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48)

45

희생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다소 들떠 있었다.

그의 들뜸이 확 옮겨져 와 밀라니아는 그에게서 손을 거두고 어색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피곤해서 자야겠느니.”

밀라니아는 정말 피곤하다는 듯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지만, 그레칸이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신체 부위 어디 하나 닿은 곳 없건만 온몸에 맥박이 뛰는 것 같았다.

“푹 쉬어, 밀라니아.”

침대가 가볍게 출렁거렸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문에서 몸을 반대로 돌려 누웠던 밀라니아의 잇새에서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심장이 파르르 뛰며 한숨이 샌다.

“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느니.”

꼬리를 흔들며 술수를 부리는 여우를 보는 기분.

수 초간 빠르게 숨을 내쉬던 밀라니아는 몸을 굴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끼익.

발 딛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걸음이 이어졌다.

‘그레칸인가?’

밀라니아는 여전히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귀를 기울였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레칸은 아니었다. 어깨가 좁은 왜소한 소년이 신중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마에 세 번째 눈이 달려 있는, 황궁의 심부름꾼 거미족이다.

은쟁반을 들고 신중하게 걸어오는 소년의 얼굴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누가 보면 디저트가 아니라 귀한 보물을 옮기는 듯하다.

‘아, 초콜라떼를 갖다 달라 말했었지.’

그레칸 때문에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소년이 들고 있는 은쟁반 위에는 초콜라떼를 담은 아름다운 채색 유리잔이 있었다.

몸을 일으킨 밀라니아는 베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청년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걸 지켜보았다.

마침내 느리게 침대까지 다가온 청년이 그제야 저를 바라보는 밀라니아를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얼굴을 붉힌 그가 공손히 은쟁반을 내밀었다.

“밀라니아 님, 초콜라떼입니다.”

“고맙다.”

간단한 치하의 말에도 청년의 얼굴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오늘은 특별히 주방장님이 생크림까지 올려 주셨어요. 부드러운 풍미가 느껴질 테니 맛보시고 나쁘지 않다면 앞으로도 생크림을 올려 드리겠대요.”

“오, 기대가 되는구먼.”

초콜라떼의 먹음직스러운 외양과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하고 짙은 향내. 입맛이 당긴다.

밀라니아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러다가 중독이 될까 걱정이 되는군.’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이 음료 때문에라도 아쉬움이 남을 듯했다.

황궁을 떠난다. 그 전에 우선 하칸을 만나 봐야겠지만.

‘기실 황궁의 실질적 책임자는 하칸이니라. 그란젤은 마뜩잖아해도, 일단 만나 봐야 화합이 가능한 상대인지 가늠할 수 있지 않겠는고.’

밀라니아는 고심하며 분홍빛 도는 채색 유리잔에 입술을 댔다.

지나치게 평온한 요즘.

만인에게 공평한 죽음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그녀가 그 새삼스러운 진리를 깨달은 건, 부드러운 음료가 지독한 단맛으로 혀를 마비시키고 목구멍으로 넘어갔을 때였다.

‘아?’

설핏, 밀라니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쿨럭.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까맣게 변해 가는 피. 사혈이었다.

곧이어 입 주변이 비릿한 핏물로 범벅되었다.

두근.

심장이 순간적으로 크게 부풀었다가 쪼글쪼글 오므라들었다.

고작해야 한 모금 마신 초콜라떼.

손이 의지에서 벗어나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갔구나.’

그것도 지독하게 부정한 기운이.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잠시.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격통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뻣뻣해진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이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떨어지는 채색 유리잔을 저도 모르게 붙잡은 시종이 비명을 질렀다.

“밀라니아 님!”

쿠당탕.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발칵 열렸다.

“네 이놈, 네가 감히 이런 무도한 짓을!”

시의적절하게 나타난 조인족 전사가 검을 빼 들었다.

“밀, 밀라니아 님!”

시종은 전사의 위협적인 기세도 눈치채지 못하고 쓰러진 밀라니아만 부르짖었다.

조인족 전사는 그에게서 잔을 빼앗고 들고 있던 검으로 가느다란 목을 그었다.

피 분수가 뿜어졌다. 눈 뜬 채 죽은 시종이 쓰러졌다.

마지막까지도 밀라니아를 걱정하는 얼굴 그대로.

“밀라니아 님, 괜찮으십니까!”

우렁우렁한 고함이 아스라해진 그녀의 감각으로 스며들 듯 새어 들어왔다.

그녀에게서 답이 없자 긴급했던 전사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과연, 말씀하신 대로 약효가 빠르군.”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 전사가 창문을 열었다.

촤악.

잔 안의 음료를 버리고 잔은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산산조각이 난 잔을 꼼꼼히 확인하고 돌아온 조인족 전사는 밀라니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태를 살피는 눈빛이 냉정했다.

