이 첨벙거리자 그레칸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럴 필요는 없느니라.”
머쓱하게 말하는 밀라니아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부여잡은 그레칸이 다시 족욕탕의 따뜻한 물에 그녀의 발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하면 덜 피곤할 거야.”
“차라리 시종을 부르거라.”
“왜?”
그레칸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불러. 아니면 설마 다른 사람이 더 좋은 거야?”
눈빛이 음산했다.
그렇다고 얘기하면 곡소리가 터질 듯하다.
그레칸은 흡족한 표정으로 밀라니아의 말을 주물럭거렸다.
그의 손은 크고 두꺼웠다. 손끝이 단단해서, 발바닥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꾹 누르자 머리까지 찌릿했다.
그레칸은 최선을 다해서 그녀의 발을 마사지했다.
알게 모르게 쌓였던 피로가 조금씩 풀려 갔다. 근육과 힘줄이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발은 더러운 땅을 딛고 서는, 깨끗하지 않은 신체 부위.
어느 정도 명망이 있다는 귀족 가문의 영애들에겐 남에게 함부로 보이지 못하는 내밀한 곳.
인간의 상식에 구애받지 않는 밀라니아지만 어쩐지 어릴 때부터 봐 온 그레칸에게 발이 주물러진다는 게 영 어색했다.
그러나 그레칸의 손놀림은 썩 편안했고, 만져지는 건 발뿐인데 온몸의 근육이 풀어지는 듯하여 만류하려는 마음이 스륵 사라졌다.
“으음.”
나른한 한숨을 흘리자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던 그레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렸다.
“누워 있어도 돼.”
“그래도 되겠느냐?”
“응. 자고 싶으면 자도 되고.”
밀라니아는 고사하지 않고 몸을 뒤로 젖혔다.
두 다리만 침대 밖에 내밀어 그에게 맡긴 채 팔은 몸 양옆에 편안히 두었다.
그레칸의 손이 발볼을 꾹꾹 눌렀다. 지압된 부분이 자극되면서 몸이 노곤해졌다.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그대로 내려놓은 그녀의 입술에서 평온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레칸의 예민하게 곤두선 귀가, 그녀의 숨소리를 잡아챘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자도 돼, 밀라니아.”
속삭이는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졸음이 반쯤 낀 작은 목소리로 ‘응.’ 하고 대꾸했다.
충분히 지압된 그녀의 발바닥은 충분히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원래도 그녀의 발은 부드러운 흙만 밟아 온 듯 말랑말랑했지만 지금은 수분을 머금어 한층 보드라워졌다.
그 하얗고 나긋나긋한 발에 입을 맞추고 싶어서, 욕망을 참느라 그레칸은 입술을 아프게 꽉 물었다.
대신 손끝이 한결 농밀해졌다. 발을 지나 발꿈치뼈를 어루만지고 올라간 손이 발목을 감쌌다.
손끝을 아래로 둬서 우아하게 튀어나온 발꿈치를 어루만졌다.
힘이 덜 들어간 손은 물을 머금어 촉촉해진 살결을 쓸어 올리기만 했다.
엄지손가락이 동그랗고 귀여운 복사뼈를 지긋하게 누르고, 동그란 모양을 따라 살살 움직였다.
복사뼈 위로, 흠집 하나 없이 투명한 발목의 살결이 만져졌다.
그레칸은 중독이 된 듯 깨끗한 피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밀라니아가 몸을 뒤척였다. 흠칫해서 엄지의 움직임을 멈추자, 잠에 잔뜩 취해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하거라. 이제 자야겠느니.”
침을 삼킨 그레칸이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응. 푹 자.”
오래지 않아 밀라니아의 숨소리가 보다 편하고 규칙적으로 변했다.
그녀의 기척과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 그레칸은 그녀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확신한 후에 족욕탕에서 그녀의 발을 꺼내었다.
미리 준비한 깨끗한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았다.
여전히 촉촉한 살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댔다.
으르릉. 흥분에 찬 숨이 가슴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레칸은 행여나 밀라니아가 그의 기운에 반응해 일어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발은 욕망을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탐스러웠다. 아니, 발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그에겐 욕망의 대상이었다.
곧게 뻗은 열 개의 발가락. 도톰하게 튀어나온 발꿈치. 보들보들한 흰 발과 미끈한 발등. 유려한 발목과 선이 고운 종아리. 약간 마른 허벅지와 낭창한 골반, 허리. 봉긋한 가슴…….