쿨럭.

핏발이 선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터져 나왔다. 소름 끼치는 꼴이다.

움찔. 전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얼떨결에 그녀를 밀쳐 냈다.

쿵.

바닥에 처박힌 밀라니아의 몸이 축 늘어졌다.

* * *

말란도르는 개구멍을 통해 흑계를 빠져나와 바다를 건넜다.

‘별일 아닐 거다. 그럼. 그 밀라니아인데.’

그럼에도 속도가 자꾸만 빨라졌다.

그의 기운은 살아 있는 생물에겐 독과 다름없는 사기(死氣).

충성심 엇나간 권속이 그레칸에게 독을 쓴다면 차라리 낫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 옆에 그녀가 있으면. 그녀에게는 한 방울도 치명적일 것이다.

아무리 속도를 내도 초조함이 가시지 않아서, 2대륙에 도착한 직후부터 말란도르는 공간을 뛰어넘었다.

마력과 체력의 소모가 큰 이동 방법이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넌 내가 언제 죽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살아 돌아와 놓고 벌써 죽음을 얘기해? 진짜 밀라니아 너는…….]

[내가 부정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니라.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어. 어떻게 보면 나는 세상의 인과를 벗어난 몸이니라. 정해진 수명에서 벗어났는데 난 아직 그 이유도 몰라. 그러니 끝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 너 또한 오래 살아온 존재. 네 의견이 궁금한 게야.]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하지만 너의 죽음은 네가 인과에서 벗어난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야. 그 이유가 사라진다면, 죽음과 맞닿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왜 지금 그때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는 것일까.

막 심은 듯 단단하지 못한 땅에 심긴 나무가 간신히 피워 낸 꽃이 그의 몸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보이는 황금색 황궁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란도르는 거칠게 공간을 뛰어넘었다. 남은 거리가 훅 줄어들었다.

‘밀라니아, 부디 무사해 줘.’

굳건히 닫힌 정문을 앞에 둔 말란도르는 크게 발돋움을 하고 몸을 띄워 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땅에 착지하여 살펴보자, 문 안쪽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불온한 기운이 감돈다.

얼굴이 굳어졌다.

“빨리, 빨리 움직여!”

“의사아!”

“이쪽입니다.”

몇 명의 시종들이 한곳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궁 중에서 그 높이가 월등히 높은 중앙의 궁전이었다.

흰옷을 펄럭거린 나이 지긋한 인간들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을 본 말란도르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더없이 불길했다.

* * *

흰 침대보가 피에 물들어 있었다.

쿨럭거리며 경련하는 그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레칸은 또 악몽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 꾸든 끔찍하고,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악몽.

그러나 꿈속과 달리 눈앞의 밀라니아는 진짜였다.

그녀에게서 전해져 오는 피비린내와 약한 숨결, 헐떡이는 고통스러운 호흡까지 모두, 진짜였다.

“하, 하이로드. 도저히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원인을 알아보려고 해도, 손을 대면 모두 쓰러져 버립니다.”

“원인도 알 수가 없어요. 다, 다 죽어 버렸습니다. 가까이 갈 수조차 없어요.”

황궁의 시종장직을 맡고 있는 여우족은 귀신에 홀린 얼굴로 입술을 떨어댔다.

그레칸이 크리스털 방의 여자에게 목맨다는 사실은 황궁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는 사실이었고 그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급한 불은 꺼 보자는 생각이었다.

매우 재빨랐지만 그럼에도 한발 늦었다.

아득한 정신을 긁어모으며 그는 한마디 뱉었다.

“원인을 알기는커녕, 손만 대면 죽고 있어요. 여기서 나가셔야 해요.”

그레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주위로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진 사람들이 즐비했다.

심지어 피를 치우다가 죽은 듯, 시종 하나는 바닥에 피를 토하고 죽어 있었다.

“범인은 이 시종인 것 같아요. 제 수하들을 풀어 속히 배후를 색출하겠습니다, 하이로드.”

목이 잘린 시종을 세심히 살펴본 하칸이 전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레칸의 분노가 무서워 벌벌 떠는 호족과 눈치를 보며 그를 살피는 하칸의 시선을 모두 무시한 그레칸은 밀라니아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피가 시트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가.”

“예?”

“다 나가라.”

버석거리는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하칸이었다.

그가 꽁무니가 빠지듯 도망가자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떨던 사람들도 줄지어 방을 빠져나갔다.

그레칸은 굳은 몸을 움직여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부터 검은색 연기가 스며들어왔다.

검은색 연기는 성인 남성 크기만큼 쌓이더니 이내 말란도르가 되었다.

“이렇게 보게 되어서 유감이야. 시간이 없으니 내가 알아낸 걸 빨리 말하지.”

그가 까맣게 말라죽은 담쟁이넝쿨을 들어 보였다.