[나, 발정기인 것 같다.]
그날 이후, 그녀의 모든 것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음을 그는 부정할 수 없었다.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욕망이나 그녀의 부드러운 향기가 가슴을 자극할 때면 그 밤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명확히 깨달았다. 다른 여자들, 암컷, 여성체, 그들과 밀라니아와의 차이점을.
내 모든 것을 바쳐도 영광일 마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보드라운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 * *
“밀그렘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생명의 마법사라는 명성도 익히 들어 보았고요. 아가씨께서 그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선가 소문을 주워들었는지 표정이 한껏 살아 있었다.
“마녀.”
“예?”
“아가씨가 아니라 마녀라고 했느니라.”
“아, 네. 마녀님.”
당황한 성주가 냉큼 고쳐 말하자 밀라니아의 주름진 미간이 슬쩍 펴졌다.
“호족 망나니의 위세에 밀려 그간 하지 못했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치안대를 조직하여 고통받는 이들을 보호할 것이고, 비옥한 농토를 만들고 농사가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호족에게 짓눌려 쌓아 온 나약함을 벗어던지고 결심한 그에게 그녀는 농사짓기에 좋은 씨앗과 땅의 정화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
방으로 들어오자 그레칸이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깜짝 놀란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빼내었다.
“……?”
그녀보다 더 놀란 그레칸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빈손과 그녀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밀라니아는 헛기침을 했다.
그레칸은 빈손을 내려다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밀라니아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여기 있어. 내가 할게. 땅 정화하는 거랑, 씨앗 뿌리는 거. 당신 피곤하잖아.”
“그 정도로 피곤하진 않느니라.”
“거짓말.”
그레칸이 피식 웃자 밀라니아는 눈을 끔벅거렸다.
그레칸이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놀리는 표정인데 어쩐지 야릇했다.
“누구한테 맡길 수 있으면 맡기고 싶잖아.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제일 좋아하니까.”
그녀의 본심과 선호를 모조리 꿰뚫고 있는 그레칸이었다.
그레칸은 얇은 이불을 목 밑까지 끌어올려 주고, 조명이 되어 줄 초도 켰다. 그러고는 성의 하녀가 주전부리하라며 가져다준 간식 바구니도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둔 다음에 일어났다.
“갔다 올게.”
다정히 미소 지은 그레칸이 떠났다.
탁.
문이 닫혔다.
밀라니아는 눈을 번쩍 떴다.
힐끗 시선을 돌렸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곤혹스러워졌다.
이불을 올려 주는 손가락이 턱을 쓸었을 때 그녀는 몸이 굳어지는 걸 티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필이면 간밤 꾼 꿈이 떠올라 버려서.
‘그레칸이 나오는 꿈이라니 이게 무슨 망측한 일인고.’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간밤에 그가 발 마사지를 해 준 탓일까?
발바닥을 눌러 댔던 손가락, 느낌. 거기까지만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피로가 풀리는 그 느낌은 기분 나쁘지 않았으니.
그러나 꿈속에서 이어진 느낌은 피로가 풀리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살짝살짝 만지는 손길.
한낱 뼈에 지나지 않은 발목의 뼈가 민감해지는 느낌.
끄응, 신음을 삼킨 밀라니아가 몸을 옆으로 홱 돌렸다. 꿈속의 일인지 현실의 일인지 감각이 뒤죽박죽이었다.
그 손길을 떠올릴수록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까만 눈앞에 어둠보다도 새카만 그레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소중한 유리를 보는 듯 조심스러운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밀라니아는 침착함을 잃어버렸다.
‘문제로다. 성주의 가족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서 혼이 났지 않았느냐.’
이게 다 그레칸이 유난으로 굴었기 때문이다.
그의 조심스러운 행동, 짙은 눈빛, 다정한 말씨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 이제껏 어느 누구도 그녀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거대한 산봉우리처럼 대했지, 세게 쥐면 깨질 것 같은 뭔가처럼 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그랬지.’
그녀보고 약하다고. 그녀가 대마녀의 힘을 갖추고 있던 그때도, 당시 그레칸은 각성은커녕 힘이 미약했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약한 사람 대하듯 했다.
‘어이가 없어서 뒷목을 잡았느니라.’
하하, 웃음이 입술 사이로 흘러넘쳤다.
그레칸의 한결같음이 새삼스럽게 인식되자 기이하게 마음이 말랑해졌다.
그런 태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결과가 달라졌다.
번번이 일을 망쳤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썩 쓸 만하지 않은가.