“이 건물 벽면에 검은 액체가 말라붙은 흔적이 있다. 맛을 보니…… 내 독이 섞였다.”

“…….”

“벽면을 휘감고 있던 식물은 말라 죽었어. 밀라니아는, 독을 섭취한 거야.”

“……독?”

수십 년 만에 만났지만 형식적인 인사도, 진부한 분노도 없었다.

지극히 건조하고 삭막한 분위기로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았다.

“밀라니아가 마신 음료엔 내 기운, 정확히 말하면 내 진원의 피가 섞여 있었어. 밀라니아에겐 극독이지.”

밀라니아의 진원이 어떤 병이든 치료하는 치료제라면 말란도르의 진원은 어떤 것이든 죽일 수 있는 지독한 독이었다.

“밀라니아에겐 치유력이 있다.”

“내 피는 해독할 수 없을 거야. 그녀와 난 상극이니까.”

“…….”

“곧…….”

창백한 얼굴로 말란도르가 목소리를 쥐어짰다.

“죽을 거야.”

“닥쳐.”

즉각 반응한 그레칸이 이를 드러냈다.

그는 붉게 물든 침대에 앉아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큼직한 손에 진득한 피가 만져졌다. 맑은 선홍색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검붉은 피였다.

밀라니아가 몸을 떨었다. 그녀의 진동이 그에게 전해져 왔다. 그레칸의 손도 덜덜 떨렸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가슴이 극심하게 아팠다.

그녀의 경련하는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밀라니아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나의 그녀가, 나의 밀라니아가 아파하고 있다.

말란도르는 초조했다.

“시간이 없어. 내가 붉은 꽃을 찾아올 테니까…….”

“소용없어.”

가시 돋친 목소리.

“뭐?”

밀라니아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레칸이 말했다.

“이미 붉은 꽃을 사용했으니, 더는 듣지 않을 거다.”

‘아’ 하고 말란도르가 신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목소리를 쥐어짜 내는 말란도르를 쳐다보지 않은 채 그레칸이 밀라니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방법은 있다.”

“…….”

말란도르는 입을 다물고 그레칸을 응시했다.

그레칸은 피투성이인 밀라니아의 입술에 경건히 입을 맞추었다.

검붉은 피로 덮인 그녀를 어루만지고 소중한 듯이 끌어안는 그의 모습엔 이상한 광기가 엿보였다.

말란도르는 마른 목을 움직였다.

“무슨 생각이야?”

“내가 붉은 꽃을 사용해 밀라니아를 살렸지.”

“……!”

“그리고 다시 한번 살릴 거야.”

“이봐, 그레칸.”

“밀라니아의 고통. 그것도 내가 가질 거다.”

고개를 든 그레칸이 말란도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란도르는 흠칫했다.

그녀의 피가 묻어 붉게 변한 얼굴, 감정 없는 검은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번뜩였다.

파괴욕밖에 남지 않은 절대자.

100년 전에 자신의 왕을 찢어발기던 괴물 같은 모습이 떠오른 말란도르의 등줄기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레칸이 여상히 한마디 했다.

“너도 나가.”

탁.

문이 닫혔다.

둘밖에 남지 않은 방은 생명이 빠져나간 시체와 쏟아지는 피밖에 없었다.

열린 창밖으로부터 뭣 모르는 멧비둘기가 지저귀는 소리가 흘러들어온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심장에 뺨을 댔다. 심장을 덮은 갈비뼈와 피부에 귀가 밀착되었다.

쿵, 쿠웅, 쿠우웅. 심장 고동이 점차 미약해진다. 시간이 없다.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레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촘촘한 근육을 지나고 피가 쏟아지는 혈관, 심장을 감싼 유선형의 갈비뼈를 넘어서자 커다란 심장이 나타났다.

심장을 칭칭 감고 있는 황금빛 실. 가늘지만 결코 끊을 수 없는 황금의 실이 심장을 쇠사슬처럼 붙들고 있었다.

황금 실은 심장을 묶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딘가로 이어졌다.

그레칸은 조심스럽게 실을 따라갔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실을 따라 가자 심장 하나가 더 나타났다. 이 심장은 자신처럼 커다랗지 않았다.

손 하나로 가려질까 말까 한 심장은 한구석이 쪼글쪼글한 상태였다. 뿜어내는 피는 검붉었고, 병마에 잠식되어 스멀스멀 검은 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레칸은 천천히 심장으로 다가갔다. 심장은 죽어 가고 있었다.

서서히 사그라지는 심장 고동이 안타까웠고,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견디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심장과 그녀의 심장을 이은 황금색 실. 가운데 네모난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문 역시 찬란한 황금색이었다. 그레칸은 문고리를 붙잡았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거야.’

이 문 너머에 밀라니아의 고통이 있다. 붉은 꽃이 흡수되고 사라져 대신 생긴 것.

이것이 바로 그녀와 자신을 연결하는 매개였다.

생명체라면 누구든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레칸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생명체의 본능이 이 문을 열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칸은 빗장을 열었다. 미약한 본능의 부르짖음을 물리치고, 오히려 더 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활짝 열렸다.

솨아아아아!

검고 붉은 안개로 가득 찬 내부가 그레칸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더 넓은 공간을 갈망하면서 고통스럽게 날뛰고 있던 그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왔다.

눈을 감은 그레칸의 피부 위로 핏줄이 팽팽하게 올라섰다.

불룩불룩 튀어나오는 핏줄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부에서 그레칸은 문고리를 꽉 붙들고 있었다.

밀라니아의 속에 갇힌 이 고통이 모두 토해져 나오기 전에는 닫지 않을 생각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가락 마디가 사납게 불거졌다.

그레칸은 자신에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고통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그레칸의 몸은 밀라니아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눈 감은 그의 얼굴 피부 가죽이 경련했다. 팽팽해진 핏줄이 하나, 둘 터져 핏줄기가 만들어졌다.

마주 잡은 손에서 피가 꾸물꾸물 새어 나왔다.

그레칸의 몸이 붉어질수록, 밀라니아의 얼굴은 점차 평온해졌다.

* * *

깨끗하게 정돈된 방. 커다란 창문을 통해 햇빛이 스며들었다.

 달 사이 크게 조성된 정원에 새로 심어진 나뭇가지에는 노란 솔새 한 마리가 내려앉아 부리로 깃털을 골랐다.

나뭇잎을 쪼며 지저귀는 새소리가 누워 있는 밀라니아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누군가 일어나 창문에 커튼을 쳤다.

햇빛이 가려졌다. 한층 어두워진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밀라니아의 눈꺼풀이 슬며시 뜨였다.

고개를 미약하게 돌린 그녀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억지로 보려고 하지 마. 눈에 초점 잡기가 힘들 거야.”

나지막한 충고.

밀라니아는 어쩐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나는 불편한 손을 움직여 눈에 올렸다. 힘주어 눈을 꾹 누르고 떼어 냈다.

흐릿한 시야가 조금 또렷해졌다.

“눈에서 피가 많이 났어. 눈동자 색이 약간 빨갛게 변했는데, 걱정하지 마. 몸이 회복되면서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고개를 끄덕였다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말란도르?”

“어, 나야.”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말란도르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설마 왜 왔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장난스럽게 말한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의 멍한 얼굴이 그대로이자 미소를 거두었다.

손으로 이마를 긁적이는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일단 사과할게. 내가 내부 단속을 잘 못 해서……. 혹시 일이 생길까 막으려고 온 거였어. 결과적으로 늦었지만.”

“내가 마신 건 역시 흑계의 기운이었구나. 하나 그렇다 치더라도 지나치게 어둡고 악랄했다.”

“그야 그렇겠지. 그건 내 진원이니까.”

한 손으로 눈을 가린 밀라니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원이라 하면 한 생명의 가장 근원적이고 강한 기운.

죽음을 관장하는 말란도르의 진원이라면 죽음에 가장 가까울 터.

“권속이 위험한 짓을 했어. 그레칸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독을 손에 넣은 놈이 그걸 너에게 쓴 거고.”

“…….”

“죽었을 거야, 너.”

“그렇겠지. 이 목숨이 참으로 질기기도 하구나. 그런데도 살아 있다니.”

밀라니아는 몸을 일으켰다. 말란도르가 만류했지만 손을 들어 거절하고 방을 훑어보았다.

낯설다 했는데, 크리스털 방이 아니었다.

“그레칸은 어디 있느냐?”

말란도르를 쳐다보자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잠시 후.

밀라니아는 황급히 이불을 젖혔다. 말란도르가 간곡히 만류했다.

“너 더 쉬어야 해, 밀라니아. 일반적인 사기도 아니고 내 진원에 당했어. 다시 쓰러지고 싶어?”

“그레칸에게 가 봐야겠다.”

답답한 표정으로 말란도르가 소리쳤다.

“어딜 간다는 거야. 걔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그가 황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놓거라!”

밀라니아가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말란도르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가 봐야 할 수 있는 거 없어.”

“나의 치유력이라도 쓸 것이야.”

“안 통해.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놈이야. 네 몸만 축나.”

“비키거라. 가야겠으니.”

밀라니아의 앞을 가로막은 말란도르는 차분하지만 싸늘한 시선을 받고 주먹을 쥐었다.

“어디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놈이야. 진즉 치료사에게 갔겠지. 아직도 여기 있을 것 같아?”

잠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본 밀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 있다.”

“…….”

“여기 있어. 그레칸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평온하지만 어딘지 이질감 느껴지는 고동.

결국 말란도르를 물러나게 한 밀라니아는 황궁의 복도를 거침없이 걸어갔다.