‘그레칸은 원래 그랬지, 지금 새삼스럽게 이상해진 게 아니다.’
밀라니아는 반복해서 되뇌었다. 그럼에도 어수선한 마음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 *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난 줄 알았던 그날, 꿈을 꾼 이후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전처럼 편히 대할 수 없었다.
그가 다가오면 마음에 성에가 낀 것처럼 서걱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예나 지금이나 그레칸은 똑같다는 결론을 얻었는데도 말이다.
스스로도 당황스러워서, 그녀는 이유를 알고자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레칸은 그녀가 갑작스럽게 거리를 두는 일을 용납하지 못했다.
밀라니아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칸이 화가 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레칸?”
놀란 밀라니아가 몸을 일으키자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턱에 닿으려고 했을 때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빼서 손을 피했다.
그레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뭐 또 잘못했어?”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이다가 어물거렸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겠느냐.”
“근데 왜 피해?”
“피하는 게 아니니라.”
“아니라고?”
“내가 널 왜 피하겠느냐.”
“피했잖아.”
그레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손을 뻗는데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한 게 아니겠느냐.”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었잖아.”
“그런 일 없느니라.”
끝까지 잡아떼자 그레칸은 미심쩍은 눈으로 밀라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두고 볼 거야.”
“……시답잖기는.”
당혹한 심정을 숨기고 그녀는 흥, 코웃음을 쳤다.
* * *
저녁 시간이 되자, 방 안의 식탁은 음식으로 꽉 채워졌다.
호족의 망나니를 쫓아낸 당일의 만찬을 제외하고 성주 측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나쁘게 말하면 빈티 나는 수준이었다.
상공업이 형편없이 무너졌고 농사 역시 빌빌거리는 상황인지라 그들에게서 쥐꼬리만 한 세금을 거두는 영지의 재정 상태도 썩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밀라니아는 불만이 없었다. 원래도 사과 한 알이면 한 끼를 해결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두고 보지 않는 건 그레칸이었다.
어디서 갖고 온 건지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는 그의 품엔 음식이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오늘도 음식이 많구먼.”
밀라니아는 익숙하게 사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그레칸에게 손목을 잡혔다.
“그건 후식.”
그레칸이 다른 음식을 톡톡 치자 밀라니아는 눈을 찡그렸다.
“다 못 먹느니라.”
“한 입씩만 먹어.”
웃으면서 말하는 그레칸은 ‘그 정돈 먹을 수 있잖아.’ 하는 시선이었다.
밀라니아는 어깨를 으쓱이고 포크로 샐러드를 집으려고 했다. 그레칸이 그것도 빼앗아갔다. 밀라니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먹으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먹여 줄게.”
밀라니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됐느니라.”
“왜?”
“됐어.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게 좋다며.”
“내가 언제 그랬느냐?”
“백 년 하고도 십 년 전에.”
밀라니아는 황당해했다. 그런 적 없다는 표정의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그레칸이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 ‘밀라니아 님, 또 사과 하나로 식사를 때우신 거예요? 그러니까 체력이 약한 거예요. 수프라도 끓여 드릴 테니 드세요. 먹는 것도 귀찮으니라. 그렇다고 제가 먹여 드릴 수는 없잖아요?’ 이랬던 거.”
그레칸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주절거리는 내용에 밀라니아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목소리는 전혀 닮지 않았고 심지어 높낮이가 없는 음성이었는데도 머릿속으로 그때의 대화가 자동 재생되는 듯했다.
체라의 잔소리. 밀라니아는 끄응,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느냐? 징그럽도다.”
그레칸은 묘하게 웃었다.
“그것뿐인 줄 알아? ‘이제는 씻는 것도 귀찮구나’라고 한탄했던 거, 기억 안 나?”
얼굴을 굳힌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일없느니라.”
“쳇.”
그레칸이 포크로 샐러드를 집어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목욕 시중 얘기를 다시 한번 꺼낼까 봐 밀라니아는 얼른 입을 열어 샐러드를 씹었다.
그레칸은 세심하게 식사 시중을 들었다. 온갖 좋은 재료를 넣어 만들었다는 수프를 스푼으로 뜨고는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댄다.
흘릴까 봐 손을 받치고 바짝 가까워진 그를 보고 밀라니아는 어깨를 움찔 굳혔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거늘.’
좁혀진 거리가 어색하여 몸이 굳기는 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두고 보자고 엄포를 놓았던 그레칸이었다. 그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피하는지 안 피하는지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밀라니아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밀라니아.”