한 발 뒤에서 말란도르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쫓았다.

밀라니아는 층계를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 층에 멈추어 섰다.

잠깐 서 있던 그녀가 오른쪽 복도로 정확히 몸을 돌렸을 때, 말란도르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빠르게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그가 바싹 따라붙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레칸이 느껴지는구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어.”

말란도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그랬던 거야?”

“아니,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밀라니아는 불안했다. 그레칸은 보이지 않고, 심장의 이질감은 기묘해서, 꼭 불길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이윽고 밀라니아가 멈춘 곳은 익숙한 방문 앞이었다. 보석의 문양이 아름답게 새겨진 크리스털 방이다.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던 밀라니아가 멈칫했다.

“왜 이렇게 조용한 게냐?”

밀라니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텅 빈 복도를 훑었다.

분명 아래층만 해도 지나다니는 시종들이 있었는데 여기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폐쇄된 층처럼 고요하다. 그게 스산했다.

“이 방에서 벌써 다섯 명이 죽어 나갔는데. 아무도 얼씬 안 하는 게 당연하지.”

냉랭한 얼굴로 말란도르가 손으로 문을 턱 막았다.

“들어가지 마, 밀라니아.”

“…….”

“위험해.”

진지한 눈이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해독되지 않은 독이 잔존해 있을 거야. 그 괴물 같은 놈도 이 지경인데……. 너는 더 안 돼. 그놈이 무슨 짓을 해서 널 회복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노력을 수포로 돌릴 셈이야?”

“…….”

밀라니아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말란도르는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뭐야. 설마 너, 지금이 죽을 기회라고 생각해?”

밀라니아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왜.”

말란도르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밀라니아는 차분히 설명했다.

“지금은 그 무엇도 날 위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터무니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체념했어?”

황당하다는 뉘앙스에도 밀라니아는 침착하게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장난기 하나 없는 태도에 표정이 변한 말란도르가 입술을 축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

이 가슴 안에 있는 심장이 이상하다. 뻥 뚫린 기분이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치닫는다.

“그레칸이 내게 뭔가를 하고 갔어. 뭔가를…….”

가느다란 줄을 튕기는 듯한 불길한 감각이 뇌리를 꿰뚫었다.

밀라니아는 지체 않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앞을 가로막으려 했던 말란도르는 곧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위험하면 곧장 데리고 나올 거야.”

죄다 커튼이 쳐진 방은 어둑어둑했다. 햇빛을 차단해서 그렇다.

그러나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가 일어났던 방보다도 어두운 기운이 풍기는 듯했다.

흑계의 기운이 방 전체에 음침하게 깔려 있었다.

‘숨 쉬기가 힘들다.’

밀라니아의 시선이 침대로 가 꽂혔다. 그녀의 침대에 그레칸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밀라니아는 미끄러지듯이 침대로 다가갔다.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죽음과 고통의 냄새였다.

하얗던 침대는 까맣게 보일 정도로 색이 짙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밀라니아는 생생한 선혈, 그리고 말라붙은 피 냄새를 맡았다.

까맣게 보이는 것은 피가 말라붙었기 때문이었다. 그 위로 새로운 피가 흘러내렸다.

밀라니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레칸을 찬찬히 살폈다. 언뜻 보기에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였다.

손을 내저었다. 바람이 불어 커튼을 젖혔다. 빛이 그레칸의 위로 흘러내렸다.

‘이 꼴은…….’

경악한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피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피부의 작은 단위 하나하나가 뒤틀리고 있다.

온 근육과 세포와 신경이 하나하나 경련하고 있는 그레칸의 육신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징그러웠다.

곧 그녀는 이것이 단지 몸이 경련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재생되고 있어?”

밀라니아의 떨리는 목소리에 말란도르는 굳은 얼굴로 한발 물러섰다.

그레칸을 향한 그의 눈은 흡사 괴물을 바라보는 듯했다.

“분해와 재생을……. 반복하고 있구나.”

마침내 밀라니아는 그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정확히 꿰뚫었다.

상의를 걸치지 않은 그레칸의 어깨.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리며 오므려졌다가, 까매지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리고 방금과 같은 일을 반복한다.

온몸이 분해되고 구성되고, 분해되고 구성되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생명체였다면 진즉 사라져 없어졌겠지.”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차가웠다.

“나는 아무래도 그레칸을 좋아할 수 없어. 내 권능에 이렇게 저항하는 놈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그레칸이 죽어 가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냐?”

“죽어 가고 있지. 내 진원이 흡수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레칸의 몸엔 내 진원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으니까.”

말란도르의 입가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렇게 된 이상 아무리 그레칸이라도 죽음을 피할 순 없지. 하지만.”

말란도르가 시선을 그레칸에게로 옮겼다.

“저놈의 가공할 회복력이 죽음에 저항하고 있는 거야.”

말란도르의 독에 세포가 녹으면, 그레칸의 회복력이 세포를 되살린다.

그 과정이 너무나 빨라 꿈틀거리는 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밀라니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휘청인 밀라니아가 침대를 꽉 붙잡았다.

피가 말라붙은 이불이 버석했다. 부축하려는 말란도르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밀라니아가 입술을 아프도록 꽉 깨물었다.

“그레칸이, 내 고통을 집어삼켰구나.”

“뭐라고?”

이해하지 못한 말란도르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밀라니아가 와락 소리쳤다.

“내 고통을 집어삼켰어!”

말란도르는 놀라서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화를 내는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밀라니아는 매서운 눈으로 죽은 듯 누워 있는 그레칸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이야?”

“그레칸이 내가 먹은 죽음을 대신 가져갔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말란도르가 당황하며 그레칸과 밀라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밀라니아의 붉은빛 섞인 황금색 색채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녀의 시선이 눈을 감은 그레칸의 얼굴에 못 박히듯 꽂혔다.

[밀라니아만이 그렇게 할 수 있어. 언제든 원할 때 내 목숨을 취해.]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리 약해진 내가 널 제지할 수나 있겠느냐.]

[응. 당신만이 할 수 있어.]

[내가 이 증오에 정신을 놓으면 얼마든지 날 죽여. 당신이 해야 할 건, 스스로의 몸을 보전하는 거야. 그렇지 못한다면 날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들.

“이제야 알겠구나.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확신에 찼는지.”

목 졸린 목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붉은 꽃이다.”

말란도르가 귀를 세웠다.

“붉은 꽃의 저주야. 그레칸은 그걸로 내 고통을 집어삼킨 것이야.”

어렴풋하게 이해하게 된 말란도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밀라니아의 입가에 쓰라린 웃음이 걸렸다.

“나 대신 아프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느냐. 내가 기뻐할 줄 알았느냐.”

밀라니아의 어깨가 잘게 경련했다.

“그, 그럴 리가. 붉은 꽃의 저주라니. 이놈에게 붉은 꽃을 취할 자격이 있었다고?”

말란도르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레칸을 보았다. 꿈틀거리는 피부. 경악도 잠시, 착잡해졌다.

“죽음보다 끔찍한 고통일 거야.”

재생과 반복을 쉴 새 없이 반복하고 있지만 생명체인 이상 한계가 있을 것이다.

“참아 낸다면, 살지도 모르지. 하지만 불가능해. 이건 내 진원이야. 나조차 해독할 수 없는.”

“…….”

“알잖아, 밀라니아.”

“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알잖아.”

“안다.”

그레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밀라니아가 짓씹듯 말했다. 말란도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고통이라도 덜어 주는 게 낫지 않겠어?”

밀라니아는 이번만큼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레칸은 죽어 가고 있었다.

세상의 그물을 벗어난 몸은 위대했지만 죽은 자가 아닌 이상 정통으로 맞이한 죽음을 피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죽기 전까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느니 포기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란도르의 의중은 이해했지만 밀라니아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타는 듯이 아팠다.

그 말이 이성적으로는 맞더라도 그녀는 결코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가 다오.”

말란도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라니아.”

“나는 절대 그레칸을 포기하지 않아.”

밀라니아는 힘주어 말했다.

“그레칸이 그랬듯이 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야.”

“너 정말 답답하게…….”

인상을 굳혔던 말란도르는 그레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밀라니아의 모습에 무언가 깨달은 듯 얼굴을 폈다.

“설마 밀라니아. ……하는 거야?”

당혹스러운 나머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목을 가다듬자 소리가 또렷해졌다.

“사랑하는 거야?”

“…….”

“이놈…… 그레칸을?”

밀라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가 달라는 무언의 뜻에 말란도르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레칸과 밀라니아가 한눈에 들어왔다. 뒤늦게 보였다. 그들을 한데 감싼 분위기가.

말란도르의 안색은 엉망이 되었다.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제기랄.”

달칵.

문이 닫히고, 방 안은 새벽의 요람처럼 고요 속에 잠겼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레칸.”

당연한 말이지만 그레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 감긴 얼굴. 꿈틀거리는 피부의 표면. 부들부들 경련하는 몸이 눈에 들어오자 밀라니아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하게 굴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만, 죽음에 다가서는 그레칸을 보니 머릿속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꽉 막혔다.

답답해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잘게 경련하는 고통에 겨운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자 결국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네가 이리 아픈 걸 보는 내 마음은 편할 것 같으냐. 어리석은 그레칸.’

침대 옆에 무릎을 꿇은 밀라니아의 목이 거칠게 갈라졌다.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안다고 했으면서, 왜 내 마음도 모르고 이런 짓을 해……!”