수프가 목 안으로 넘어갔다.
몸에 좋은 재료를 다 넣었다는데 딱히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미한 수프를 꿀떡 삼킨 밀라니아는 빤히 쳐다보는 그레칸의 시선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밀라니아.”
“왜 자꾸 부르느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레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이 마주쳤다. 밀라니아가 입을 달싹이는 순간, 그레칸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레칸의 입술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마치 키스할 것처럼.
당황한 밀라니아의 눈이 확장되었다. 그레칸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말을 하다가는 입술이 닿을 것 같아 밀라니아는 뻣뻣해진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긴장되어 굳은 밀라니아를 그의 새카만 눈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 뭐 하는 것이야?”
밀라니아는 당황했다. 정말로 당황했다.
몇 번 누군가와 입을 마주친 적은 있지만 손끝과 손끝이 마주치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레칸의 느린 숨결과 곧 닿을 듯한 입술이 그녀의 가슴을 두방망이질 쳤다.
그를 밀어내려는데, 그레칸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뺨과 입술 사이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살결. 손끝이 아니라, 입술의 나긋나긋한 살결.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밀라니아를 와락 껴안았다.
“사랑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가슴이 뛰었다. 혹여 그레칸이 그녀는 어떠하냐고 마음을 물을까 봐 긴장이 되어서였다.
그렇게 묻는다면, 밀라니아는 아무것도 해 줄 말이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레칸은 그녀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만 고백했다.
사랑해. 사랑해. 속삭이는 목소리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그래서 귓가에 더 단단히 박혔다.
언젠가 했던 그의 사랑 고백보다 훨씬 더 깊숙하게.
맥박이 뛴다. 입술과 뺨 사이.
그레칸이 껴안은 어깨, 목, 등.
목소리가 닿은 귓바퀴, 귓불.
닿을 듯 말 듯 한 뺨에도, 맥박이 뛰었다.
‘이상하구나. 이런 상태는…….’
[저를 가누지 못하겠어요. 심장이 조여들고 눈앞이 환해지고, 그저 그 사람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때 알았어요. 아, 내가 사랑을 하고 있구나.]
[사랑이란 그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친밀한 접촉에 불편함보다 가슴이 떨리도록 행복해지죠.]
[사랑을 알아보고 계신다더니, 저한테까지 오신 거예요? 음, 저는 말이죠.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심장이 두 배로 빠르게 뛰어서, 온몸에서 피가 빠르게 돌고 평소에 있는지도 몰랐던 맥박 뛰는 소리가 났어요. 아주 예민해지죠. 저도 한 번밖에 겪어 보지 않아서, 다른 건 모르겠어요. 도움이 되었을까요, 밀라니아 님?]
맥박이 뛴다.
밀라니아는 황급히 자신을 관조했다. 영혼이 흔들리고 있었다. 심신이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첫 번째는 무한 회귀의 반복 끝에 그레칸을 보았을 때, 분노가 그녀의 영혼을 흔들었다.
두 번째는 지금.
지금이었다.
그레칸이 얼굴을 뗐다. 그를 보는 밀라니아의 얼굴이 혼란에 젖어갔다.
‘내가, 너를?’
그레칸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왜?”
밀라니아는 목 졸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녀는 손가락을 움찔했다. 마음 가는 대로, 무심코 그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사락,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레칸의 뒷목이 빳빳해졌다.
“어디 아픈 게냐?”
“왠지, 방금 무지하게 행복한 느낌이었어.”
그레칸이 웃었다. 사랑스럽게. 밀라니아는 다시금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행복하다니.
* * *
다음 날, 밀라니아와 그레칸은 다른 마을로 떠날 준비를 했다.
벌컥.
문이 열리고 들어온 성주의 손에는 갈색의 가죽 주머니와 포대가 들려 있었다.
“벌써 준비를 마치셨군요. 이거 가지고 가십시오. 약소하지만 물과 요깃거리를 챙긴 겁니다. 이동하실 때 유용할 겁니다.”
그레칸은 사양하는 시늉도 없이 포대와 가죽 주머니를 받아 허리춤에 찼다.
성주는 아쉬운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별로 대접한 것도 없는데 이리 보내 드리려니 마음이 안 좋군요.”
“제일 좋은 방에서 잘 쉬었다네.”
밀라니아의 대답에 기쁘게 미소 지은 성주가 “아.” 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밀그렘 측에서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밀그렘에 은밀히 후원을 약속하는 전서를 보냈거든요.”