* * *

심연에서 그레칸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 겪는 육체적 고통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다.

그러나 그레칸은 선택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났다.

하.

‘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통이 뼈마디를 파고드는데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밀라니아가 이런 꼴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버티지 못했을 터.

만약 제때 처치하지 못해서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면. 또다시 그녀가 죽었다면.

그 상상이 지금의 고통보다도 괴로웠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그레칸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녀 대신에 아플 수 있다는 현실에 감사했다.

‘내가 당신 대신 아파서, 당신이 아프지 않아서 행복해.’

‘당신이 무사하다면 그걸로 족해.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을 수 있어.’

온몸이 백만 개의 세포로 분해되었다. 동시에 세포가 재생되고, 다시 분해되었다.

몸이 진흙처럼 녹아내리고, 다시 빚어지는 것처럼 그레칸의 몸은 변화를 반복했다.

산 채로 용광로에 떨어져 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이 수없이 그를 내리쳤다.

‘보고 싶어, 밀라니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왠지 당신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착각인가.

심장이 요동쳤다. 눈물이 날 것처럼 슬픈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마음이 기쁜데 왜 울 것 같단 말인가.

‘네가 이리 아픈 걸 보는 내 마음은 편할 것 같으냐. 어리석은 그레칸.’

그레칸은 이 감정이 자신의 감정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와 연결된 심장이 기쁘게 울었다.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목을 꿈틀거렸다. 녹아내린 성대는 소리를 내보내지 못했다. 그레칸은 아쉬운 얼굴로 생각했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안심시켜 줄 텐데.

‘걱정 마. 나 절대 안 죽어. 당신 두고서, 절대 안 죽을 거야.’

황금빛 문이 덜커덩거렸다. 그레칸의 손은 빗장을 꽉 붙들었다.

고통이 휘몰아쳤으나 결코 빗장을 풀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 이 고통은 그녀에게로 흘러들 것이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오롯이 나의 것으로.

이마가 펑 터져 나갔다. 핏줄이 가득 불거진 얼굴로 그레칸은 크게 웃었다.

* * *

그레칸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꼭 미소를 짓는 것처럼.

밀라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고여 있던 눈물이 똑 떨어져 그레칸의 입술을 적셨다.

수없이 많이 분해되는 그레칸에게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침대 시트를 적시고 안쪽의 솜을 적시고도 모자라, 침대 아래 피 웅덩이가 고였다.

피는 생명의 근원. 그걸 이리도 많이 쏟아 냈으니 회복 또한 느려질 것이라는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레칸의 몸이 까맣게 변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회복 속도가 분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뺨을 어루만지고 피고름이 난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널 홀로 괴롭게 만들 수는 없다.”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이 손목에 닿았다.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았다. 창틀에 놓인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그레칸이 유백색의 고아한 화병을 품에 안고 크리스털 방을 찾았다.

[꽃, 예쁘지? 이번엔 꺾지 않고 살려서 왔어.]

만발한 보라색 꽃 위로 그레칸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는 쑥스러워 말하지 못했지만.

밀라니아는 화병을 들고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그건 꽤 사랑스러웠느니라.”

바닥을 향해 화병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허리를 굽혀 가장 날카로운 조각을 쥐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야.”

화병 조각의 선단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그 끝으로 손목을 겨냥하고, 망설임 없이 찔러 넣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밀라니아는 크리스털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레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레칸은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몸을 적시고 있는 피는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똑.

똑.

입술 위로 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피가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지자, 밀라니아는 피부에 난 상처 위로 칼을 그었다.

칼은 화병 조각 대신 빠르게 피를 낼 수 있는 도구였다.

칼을 가져오는 도중 말란도르에게 들켜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그 정도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오로지 그레칸의 내부로 피를 흘려보내는 일에만 집중했다.

차도가 있었는지 회복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진원의 독이 활동하는 힘은 그만큼 약해졌다.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핥고 밀라니아는 새롭게 흐르는 피를 그레칸의 입술에 떨어뜨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새어 들어갔다.

핑. 머리가 어지러웠다.

비틀거린 그녀는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일주일 내내 피를 쏟은 팔은 너덜너덜했고 잠을 자지 못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가 좋아지고 있는 게 눈에 보여서 중단할 수가 없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레칸을 주시했다. 시야가 희끄무레했다.

착각일까?

아니다.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자, 밀라니아는 눈에 힘을 주었다.

문득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움찔.

그녀는 칼을 내리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눈꺼풀이 조금 떨어졌다.

닦아 내지 못해서 마른 피고름이 쩍 갈라진다. 하얀 공막과 까만 눈동자가 살짝 드러났다. 아주 조금.

그럼에도 밀라니아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쓰러지고 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그레칸의 눈동자였다.

눈이 완전히 뜨여지지 않은 상태로 그레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가깝게 움직였다.