“다리를 만들고 있다고 하더군요.”
“다리?”
“예. 1대륙과 2대륙을 잇는 다리 말입니다.”
성주는 소식을 받았을 때의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연신 감탄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란젤에게서 직접 얘기를 들었던지라 밀라니아는 딱히 놀라지 않았지만 공사를 착수했단 소식이 흥미롭기는 했다.
“시작 단계긴 하지만 숙원 사업이 될 거라 토대를 다지고 있다고 합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궁의 눈치가 요즘 수상하다고 해서요. 저도 좀 조심스럽게 움직일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도망간 켄치가 걱정스럽기는 합니다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밀라니아가 물었다.
“그곳이 어디라고 하더냐?”
* * *
성주가 일러 준 곳은 성에서 꽤 먼 곳이었다. 그러나 마력과 체력이 무제한인 그레칸이 있어 거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오랜 비행은 그저 안겨 있기만 해도 부담이라, 바람에도 지칠 수 있다는 그레칸의 성화에 밀라니아는 망토로 몸을 두른 채 이동해야 했다.
도착한 곳은 과거에 선착장이었던 곳이었다. 지금은 버려져서 폐허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는데, 바로 그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거대한 바위가 책상 역할을 했고 버려진 배의 갑판을 뜯어내어 대충 만든 의자가 앉을 곳이 되었다.
책임자인 스미스는 그레칸과 밀라니아를 보고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
“이 사람들은 저희가 양성해 온 기술자예요. 저도 만드는 데 조금의 재주가 있어 이곳으로 오게 된 거고요.”
“너무 이른 게 아닌가?”
밀라니아는 황량한 선착장을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어요. 지금 저희가 여기 있는 건, 사전 답사라고 할까요. 여기다가 다리를 세우는 게 좋겠다. 그러면 어떻게 다리를 세울 건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이니 우물통 기법을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뭐 이 정도의 논의만 하는 중이에요.”
“내가 그란젤에게 언질을 둔 게 있느니라. 다리를 만들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예, 알고 있어요.”
스미스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인적 드문 곳으로 안내했다.
예전에는 선원들의 쉼터로 쓰였던 건물은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화톳불을 피워 두어서 나름 쾌적했다.
“워터드래곤과 1대륙과의 교역, 협상은 당연히 해야 할 문제.”
스미스는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총수께서는 일의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워터드래곤과 1대륙의 문제는 황궁의 나태한 수장들을 쓸어버리는 게 우선입니다.”
여기서 그레칸을 한 번 흘끗한 스미스는 그레칸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안심하며 설명을 다시 시작했다.
“아무리 평화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나 황궁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번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 말이에요. 그 일 이후에 모든 계획된 일들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다리에 대한 건.”
스미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수장께서 가만히 있기엔 좀이 쑤신다고 하시기에 조금 이르지만 천천히 진행하려고 하는 거고요.”
조금 민망한 듯 스미스는 방금의 진지한 태도와 다르게 헤실거렸다.
“짧은 새 많이도 변했구먼.”
다소 신기하다는 밀라니아의 어투에 스미스가 어리둥절해했다.
“자신감 없던 태도가 싹 바뀌었어.”
“아, 그건…….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다 마녀님 덕이죠.”
스미스가 밀라니아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슬쩍 인상을 쓴 그레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미스 님! 스미스 니임!”
바깥을 힐끗한 스미스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다.
“아, 일이 생겼나 봐요. 잠깐 나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쉬고 계세요. 이따가 저희가 구상한 다리 도면, 꼭 봐 주셔야 합니다.”
스미스가 나가고 그레칸이 몰이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다리가 만들어지기를 원해?”
“상생의 다리 말이냐? 지켜봤으니 알지 않누.”
“당신이 흥미를 갖고 있다는 건 알지. 하지만 천 년이 넘게 떨어져 있었던 두 대륙이야. 뭐 하러 이으려고 해?”
“내가 이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숙원 사업이라지 않느냐? 두 대륙을 왕래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소망이 그란젤의 생각을 움직인 것이니라.”
그레칸은 바닷바람을 맞아 흐트러진 그녀의 거미줄처럼 얇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인간은 저들과 다른 존재를 배척하는 존재들이야. 그들 역시 동물이고 짐승이면서, 다른 수인들보다 월등히 배타적이지. 심지어 자기들끼리도 밀어내고 배제하니, 말 다 했지.”
그레칸은 무표정했다.
“나를 경계해서라도 당분간은 손잡고 조화로운 척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백 년? 이백 년? 아마 천년은 가지 못할 거야.”
“회의적이구나.”
잠깐 생각한 밀라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틀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인간은 빨리 발전하고, 그들의 발전은 자연을 이용하고 억압하는 방식이니, 수인들 또한 노예로 부릴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들에겐 스스로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욕구가 있어. 율령을 만들고 법을 세우고 체제를 확립하고. 극으로 치닫지 않게 자정할 것이야.”
“…….”
“그들이 자연을 망친다 한들 그들 또한 자연의 일부이니라. 난 그저 지켜볼 뿐.”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머리카락 사이에 낀 반쯤 잘린 낙엽을 떼어 냈다.
“나는 바람 하나 맞지 못하게 하면서 너는 나뭇잎을 달고 다니는구나.”
슬쩍 웃는 밀라니아의 미소에 그레칸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거, 백 개쯤 끼어도 상관없어.”
그녀는 그레칸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어쨌든 난 네가 망쳐 놓은 대륙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고 싶을 뿐이니라.”
“…….”
“남은 일은 앞으로 이 대륙 위에서 살아갈 그들의 몫이지.”
고개를 끄덕인 그레칸의 시선이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모자를 가지고 올 걸 그랬네. 바닷바람이 거칠고 습해서, 벌써 머리카락이 엉켰어.”
그레칸은 한 올 한 올, 밀라니아가 아프지 않도록 엉킨 머리카락을 분리해 냈다.
세심한 눈빛을 머리카락에 고정한 그레칸을 보며 밀라니아는 혀를 내둘렀다.
‘또 그러는구나.’
맥박이 뛰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손가락이 스쳐 지나가는 귓바퀴와 관자놀이였다.
어리고 천방지축인 이미지가 이제는 떠오르지 않아서, 밀라니아는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얼굴은 다른 것이 없는데 느껴지는 건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다른 사람이다.
‘사랑’을 설명하는 수많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사랑을 알게 됐다는 증거였다.
세상에 둘만 남은 기분.
그때였다.
완벽히 격리된 듯한 공간에 소음이 끼어들었다.
“무슨 짓이냐!”
무슨 일인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밖으로 나가자 긴장된 분위기가 팽배했다. 스미스와 기술자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스미스 일행과 대치하고 있는 자들. 자신만만한 표정에 입은 비열하게 올라가 있었다.
숨기지 못한 풍성한 꼬리털이 하늘을 향해 빳빳하게 곤두섰다.
“호족이구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갈색, 하얀색, 검은색 깃털 날개를 펼친 조인족이 창칼을 들고 스미스 일행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호족 무리의 전면에 선 남자가 스미스를 가리키며 캉캉거렸다.
밀라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얄쌍한 턱과 간사한 눈매. 성주가 말했던 켄치라는 그놈인 듯한데.’
“분명히 이들이 나리들이 찾으시던 반란 종자들입니다! 팍시무테 성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했어요. 이놈들이랑 연통을 주고받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지면에 가까이 내려온 조인족 전사가 상황을 가늠하고 있었다.
“여기 모여 뭘 하고 있었던 거냐!”
그는 창으로 인간 하나를 인질로 잡고 위협하고 있었다.
스미스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저희는 물고기를 잡아 하루 빌어먹고 사는 이들입니다. 배를 복구하여 바다로 나가면 고기가 더 잘 잡히지 않을까 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고요. 저분은 저희를 오해하고 계십니다.”
“낚시? 그런 것치고 낚싯대나 통발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켄치가 빈정거리자 스미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목적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하칸 님이 새로이 제정하신 ‘제2대륙 규칙’을 모르는가? 교활한 인간은 열 명 이상 무리 지을 수 없다.”
켄치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웃음이 퍼졌다. 조인족 전사가 손짓했다.
“다 잡아들여.”
즉각 전사들이 움직였다. 인간들도 가만히 잡혀 주지는 않았다.
“도망쳐!”
스미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술자들이 다리를 놀렸다.
방금까지 우왕좌왕했었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지체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인족 전사들은 날개라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있었다.
쌩.
“으악!”
“도망가! 도망!”
황량했던 선착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레칸이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
밀라니아가 답하기도 전에, 그레칸이 그늘 밖으로 나갔다.
밀라니아가 뭐 하냐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뻔해. 당신은 다리가 완성되길 바라잖아.”
그러고 그는 만류할 새도 없이 소란스러운 현장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