까맣게 죽어 있는 눈동자가 일순간 반가운 듯 반짝였다.

밀라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에 뭔가가 가득 찼는데, 토해 내기가 버거웠다.

“아…….”

밀라니아는 귀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레칸은 말을 하는 게 어려운 듯 한참을 그릉대다가 겨우 한 마디를 더듬거렸다.

“미, 밀라니아.”

눈물이 치밀어 올라서, 목소리가 잠겼다.

“그래. 나 여기 있느니라.”

“모, 몸은, 어, 때? 아, 아프지, 않지?”

밀라니아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그레칸이 보고 있었다.

두 팔을 그레칸이 볼 수 없게 아래로 내렸다.

손목에서 시작된 상처는 팔꿈치까지 올라와 있었으므로, 조금이라도 팔을 들면 그의 눈에 띌 것이다.

그레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멍청하고 미련한 그레칸이라면, 제 몸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그녀 걱정을 할 테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그레칸이 제대로 볼 수 없을까 봐 바싹 마른 혀를 움직였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밟혀 으스러질 듯한 낙엽처럼 버석거렸다.

그레칸의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웃는 것 같았지만 안면 근육이 의도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다, 하, 다, 다행이야.”

끊어지는 음절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아프게 긁었다.

밀라니아는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잔존하는 흑계의 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아프다.”

그레칸의 눈에 의문이 번졌다. 밀라니아는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슴이 아프구나, 그레칸.”

“…….”

“이 꼴이 된 너를 보는 게 힘들어.”

지친 듯 중얼거린 밀라니아는 막힌 둑이 무너진 것처럼 속에서부터 소리가 뛰쳐나오는 걸 느꼈다.

네가 말했던 게 이런 의미였느냐?

내가 바라면 널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느냐?

그녀는 심장을 더듬거렸다. 어느 때보다 수축된 심장이 느껴졌다.

일주일간, 그레칸을 간호하면서 붉은 꽃 저주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놓치는 법이 없다.

그레칸은 세상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세상의 변수. 그런 그가 마냥 날뛸 수 없게 하는 제동 장치. 그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라는 족쇄에 발목이 메인 그레칸은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다.

심장과 심장을 연결한 튼튼한 끈. 밀라니아는 울화가 치밀었다.

“붉은 꽃의 부작용이, 붉은 꽃의 저주가 심장의 연결이었느냐.”

그레칸은 녹아내리고 다시 생성되는 탁한 각막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가라앉고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주, 아니야. 축복이다.”

심장을 강하게 움켜쥔 밀라니아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침대 시트 위에 손을 올린 밀라니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레칸의 입술이 연신 움찔거렸다.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얼굴인데, 말갛게 웃는 그의 얼굴이 연상되었다.

밀라니아는 감정을 듬뿍 담아 말했다.

“미련하고 답답한 것 같으니.”

“…….”

“내 삶에 징그럽게 달라붙어서, 마침내는 심장마저 묶어 버리는구나. 내가 죽으려면 네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게냐?”

“내가…… 내가, 죽기 전에는…… 당신, 못 죽어.”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지그시 응시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든 듯 눈을 여러 번 깜박거리는 그가 보인다.

그녀는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가.’

사랑?

사랑은 행복과 분노와 슬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이런 게 사랑이라고?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게, 이런 이상 상태가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모든 사랑하는 자들은 위대한 존재들일 것이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은 이 기분을 감내한 그들은 박수 받을 자격이 있었다.

잔잔한 호수의 수면 같았던 마음이 뒤집히고, 하늘과 땅이 바뀌고, 온전히 서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기분이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이한 감각 속에서 밀라니아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뱉었다.

“죽지 마라, 그레칸.”

“…….”

“죽으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

그레칸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거북이보다도 느리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 위를 덮었다.

“안 죽어.”

“…….”

“당신을 두고서는, 안 죽을 거야…….”

소리가 아스라하게 흐려졌다.

“그러니까 걱정 마.”

툭, 떨어진 눈꺼풀이 그의 눈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밀라니아는 손을 뒤집어 그의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겹쳤다.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안다면. 어떻게 내 고통을 네가 가져갔는지 안다면.

“차라리…….”

한숨처럼 소리가 흩어졌다. 정신을 잃은 그레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밀라니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의 말 한마디, 집요한 눈빛, 진득한 손놀림이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차라리 내가 다시 아프고 싶구나. 네가 아니라 내가.”

고개를 숙인 밀라니아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툭 얹었다.

고약하게 썩은 피 냄새가 올라왔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밀라니아 님이 궁금해하시니 저도 궁금해지네요. 사랑이란 뭘까요?]

[한 가지 꼽아 보자면, 희생이지 않겠느냐.]

[희생이요?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지는 부모 같은 일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희생은 내가 아프더라도 상대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느니라. 희생하는 행위는 사랑하는 상대에게만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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